228화.
월량은 그 뒤로 이어진 핏자국까지 손날로 훔쳐 닦으며 연못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남의 몸에 묻었던 약혈(藥血)에는 마음이 쓰여도 제 몸에 묻어 있는 피는 아무렇지 않은지, 대리석 바닥을 새로이 적시는 선혈에 별다른 관심을 두진 않았다. 도리어 등과 허리에 붙는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손으로 짠 월량은 찰박찰박 걸음을 옮겼다. 사람으로 거듭나는 수치심을 몰랐기에 나신으로도 거리낌은 없었다.
성역은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무릉도원이었다. 척박한 험지에서 평생을 투쟁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은 풍족하고 평온한 영원을 갈망했다. 메마른 고초가 언젠가 크게 보상받길 바랐고, 비참한 죽음 뒤엔 약속된 영광이 있길 바랐다. 소망은 곧 광신이, 광신은 곧 종교가 되었으며 의존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고된 삶을 벗어나는 핑계로 순교를 내세우는 일은 예사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잘것없는 자신이 죽어서 가게 될 사후의 세계를 손끝으로 구현했다.
수많은 목숨과 깊은 바람과 오랜 시간을 딛고 구축된 성역은, 그러니 지극히 화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삭막한 황무지에 불과한 바깥과는 다르게 어디선가 끌어온 햇빛이 반구형의 낙원을 사시사철 따사롭게 비췄다. 맑은 하늘을 의미하는 천장에는 흰 대리석을 쌓아 올렸고, 푸른 초원을 대신하는 바닥에는 영롱한 비취와 단백석을 박았다. 눈동자를 칠하지 않은 신들이 축복받은 땅을 둥글게 에워싸 지켰으며 백옥과 녹옥을 깎아 영원히 시들지 않을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먹을 수 없는 열매가 달린 과실수 아래에 멈춰 선 월량은 멀뚱한 표정으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양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있던 사람은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그 대신 소사(素紗)에 금실로 수놓은 면사만이 고스란히 구겨진 채 처박혀 있었다. 예상은 하였으나 괜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잠시 샐쭉거린 월량은 오른손을 들고, 느낌을 확인하듯 두어 번 주먹을 쥐다가 손가락을 쭉 폈다. 날카로운 손톱과 가지런히 긴 뼈대, 능라 같은 손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느 순간 왜소한 체구의 사람이 멀찍이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한 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월량의 일곱 보 앞까지 사뿐사뿐 다가간 소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맨손으로 바닥을 짚고 이마를 댄 채 푸석푸석한 백발을 흩트리며 말했다.
“재림을 경하드립니다, 존제.”
“아윤은?”
“약선께선 현재 제자들과 함께 곤륜산의 곤륜파에 의탁하고 계십니다.”
“그새 빨빨거리며 멀리도 갔구나. 하긴, 나 없을 땐 겁도 없이 바다도 건넜다 했지.”
감정을 감추며 살 이유가 없다 보니 어절마다 불만이 뚝뚝 묻어났다. 그 아이 여정을 곁에서 보채고 얼러 가며 직접 들었을 땐 그 목소리가 기껍기만 했는데, 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고새 불쾌한 옛일로 돌변하는구나. 월량은 아우의 함초롬한 목소리를 되새김질하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뜻을 뒤늦게나마 곱씹으며 섬세한 아미를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일곱 살 난 아이처럼 입술이나 비죽이면서 미적미적 제 어깨와 팔을 주물렀다. 엷은 붉은색 생기가 돌던 피부는 연못을 나오자 손끝부터 서서히 식어 어느새 납빛을 띠고 있었다.
“존체를 날붙이로 범한 주패군을 미연에 막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나는 그따위 꼬챙이질보다 무용한 사죄가 싫어. 네가 그다지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알아. 하지만 너희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제 와 돌이키지도 못하며, 내가 일찍이 용허했다면 그것으로 되지 않아? 가타부타 말을 붙여서 꼭 쓸데없이 아니다 됐다 괜찮다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니까.”
광천마제는 아랫것의 발언에 일일이 호불호를 논하고 트집을 잡을 만큼 타인을 향한 흥미가 넘쳐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는 진실로 싫다기보단 곁붙이가 멀어져서 생긴 짜증일 터. 소지는 수그린 자세 그대로 화풀이 대상이 된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당장은 사죄가 싫다고 했으니 죄송하다는 말은 빼야 했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존체를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알아서 해.”
“황송할 따름입니다.”
소지는 그제야 허리를 바로 세웠다. 무릎은 바닥에 대고 앉은 그대로 초점 없는 눈동자만 올려 되살려 낸 월량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어설프게 연단되어 제 입에 들어갔던 새끼손가락도 다시 곱게 달려 있었고, 주패군이 겁도 없이 꽂아 넣었던 칼자국도 그새 흔적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운예검이 박혀 있던 가슴팍 사이만큼은 여전히 세로로 쩍 벌어져 있었다. 복장뼈도, 폐와 심장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닥없는 구덩이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박제된 상처는 난도질한 시신이나 약품에 절인 살점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이를 본 소지는 희미하게 눈가를 찌푸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냈다.
“기의는 어떠십니까?”
“졸리고 성가시다.”
“약혈로 존체가 온전히 복구된다면 혼이 정착하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으리라 예상했습니다만, 과거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 회복을 방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술법의 복원이 어설펐나? 소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진 게 지능밖에 없는 소지와 그 밑의 대원들은 불타 훼손됐던 광명교의 비전 술법을 모조리 긁어모아 기워 맞췄다. 무너진 토대와 재만 남은 유적에서 칼자국과 글월 조각을 본떴으며 널린 목숨을 재료로 끊임없이 실험했다. 강시제조법을 되찾기 전까진 교단의 모두에게 업신여겨지고 앞날은 막막하여 지난한 과정이었으나 소지는 광적인 열의를 품고 있었다.
불완전한 연신단을 먹고 죽어가는 도중 방의 구석에서 윤(昀)의 글귀를 발견했을 때부터, 나와 같은 처지에 처했을지도 모를 이를 위해 남긴다는 말을 손끝의 감각으로 읽었을 때부터, 그리고 기어코 살아남아 또 다른 실패작이 되었을 때부터 소지는 약선의 행보를 열렬히 추종하는 신자였다.
그러니 약선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결과는 어렵지 않게 인과를 짚어 낼 수 있다.
“짐작건대 봉인의 상흔도, 부활의 약혈도 모두 약선 대협에게서 비롯되어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부름을 받은 세 명의 무인이 기척 없이 나타나 소지의 양옆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모두 목 위로 거친 삼베 자루를 뒤집어쓴 채 새끼줄을 목에 감은 사형수의 차림이었고, 품에는 커다란 유리 물병을 안고 있었다.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교주 주패군을 보필하던 좌우호법과 대호법이었다.
호법들은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고개를 숙인 그대로 일어나 월량에게 다가갔다. 자신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지존의 신체 말단을 조심히 감싸고 물병을 기울였다. 새벽이슬을 모아 살구 꽃잎을 띄운 물이 피를 씻어 내고 살갗에 윤기를 입혔다.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비딱하게 서 있던 월량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제 가슴 사이 구멍에 손끝을 넣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대로가 좋다.”
“예? 하지만 회복이 더뎌질 수 있습니다.”
“교주의 장례식도 살 조각을 그러모아 치러야 할 마당에 빠르고 더딤을 걱정할 까닭이 어디 있어. 아윤의 자취를 지워 가며 만전을 기해야 할 만큼 대단치 않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싫다는데 어찌하랴. 바닥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소지는 눈치 빠르게 말을 아꼈다. 절대자란 모두 생애에 역린 하나쯤은 지니고 있었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그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했다.
손 날랜 호법들은 그새 월량의 육신을 깨끗이 하고 머리카락 끝까지 이슬로 헤었다. 그리고 발밑으로 흐르는 물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저마다 무거운 비단 수건을 꺼내 들었다.
거머쥔 능단이 차츰차츰 월량의 육신을 더듬어 올라갔다. 무릎 안쪽에서 맨 허벅지를 따라 골반까지 이어진 빗근을, 톡 도드라진 장골과 촘촘한 복횡근을 거슬렀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광천마제의 팔 밑을 지나 등으로 돌아선 대호법이 두건 안쪽에서 참았던 숨을 저도 모르게 훅 뱉었다. 목덜미에서 견갑골을 지나 등으로 떨어지는 선이, 사소한 움직임마다 따라 기동하는 근육의 치밀한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사람답지 않았다. 설화석을 깎아 만든 신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굳어 신화의 한 장면이 되실 것만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호법들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한 색의 머리카락을 말려 끄트머리를 땋았고, 아물어 버린 귓불에는 흑요석 귀걸이를 꿰었다. 벗은 어깨엔 설백색의 입령 유의(襦衣)를 걸쳤으며 덧입힌 직령 장포 위엔 상아와 금으로 만든 요대를 둘렀다.
마지막 덧옷으로 황야의 주인이었던 환수의 모피를 조심히 얹은 호법들이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전신을 덮고 있던 핏물을 지워 낸 월량은 수려한 아치형 눈썹과 우아한 음영, 긴 속눈썹과 밝은 눈동자를 지닌 미형의 모습이었다. 존위에 오르며 이마 가운데 월상(月像) 모양으로 떠오른 황금색 심안이, 얇은 눈두덩 한쪽을 차지한 조그만 다자색 점이 섬세한 용모를 유독 화려하게 부각했다. 존재감을 고스란히 그려 낸 몸태는 눈에 띄게 훤칠하였으나 투박하지 않았고, 인세의 온갖 호사스러운 것들을 모아 만든 의장이 맨얼굴에 도리어 모자랐다.
대호법은 끝으로 태양과 일광을 묘사한 황금 관을 벽옥반에 받쳐 진상하듯 들어 올렸다. 월량은 심통이 다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관을 내려다보다 손을 휘저어 물리곤 말했다.
“소지야, 이 교단에 호박(琥珀)이 있더냐?”
“예, 마교는 광명의 그늘이니 존제께선 무엇이든 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령 그 안에 바라시는 보옥이 없다 하여도 낙담하시기 전에 구하여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가서 호박 중에서도 밀황색으로 이만한 놈을 하나 가져오거라. 평소에는 밀화(蜜華)처럼 은은하지만 빛을 받으면 금패(錦貝)마냥 영롱해지는 게 좋겠다. 안에는 기포도, 미물도 하나 없어야 한다.”
속이 허해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구나. 가슴에 뚫린 공혈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한낮의 모래 언덕처럼 부드럽게 스러졌다. 멀리서나마 약선 초윤을 배알한 적이 있고 그 눈동자를 기억하는 소지는 조용히 고두하며 무릎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