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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30화 (230/257)

230화.

“빙궁에 가야겠어.”

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마주 잡아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고 있던 사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곁에서 뜨끈한 탕국을 수저로 뜨던 사현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북해빙궁?”

“그래, 얼음은 얼음쟁이 놈들이 제일 잘 알겠지.”

“하지만 스승님은 빙공이 아니라 사술에 당하셨잖아. 둘이 다른 거 아니야?”

“그럼 뭐 어떡해. 지금 중원은 강시 때문에 사술을 쓴다고 하면 피아 안 가리고 다 잡아 죽이러 드는데. 살아남은 사람들도 숨어서 안 나오려 할 거야. 애써 찾아내 봤자 어설프게 배운 놈들이 대다수일 테고.”

“그야 그렇지만…….”

“그럴 바엔 얼음이라는 실마리 하나부터 물고 늘어지는 게 나아. 사막도 건넜는데 지금 빙궁이 별거야? 뭐 빠지게 뛰면 안 될 것도 없다고. 그래, 빙궁이 답이야.”

“동의합니다, 사저. 아예 스승님을 모시고 가서 증상을 보여 주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이번에도 둘로 나뉘지요. 사저와 사형이 먼저 출발하시면, 저는 서안에서 장거리 여정을 준비해 스승님을 모시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면 가까운 분타에 들려서 언질을 해 둘 테니까 채비를 좀 단단히 하고 와. 황하강까지는 하오문의 마차를 얼마든지 빌릴 수 있을 거야. 대초원으로 넘어가면 눈에 띌 테니 말이 최선이겠지만, 뭐. 여차할 땐 네가 또 모시고 뛰면 되니까.”

“예, 사저는 스승님께서 곧장 진맥을 받으실 수 있도록 먼저 도착해 사전에 협의해 주십시오.”

“황금을 궤짝으로라도 들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구나. 필요 없다.”

“스승님!”

오가는 대화를 듣다가 참지 못한 초윤이 제자들의 계획을 단칼에 저지하자, 스승의 상태를 듣고 분개한 사영이 재깍 아우성쳤다. 말은 없었지만 천오 역시 납득할 수 없단 표정으로 초윤을 보았고, 개중에 사현이만은 남몰래 안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공을 안 써도 발작이 올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무공을 쓰기도 어려우시고, 언제 갑자기 혼절하실지도 모르는데 저희가 어떻게 안심을 해요. 어떻게든 빨리 방도를 찾아야…….”

“대초원은 너희들이 함부로 오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빙궁 또한 마찬가지고.”

“그래도…….”

“무엇보다 각자 맡은 책임이 있는 너희들이 그토록 길게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느냐. 중원의 환란은 앞으로 더욱 극심해질 터인데.”

“…….”

당장 빙궁으로 가야 한다느니, 이곳에서 마교의 잔당을 더 털어 봐야 한다느니 계획을 구상하던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지. 초윤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천오는 소속된 곳이 없는 낭인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내색 없이 초윤의 잔을 채워 주었지만, 남매는 다음 주가 시험이라는 소식을 들은 학생처럼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당연했다. 초윤이 키운 세 아이는 반골세수도 받았고, 환골탈태도 했다. 영약을 아낌없이 먹여 키운 덕분에 내공의 양은 대형 문파의 장문인에 버금갔으며, 우수한 육체에 어울리는 실력 또한 부단한 노력으로 갖추게 되었다. 각자 단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화경이라는 신인(神人)의 경지에 도달했음은 확실했다.

사형제 셋이 모두 화경이라니, 세상이 이런 애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특히나 무협처럼 무공에 따른 취급 차이가 불공평하다 못해 극심한 장르에선 절대로 유유자적 내 일만 하면서 살 수 없었다. 초윤 자신처럼 소속된 곳도 없고 나이와 업적도 많아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사영이와 사현이는 하오문 출신의 젊은 강자였다. 어디 가서 업신여김은 받지 않더라도 마구 부려 먹히기엔 딱 좋은 스펙이었다.

“강시는 무림인과 민간인을 구분해 공격하지 않으니 하오문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네가 그 꼴을 그저 두고 볼 성정도 아니고. 내 말이 틀리더냐?”

“……맞습니다, 스승님.”

“신강까지 온 것만으로도 너희는 최선을 다했다. 내 앞가림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더 이상 제 입을 막는 ‘초윤’은 없었으나 진심을 똑바로 전할 수 없는 상황은 여전했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도우려는, 이미 도우러 온 아이들에게 매몰찬 말을 직접 하려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막아야 했다. 초윤은 ‘초윤’의 기억을 통해 이미 북해빙궁(北海氷宮)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무협지에 종종 등장하는 새외무림 중 하나인 북해빙궁은 대체로 ‘중원에서 한참 먼 북쪽에 있으며 빙공(氷功)을 주로 익히는 문파’라는 설정을 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빙결 초능력에 가까운 무공이 특징인 문파였는데, 이곳을 찾은 주인공은 북해빙궁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만년빙정 같은 영약이 목표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단은 위치부터 문제였다. 대부분의 소설 속 북해빙궁은 주로 사시사철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땅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묘사가 들어맞는 대륙 북쪽, 러시아 극동이나 시베리아를 작중 배경으로 끌고 오기엔 고대의 교통 시설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이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바이칼 호수나 오호츠크해를 북해빙궁으로 삼거나 아예 가상의 땅을 두었는데, 〈귀환영웅〉은 그중에서도 몽골의 북쪽 너머에 있는 호수에서 발견된 위구르 제국의 성을 빙궁으로 정했다. 주인공 모용서가 빙궁까지 간 적은 없었지만,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축지법 없이도 중원에 왔다는 서술이 가능하도록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고른 듯했다.

사실 대초원, 현대 용어로는 몽골이 나왔을 때부터 무엇보다 걱정해야 하는 사항은 지리적 위치보다 역사적 내력이었지만 대부분의 무협 소설이 실제 역사를 철저히 반영하진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명나라의 낭만적인 문화만을 섞어 만든 가상의 중원이니 최소한 몽골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북원의 군대에게 쫓길 걱정만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중원이 명나라가 아니고, 몽골이 북원이라 불리지 않는 대신 광풍사(狂風沙)가 있는 무협 세계지만 말이지……. ’

초윤은 기억 속의 몽골 기반 새외무림, 광풍사를 떠올리며 가득 찬 찻잔을 홀짝였다. 가상의 세력인 북해빙궁은 주인공의 협력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재하는 나라와 민족을 기반으로 한 여타 새외무림은 중원 중심의 무협지에서 대체로 악랄하고 미개하게만 표현되곤 했다. 사특하고 잔인한 서장의 라마승부터 기묘하고 신비로워 잘 다뤄지지도 않는 천축, 마교나 혈교에게 이용만 당하는 남만야수궁과 무공도 발달하지 않은 대막의 마적들…….

하지만 월량을 봉인할 방법과 약에 대한 관심으로 이 모든 곳을 직접 방랑하며 돌아다닌 ‘초윤’은, 그리고 동아시아사를 교양으로나마 익혀 두었던 정하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오랑캐 취급이었다. 중원의 땅에 속하지 않은, 그리고 중원과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역의 민족들을 향한 편견이 섞이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무협지는 이미 완성된 세계관을 사용했을 뿐이니 어느 지역을 특별히 차별할 의도는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형성된 무협 세계를 직접 경험하게 된 초윤으로선 입맛이 씁쓸할 일이었다. ‘서장 출신의 승려’였던 나라연천금강만 보아도 빤하지 않은가. 구원 요청을 받고선 사막을 두 번이나 횡단한 뒤 물심양면 회복까지 돕는 사람의 어디가 그렇게 악랄하고 사특하다는 건지.

아무튼 〈귀환영웅〉의 몽골은 북원의 존재를 얼버무린 대신 광풍사라는 새외무림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빙궁에서 온 사자들이 ‘대초원에 강성한 광풍사의 습격을 무릅쓰고 왔다’며 자신들의 긴 여정을 부각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곳의 몽골은 함부로 들어갔다간 광풍사의 노략질에 목숨까지 빼앗긴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초윤’은 몇십 년 전 그 대초원의 거대한 땅을 두 다리로 저벅저벅 종단해 빙궁까지 가는 기행을 저질렀었다. 〈귀환영웅〉의 ‘초윤’에게 붙어 있던 ‘북해 광물에 통달함’ 설정의 뒷이야기였다.

“추격을 달고도 신강의 사막을 거뜬히 넘어온 너희라면 물론 해낼 수 있겠지. 실력을 믿지 못해 하는 말이 아니다. 너희들이 반드시 목숨 바쳐 중원을 구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 또한 아니고.”

“그러면 스승님, 다른 일은 사제들에게 맡기고 다리가 빠른 저만이라도 얼른…….”

“아니, 내가 북해빙궁에 가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대초원을 종단한 적도 있고, 북해빙궁에 머물며 빙공의 묘리와 근방의 영약을 파헤치기도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안 가 본 곳이 어디야? 제자 셋이 동시에 표정으로 말했다. 초윤은 멋쩍은 마음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광명교는 이미 북해빙궁이 가진 모든 무공과 술법, 진법을 수집하고 분석했다. 가서 물어보았자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뿐일 테니 소용이 없다.”

“예?”

“더 찾아보겠다며 돌아다닐 시간에 내 머릿속이나 뒤져 보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광명교가 무너진 뒤 세기의 시간이 흘렀으니 달라진 점은 있겠지만…… 이 사술을 건 자가 초월량이라면, 약선 초윤과 같은 세대를 살다가 근래에 부활한 그 사람이라면 차라리 ‘초윤’의 백(魄)을 샅샅이 찾아보는 게 훨 나을 듯했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생각해 낸 합리적인 이유였다. 초윤은 일단 아이들이 그 위험한 사막과 초원을 오가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빙궁이 자리 잡은 위치의 다른 후보들보단 그나마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죽음의 사막만으로도 아직 속이 덜 풀렸는데 대초원이라니. 중원을 끔찍이 싫어하는 광풍사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곡도를 든 채 미친 듯이 쫓아오는 그 땅을 건너 얼어 죽을 빙궁까지 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이만큼 말했으니 알아들었겠지. 초윤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저를 들어 아직 따듯한 죽을 한술 떴다. 함께 저녁을 들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려 했건만, 천오가 초윤의 상태를 냅다 고발해 버린 덕분에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금 뚱한 기분으로 숟가락을 문 채 시선을 들자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무언가 단단히 실수했다는 직감이 들어 사고가 우뚝 멈췄다.

어?

그러고 보니 내 새끼들이…… 광명교를 아나?

아니, 애초에 중원 사람들이 광명교를 알고 있던가?

이런 젠장, ‘약선 초윤’이 광명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마저도 안 지 얼마 안 됐었지!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는 편한 저녁 식사 시간은 개뿔, 스승의 비밀스럽고 충격적인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자백하게 생긴 초윤의 등 뒤로 난처한 식은땀이 쭉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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