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초윤’은 남매를 방치했으나, 불귀산맥이라는 험준한 환경에 공격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나름의 조처를 해 두었다. 그중 하나는 요괴가 아이들의 생활 반경까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두망산의 이곳저곳에 진법을 쳐 두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혹시라도 진법이 뚫렸을 경우를 대비해 악한 영기(靈氣)를 막아 주는 부적을 쥐여 주는 것이었다. 일반인은 영수(靈獸)와 영목(靈木)으로 가득한 불귀산맥에 들어오는 순간 방향과 이지를 잃고 영영 헤매다 미치거나 습격을 당해 죽었기에 어린아이들이 산맥을 안전하게 들락날락하려면 이 비녀와 방울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초윤은 이무기 사건 이후로 ‘초윤’의 진법을 본떠 장명쇄를 만들고, 천오에게 건네주었다. 그 뒤로 천오 역시 불귀산맥의 요괴들에게 공격받은 적은 한 번도 없어 이젠 어느 정도 잊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강시를 막아 줬다고?
아니…… 그래. 잘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는 말이었다. 초윤이 직접 만든 부적은 일종의 결계 아이템이었다. 타락하여 포악해진 영수들의 침범을 막아 주고, 또 불귀산맥의 해로운 자연진법의 영향에서도 안전하게 아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더불어 약간의 활력 버프와 추적 기능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세상 모든 지식에 통달한 은거기인이나 만들 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초윤’의 백을 이어받게 된 지금에야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불귀산맥에 가득한 ‘영력’, 생명 활동의 근원이 되는 ‘힘’, 무림인이 몸 안에 쌓는 ‘내공’은 정제하는 방법만 다르지 전부 똑같은 힘이었다. 이 잠재력 큰 에너지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로 끌어내는 원동력이었으며, 주술과 진법 또한 같은 힘을 원료로 삼았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시전자의 감정과 능력에 의존하여 매번 성능이 크게 달라지느냐, 아니면 체계화된 지침이 있어 누구든 제대로 배우기만 한다면 기본은 할 수 있느냐 정도였는데 이마저도 경지에 다다르면 경계가 흐려져서 무엇이 주술이고 무엇이 진법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초윤’이 만든 부적은 악한 영력을 막아 주었고, 주술과 진법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힘은 결국 근본적으로 같았다. 그런데 강시 제조법은 주술의 일종이었으며 시체를 조종한다는 점부터 자연의 이치를 능멸하는 삿된 술법이었다.
그러니 초윤의 부적이 사술의 산물인 강시를 막아 낼 수 있을 법도…… 했다.
그러면 일단 좋은 일은 맞는데. 정말 다행이고 안심되는 일이긴 한데…….
‘초윤’은…… 이걸 알고 있었을까? 설마 이십 년 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오리라고 예상한 걸까? 광명교와 초월량은 둘째치더라도, 오래전에 지워 버렸던 주술이 부활해 많은 이들을 해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천오가 세상을 재구성하기 전, 〈귀환영웅〉이었을 때도 ‘초윤’이 같은 부적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었던가? 아니…… 애초에 천오가 신물을 쓸 때 ‘초윤’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도대체 어떻게 나의 혼을 불러왔지?
정말 그의 말대로 현경이라는 경지가 그 모든 간섭을 가능케 했다면, 또 다른 현경의 강자인 나라연천금강 역시 회귀에 관해 조금이라도 눈치채고 있어야 하지 않나?
불안한 상념이 제멋대로 머릿속을 주파하며 휘저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뒤통수가 징징 울렸다. 백(魄)을 받고 나서도 ‘초윤’이 표면에 나와 있었을 8년의 세월만큼은 떠올리지 못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태어나 남겨 온 발자취를 뜻하는 백이 어떻게 개인의 기억력에 좌우될까. 처음부터 간단명료한 사실이었으나 막대한 물량의 지식과 시야를 흡수하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초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기억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마치 삭제당한 것처럼, 누군가 검열하여 먹칠한 것처럼…….
도대체 누가? 이것도 ‘초윤’의 짓인가? 하지만 나에게 분명 모두 주겠다고 했는데. 사라지기 전 마지막 말마저 기만이었는가?
심장에 차가운 한기가 엄습하는 가정이었다. 초윤은 잠시 숨이 막혀 헐떡이다가, 곧 입술을 질끈 씹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심상 세계에서 보았던 풍경. 어찌 보면 상상에 지나지 않을 법한 모습이었으나 초윤은 ‘초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호박색 두 눈에 적막하게 드리우던 그림자와 그럼에도 끝까지 꺾이지 않은 총기를 기억했다.
‘초윤’은 초윤을 다독이고 안심시키며 더할 나위 없이 미안해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고, 확신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는 의심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설마 또 속진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사영이가 떨어진 비녀를 움켜쥐고 주먹으로 눈두덩을 거칠게 닦으며 말을 이었다. 짧은 순간 방대한 상념 속에서 헤매던 초윤은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제정신을 차렸다.
“저희는 스승님이 부끄럽지도 않고, 앞으로의 일이 무섭지도 않아요. 다시는 저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고요.”
“…….”
“그러니까 스승님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아 주세요…….”
초윤은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사영이는 서러워하고, 사현이는 기다리는 도중 뺨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새카맣고 올곧은 눈동자가 초윤의 눈가와 입술, 턱과 목울대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복잡한 감정에 하염없이 빠져들 뻔했던 초윤은 그 이질적이고 집요한 감촉을 붙들고 생각보다 금방 정신을 차렸다.
“……미련하기는. 어려운 길을 자처해 걷는구나.”
“옳은 길일수록 어렵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스승님이시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됐다. 알아서 하거라.”
울고 화내며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냉랭한 일갈처럼 들리지 않을까 싶어 조금 조마조마했지만 남매의 표정을 보니 그도 아닌 듯했다. 재빠르게 머리를 쥐어짜 낸 캐해가 맞았다니 다행……이었다.
초윤의 대답을 듣고 헤프게 웃은 남매는 울음을 뚝 그친 뒤 다시 수저를 들었다. 싱글벙글하는 얼굴에 조금 전까지 글썽거렸던 눈물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어 도리어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가짜 울음이었다면 또 어떠하랴. 밥상머리 앞에서 진심으로 운 게 아니어서 오히려 잘됐다고 여겨야 할 일이다. 속으로 한숨을 섞어 웃은 초윤은 마찬가지로 함께 숟가락을 들며 물어보았다. 아이들이 꺼낸 부적을 봤을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은렴 상태를 보니 누군지는 몰라도 중원에 괜찮은 진법가가 있었나 보구나. 그대로 고스란히 복제해서 나누어 주어도 좋았을 터인데.”
“아, 스승님. 이건 설린 소저가 고쳐 주었습니다.”
사현이가 집어넣으려던 방울을 번쩍 들어 보여 주었다. 온전하진 않아도 최대한 복구해 놓은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천혜지봉 제갈설린이라면 가능할 법도 하지. 초윤은 마지막으로 봤던 설린을 떠올리며 납득하고 끄덕였다. 제갈가의 영특한 아이가 그동안 정말 고맙게도 제자들을 많이 도와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사현이가 제갈설린을 천혜지봉 대신에 사성철려라고 부르지 않았나? 별을 쏘아 맞추는 창끝과 주법(呪法)……. 창끝?
“설린 소저가 정말 많이 노력했지만 결국 복제는 못 했어요. 진법에 쓰인 언어와 법칙부터 전혀 접해 본 적 없고, 좁은 표면적에 여러 술법을 겹쳐 새겨 두셔서 따로 본을 뜨기도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맞아요, 스승님. 제 비녀와 천아의 장명쇄까지 빌려 가선 보름 밤낮을 새워 가며 분석했는데도 안 되겠다고 울더라고요. 그래도 얻은 실마리는 있었는지 일정반경 안의 위험을 인식해서 알려 주는 기물을 엄청 많이 만들어 냈어요. 강호의 6할이 그걸로 목숨을 건졌을걸요. 저희도 하나씩 갖고 있어요.”
강시 문제를 해결할 지름길이 있다는 소식은 희망적이었다. 방법을 찾았으니 회복하면서 틈틈이 보급판 부적이라도 만들어 봐야겠다. 애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완벽하진 않아도 될 거 아냐. 장신구에 세공까지 할 필요도 없을 테고, 만들기도 쉽고 지니기도 쉽게 패(牌)처럼 깎아서…….
초윤은 수저로 죽을 떠먹으며 태연히 물었다.
“네 혀의 주술도 제갈설린의 작품이더냐?”
“예, 맞아요! 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달포 만에 방법을 찾아내더라고요. 입으로 뱉는 모든 말에 주력(呪力)이 실리면 안 되니까 봉인도 함께 해 줬어요. 이게 다른 게 아니라 천아 덕분에 생각해 낸 건데요. 사천에 갔을 때 기억하시나요? 여와 대장이 데려왔던 무사들을 피해 도망칠 때 천아가 소리를 질러서 시간을 번 적이 있……었는데…….”
활기차게 얘기를 이어 가던 사영이가 갑자기 흐물흐물 말을 흐리더니 어중간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초윤의 안색을 열심히 살폈다. 그 표정이 어쩐지 제멋대로 문신을 하고 들어와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느껴져서, 초윤은 픽 웃음을 삼켰다.
“기억한다. 틈 없이 주술을 쓸 수 있다면 허를 찌르기엔 좋겠구나. 부작용은 없고?”
“네…… 네!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무인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 꼼수긴 하지만 잘 쓰면 정말 편해요. 매년 새로 새겨야 해서 번거롭기도 한데, 설린이가 매번 기꺼이 도와주고 있고요.”
“그래, 몸에 해가 없으면 됐다.”
주술에 대한 중원의 인식이 많이 안 좋아지기도 했고, 또 혀의 문신은 흔하지 않아 면사를 쓰게 된 듯했다. 이 모든 위험과 번거로움을 끌어안고 삿된 것이라 여겨지는 주술을 기꺼이 제 몸에 새긴 행동력만큼은 역시 사영이다웠다. 몇 가지 술법을 더 알려 주면 본신의 능력을 소홀히 하게 될까. 사영이가 사도(邪道)로 빠져 실수할 애는 아니긴 한데.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더 해 볼지 고민하고 있자 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초윤은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사영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화제가 바뀌는 약간의 간격을 타서 한 번 더 툭 내뱉듯 말했다.
“사현, 너는.”
“네, 네?”
“눈이 괜찮은지 물었다.”
태연을 가장하여 입을 열었던 초윤은 살그머니 마른침을 삼켰다. 주술이나 강시의 이야기를 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가슴 속에서 봉우리를 틔웠다. 자칫하면 찢어질 것처럼 연약한 표면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초윤은 최대한 부드럽고 유연한 목소리를 내며 시선을 들었다.
못 본 사이 어조는 차분해지고 행동은 점잖아진 사현이가 초윤과 똑같은 연갈색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무지의 산꼭대기에서 호박색으로 빛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