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무협지에서 결손은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사지가 없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알고 보니 범접할 수 없는 강자였다는 상황도 흔했고, 주인공의 영구적인 부상은 곧 다른 방향으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애초에 수십만 명의 인간들이 늘 도검을 지니고 다니며 수틀리면 베거나 죽이고 보는 세계관인 만큼 피와 상처는 당연했다. 당연하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윤은 타고나길 무림인으로 타고난 것도 아니었고, 스승인 동시에 보호자였다. 두 눈을 잃었던 일이 사현이에게 꺼내기도 어려운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봐, 그리고 새로 생긴 안구의 이질감에 계속 앓아 왔을까 봐 쉬이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사현이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초윤이 흠칫 굳기도 전에 너무나도 무던하게 제 눈두덩을 만지작거렸다.
“어…… 괜찮아요. 오히려 시력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어요. 안력이 뛰어나야 할 사람은 누나인데 바뀐 거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까요.”
“야! 넌 뭔 말을……. 괜찮아요, 스승님. 적응하는 데 하나도 안 어려워했어요. 지 말대로 더 좋아하기도 했다니까요. 제 혀에 한 것처럼 얘 눈에도 뭘 할 순 없을까 연구해 보긴 했는데 민감한 부위라서 시도는 안 했어요. 설린이가 일반적인 눈이랑 다른 점은 없다고 확인해 주긴 했지만 이건 스승님의 고견이 필요하겠다 싶어서요.”
눈치 빠르고 의중을 잘 읽는 사영이가 식탁 밑으로 사현이의 허벅지를 냅다 꼬집으며 덧붙였다.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까지 하다가 응징받는 사현이를 보니 초윤의 걱정은 기우인 모양이었다. 초윤은 마음에 남은 티끌을 완전히 쓸어내며 겨우 깨끗한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구석을 누르고 있던 해묵은 불안이 사라지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 뒤로는 한동안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하는 식사는 독립한 아이들이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드문 시간이었다. 하물며 드디어 모셔 온 스승이 한 자리에 있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태산만큼 쌓여 있으니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몰랐다. 빈 그릇을 모아 치운 뒤엔 각자 찻잔과 주전부리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금속 주전자에 담긴 찻물을 여러 번 다시 데우고 채우며 지나온 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넓은 세상에서 본 광경과 군상을 조잘거렸고,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토로했다. 어떨 때 참담했는지, 어떨 때 기뻤는지, 또 어떨 때 스승이 그리웠는지 부끄럼 없이 말하며 간간이 볼과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은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람 같았다. 내가 시간을 잃었다고 생각하기보단, 너희가 여정을 떠났다고 여겨야겠구나. 초윤은 점차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지치지도 않고 한참 경청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제어하는 것만 빼면 어떤 일도 힘들지 않았다.
어느새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민감한 무림인들의 귀에 거슬릴까 봐 사영이가 차음막을 펼친 지도 수 시진이 지났다. 초윤과 제자들은 술 대신 대화에 취해 나른한 탈력감을 느끼며 침묵했다.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아도 편안한 집.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어도 피곤하지 않은 가족. 누구에게든 있을 것 같지만 실상 쉬이 갖기 어려운 보배가 아닌가. 초윤은 새삼스럽게 먹먹한 마음으로 부연 찻물의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심상에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모습이 투명하게 비치진 않았다.
그때, 사영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사술을 풀고, 마교를 몰아낸 뒤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돌아가야지.”
“두망산으로요?”
초윤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희미해진 고향인가, 영원한 타지인가. 그래, 모든 일이 끝나면 내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초윤’이 느껴지지 않는 지금은 실마리조차 막막하며, 귀향이 그다지 절박하지도 않아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같은 생각을 맴돌며 정적을 지키자 천오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천오는 8년간 마땅한 거처 없이 떠돌기만 했으니, 이 아이야말로 무심서와 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정말 이 몸의 한계와 아이들의 천수 중 무엇이 먼저 동날지 쭉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초윤은 먼 미래를 가볍게 고려하며 속으로 실없이 웃었다. 그런 스승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영이 천천히 운을 뗐다.
“중원의 무림인들이 걱정되신다면…… 괜찮아요, 스승님. 하오문이 완벽히 정보를 통제하고 유지했습니다.”
“……정보?”
“예, 스승님의 체질에 관한 정보요.”
체질이라면 체액의 치유 효과에 관한 이야기인가? 잊어 두었던 큰일이 옆머리를 퍽 때렸다. 그러고 보니 사술을 고칠 영약을 찾으러 온 중원을 누비기에 앞서 필히 고려해야 할 사실이었다. 초윤은 하오문의 한복판에서 모두가 보는 와중 아이들의 경지를 끌어올리고 중상을 치료한 전적이 있었다. 초월량이 반경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 지켜보게 했고, 그 앞에서 초윤이 직접 비밀을 드러내도록 유도했다. 영약만 보면 눈이 뒤집어지는 무림인의 특성상 이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체질을 들키게 되었으니 마교에서 도망쳐 나오더라도 망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짧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 너무 많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초윤은 서둘러 충격을 수습하고 들은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오문이 이 정보를 틀어막아서 중원에 새어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아무리 유능하다지만…… 그 자리엔 하오문도뿐만이 아니라 마교도들도 많지 않았던가?
“가능하더냐?”
“그게…….”
천오와 사영이가 짧게 눈짓을 공유했다. 초윤이 무언가를 직감하자마자, 천오가 먼저 실토하듯 말했다.
“피랍되신 날에 제가 전부 멸구(滅口)했습니다. 스승님을 바로 쫓으려 했으나 광천마제의 수작에 걸린 이들이 막아섰고, 그들을 모두 죽여 가며 뚫고 나니 스승님께선 이미 사라져 계셨기에 곧장 사태 수습에 전념했습니다.”
멸구라면, 수백의 사람들을 그날 모조리 죽였다는 말인가? 어느 문파를 무너뜨렸다, 어느 조직을 잡아냈다는 말과는 다르게 살인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천오를 향한 신뢰와 애정과는 별개로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잠시 머리가 멈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오는 초윤의 미세한 눈꺼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인벽(人壁)을 무너트리는 도중 정신을 차린 몇 명이 도망쳤으나 전부 추적해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원 전역의 감시망에 스승님의 체질에 관한 말은 들리지 않았으니 이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목격한 이들 중에는 하오문도도 많았다. 그들까지 전부 죽였느냐?”
“……예, 스승님.”
“그, 문주님은 이 일에 따로 앙심을 품진 않으셨어요. 조금 충격을 받긴 하셨지만 이해해 주셨고요. 유가족도 하오문에서 책임지고 보살피는 중이에요.”
-끝내 개화하지 못한 제게 실망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래되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그래, 어쩐지 흑무상이니 뭐니 평가가 박하다고 했다. 8년간 있었던 일을 들어 보면 무너트린 문파만큼 도움을 준 사람도 많은데 측은지심을 모른다든가, 양심과 도리를 갖지 못했다든가, 사람 말을 하는 흉수라든가 폭언에 가까운 말들을 지척에서 해 댔으니.
내공을 봉인당한 천오는 평소처럼 깔끔한 무공을 펼치진 못했을 테고, 그 자리에서 월량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사람들은 자그마치 수백 명에 다다르니 동이 텄을 즈음에 지옥도가 펼쳐졌을 터였다. 쏟아진 피에 찰박거리는 바닥이나 무참히 꺾이고 뜯긴 팔다리, 부러진 목과 부릅뜬 눈, 그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홀로 서 있었을 열아홉 살 서문천오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곳곳의 격투가 소강된 뒤 희가 있을 주륜각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발견했을 것이며, 천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도망친 자들을 추살(追殺)하였으니 초윤의 소문은 막았어도 천오의 행동은 들불처럼 입을 타고 번졌을 터.
아이들이 살인을 모르길 바랐다. 초윤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초윤마저 이미 수많은 이들을 죽인 탓일까. 배경을 제공한 스스로가 개탄스러울지언정 천오의 학살이 멍에나 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상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해야 옳았으나, 초윤은 가장 먼저 속상해하고 있었다. 무공을 쓰지 못한 천오가 많은 이들을 상대하며 입었을 상처에, 주륜각 바로 앞에 쓰러져 있었던 남매가 일어나자마자 받았을 충격에 아픈 심정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이해진 자신의 도덕 윤리와 생명 존중을 꼼꼼히 곱씹어 보고 반성할 때가 아니었다. 초윤의 앞에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고맙구나.”
“아니에요, 스승님. 앞으로도 저와 현아가 하오문에 있는 이상 스승님께서 중원의 어디를 가시든 발목 잡는 이 없도록 할 테니까요.”
가슴을 짚으며 뿌듯한 얼굴을 하는 사영이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고 유능하게 보였다. 초윤은 아이들의 성장을 체감하며 힘없는 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이제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박탈감이나 열등감은 고사하고 기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조금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가다듬고 자리를 파했다. 갈수록 빨개지는 남매의 볼을 보니 장거리 강행군은 화경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초윤은 아이들에게 이만 들어가 쉬라고 말한 뒤, 양칫물을 가져온 천오에게도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이만 자러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침상에 누워 뻑뻑한 눈을 감았다. 정신과 감정에 가해진 자극이 강한 하루였던 탓에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초윤은 새벽녘 곤륜산에 도착한 해부의 날갯짓을 듣지 못했고, 다시 모인 아이들이 펼치는 차음막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영이의 손톱이 손바닥을 짓눌러 낸 피 냄새도 맡지 못했으며 옆방의 벽 너머 우두커니 바라보는 천오의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꿈도 뒤척임도 없이 깊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