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소식을 들을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미친 짓, 소규모 마교 습격과 스승님 탈환을 계획하던 사영은 대병력을 끌고 갈 수 없는 대신 현지인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한동안 중원 북서쪽의 모든 동향을 미친 듯이 끌어모았다. 사막에 있는 도시들은 마교와 어떤 연결점이 있을지 모르니 신뢰가 가지 않았고, 감숙성의 공동파는 신강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서장을 건드리면 일이 커지니 결국 답은 곤륜파밖에 없었다.
곤륜파가 자리한 청해성은 타고난 인구가 적고 척박한 초원이 넓은 데다 중원과 교류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단시간 내에 정보망을 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몇 큰 도시를 통해 소문을 주워 본 결과, 십여 년 전 곤륜파에 입문하자마자 다섯 궁 중 하나의 전권을 틀어잡은 활불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정확한 경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공과 의술에 통달했고 성품 또한 어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 사람을 회유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에 사영은 곤륜파에 전서구와 파발을 꾸준히 보내며 활불을 더욱 깊게 조사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고, 파문당한 활불의 지난 행적은 남김없이 지워진 지 오래였다. 자그마치 도시 네 개를 넘어 전해지는 소문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머리를 쥐어짜는 와중, 기척 없이 나타난 여와가 잔뜩 쌓인 종이 더미 중 한 장을 들어 올리더니 저렇게 입을 열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던 사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배신감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예? 여와 대장, 곤륜파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여태껏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다고? 내가 이 고생을 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도? 문주님이 보내서 왔죠? 문주님이 보내서야 왔어요, 지금?!
-아니, 아닙니다. 저도 이 이름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누군데요?
사영은 여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팩 낚아챘다. 그곳에는 활불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사람에 대한 어렴풋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름, 장령. 특징,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무공, 밝혀지지 않음. 수십 년 전 만신창이가 되어 느닷없이 청해성에 나타났으며, 죽어 가던 도중 활불에게 구조를 받고 살아난 뒤로 호위하듯 항상 같이 다니고 있다. 현재 활불과 함께 곤륜파의 운궁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추정.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데다가, 활불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워 신뢰도가 낮다 판단하고 던져뒀던 보고서였다. 사영은 경악스럽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여와 대장과 이 사람 사이에 연이 있다고요? 그러면…….
-예, 같은 곳에 소속되었던 살수입니다. 대원 중 가장 어려서, 다들 목숨을 걸고 이 아이 하나만큼은 도망치게 했습니다.
여와는 보고서를 들고 있는 사영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제 어깨와 목뒤를 만지작거렸다. 회상에 잠길 때마다 당시 입었던 상처의 흔적을 매만지는 습관 때문이었다.
이윽고 중얼거리는 여와의 두 눈은 오래된 회한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은 듯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랬더니 정말 멀리도 갔나 봅니다. 청해성이라…….
그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린 사영은 사람 좋게, 그러나 상대방의 속을 벅벅 긁는 웃음을 띠며 기운찬 대답을 했다.
“제가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웠는데요?”
“미쳤어. 다른 것도 아니고 명정각의 무공을 어떻게 감히 외부인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살수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기엔 여와 대장이 혼자 화병으로 고생한 시간이 길어서요. 아, 대장의 전언입니다만. ‘살아남아 주어서 고맙다, 장령. 잘했다.’라고 했습니다. 일찍 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곤륜파의 다른 분들께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적당한 때를 찾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
장령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옷소매 밑으로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긍지와 영광인 줄 알았던 명정각의 실체를 알게 된 이상 이제 여와 대장이 누구에게 어떤 무공을 알려 주든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멀쩡히 생존해 하오문의 소문주를 가르치는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했다.
아군에게 공격당해 죽어 가던 동료들을 뒤로한 채 외면하던 날부터, 걸레짝이 된 몸으로 천릿길을 달려 도망친 날부터 장령 또한 외부인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를 배신자라고 생각해야만 살 수 있었고, 후회할 자격도 없다 여겨야만 숨 쉴 수 있었다. 그대로 버리고 싶었던 목숨을 멋대로 붙여 두었단 이유로 원망하던 이를 사랑하게 된 후로는 이대로 이방의 땅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남고 싶었다. 더 이상 중원의 사정은 내 관할이 아니라고, 복수할 능력이 되지 않으니 찾아갈 계제도 되지 않는다며 수십 년을 그저 눈앞의 반려에게만 집중했다.
그래서 정말,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되어도 아무 느낌 없을 줄 알았는데……. 장령은 음울하게 물어보았다.
“……명정각의 다른 대원들은…….”
“죄송하지만 거기까지 전해 듣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와 대장이 특별히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그래.”
역시 다른 이들도 살아남길 바랐던 것은 과한 기대였을까. 장령은 깨끗이 미련을 털어 버렸다.
“그럼 여와 대장은…… 평안하신가?”
“예, 사지 멀쩡히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최근에는 화병도 많이 나아지셨고, 또 비밀이지만 혼례도 치르셨습니다.”
“……혼례? 누구랑?”
“저희 문주님이요.”
“하오문주랑 여와 대장이 혼례?”
사마귀와 두꺼비가 혼인을 했어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텐데. 장령은 자신의 기억 속 여와와 수십 년 전 중원에서 활동했을 당시의 하오문주를 떠올리며 기겁을 했다. 그때는 희가 하오문을 손에 넣기 전이었기에, 장령이 아는 하오문주는 살쾡이 같은 인상의 노인밖에 없었다.
쉬이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장령을 적당히 기다려 준 사영은 그가 등지고 있는 운궁의 위층 외벽을 힐긋 올려다본 뒤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희미하게나마 본심이 드러난 입가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영은 며칠 전부터 이 순간을 벼르고 있었다.
“구배지례를 올리진 않았으나, 제게 유용한 무공을 가르쳐 주신 여와 대장은 반쯤 스승이나 다름없고……. 무공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저는 하오문의 소문주니 문주의 자식이나 마찬가지며, 여와 대장은 하오문주와 혼례를 올렸으니 족보만 보자면 제 의부라고 할 수도 있죠.”
여와가 들으면 창백해질 소리였다. 사영도 딱히 그들을 어버이로 생각하진 않았으나, 잠시라도 장령에게 먹혀들면 그만이었다. 장령이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더듬더듬 말했다.
“뭐, 뭐?”
“그리고 장 대협은 여와 대장의 하나 남은 사제고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영이 입꼬리를 히죽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정식으로 포권을 취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시선만은 내리깔지 않은 채 그대로 치켜뜨자 자세만 예의 바르고 눈은 불경해졌다.
“하오문의 대표자로서 곤륜파 운궁주님의 부군을 사숙으로 모시게 되어 아주, 굉장히, 매우 기쁩니다. 이제 제 반년에 걸친 편지 열두 통이 중간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요. 앞으로도 사형제지간의 연으로 맺어진 두 문파의 끈끈한 우애를 위해 힘써 노력할 테니, 사숙께서도 이 사질을 부디 어여쁘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네 사숙이야!”
낯을 가리다 못해 폐쇄적인 성정의 장령이 버럭 역정을 냈다. 옛 상관의 어처구니 없는 결혼 소식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한데, 불편하기 그지없는 애가 갑자기 내 사질이라니? 아내 말고는 어떠한 인간관계도 익숙하지 않은 장령으로선 거북한 날벼락이었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사영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싫어하는 아이를 한껏 골리는 악동처럼 짓궂게 보이기도 했고, 어딘가 비열하게 우쭐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챈 장령이 잠시 발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열두 통? 반년이라고?”
“허억…….”
“장랑, 여보. 나한테는 분명 여섯 통에 석 달이라고 하지 않았나?”
머리 위에서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령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깼는지, 멀쩡하다 못해 간단한 단장까지 마친 나라연천금강이 저 위층 창문에서 턱을 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기 좋게 동쪽 끝에서 삐죽 튀어나온 해가 환한 빛을 뿌리며 나라연의 얼굴로 쏟아졌다. 덕분에 장령은 그냥 봐도 등줄기가 서늘해질 아내의 냉랭한 표정을 더욱 선명히 목격해야 했다. 나라연천금강이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이 싫어 사건을 은폐하다가, 들켜 버리자 축소하려고 했던 일이 모조리 들통나 버렸다.
“아니…… 아니, 연천. 그게 아니라.”
“문안 올립니다, 운궁주님! 그동안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올라가서 대담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사영이 쾌활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장령의 황망한 말을 뚝 끊었다. 나라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장령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사영을 잠시 응시한 뒤 고개를 돌려 창문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올라오시오, 소문주. 당분간 곁이 비어 있을 듯한데, 소문주라면 내 적적함을 잘 달래 줄 수 있으리라 믿소. 남편의 독단을 사과해야 하기도 하고.”
……요컨대 장령의 얼굴은 며칠간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였다. 장령은 나라연이 사라진 창문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흉터를 가리는 일도 잊고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사영은 그의 옆을 지나가며 산뜻한 표정으로 즐거운 대담이었다는 인사를 남겼다. 한겨울의 눈밭에서 얇은 침의 한 장 차림으로 당장 침실도 못 들어가게 생긴 장령은 행여나 아내가 들을까 봐 아무런 성도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 구렁이를 삼킨 듯 구는 사람은 질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