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사영은 나무로 짠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가며 가슴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품에 넣어 온 종이가 옷자락 너머에서 바스락거렸다. 들어오면서 장령에게 보여 주었던 짓궂은 표정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입술 끝이 딱딱히 굳고 눈은 매섭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승의 방이 자리한 층을 지나치며 한적한 복도 끝을 힐긋 본 사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 제 양 뺨을 톡톡 두드렸다. 실없이 몇 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휘어 뜨며 근육을 풀자 본래의 여유롭고 당찬 얼굴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라연천금강은 운궁의 최상층에서 기거했다. 여러 기능으로 나뉜 다른 층과는 다르게, 한 층이 전부 오로지 궁주를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라연천금강은 자신과 남편이 함께 옷 놓고 몸 눕힐 곳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사양하며 커다란 침실 하나만을 제 것처럼 썼고, 나머지 잉여 공간은 운궁에 의탁한 노인과 아녀자들의 방이 되었다.
맨 위층에 발을 들이자 이른 아침인데도 막 일어난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막 씻어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아이들은 노인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경전을 듣고 있었고, 나라연천금강에게서 의학을 배운 여인들은 무인이 캐 온 약초로 환약을 빚었다. 찰칵찰칵 길쌈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으며 신중하게 필사를 하거나 목재 장신구를 깎는 사람들도 보였다. 말린 투구꽃을 다듬는 이를 보아 제지 작업도 하는 듯했고, 수를 놓거나 가죽을 꿰는 장인도 함께 있었다.
이들이 만든 물건들은 유목민들의 장터에서 비싼 값에 유통되었다. 운궁의 무인들은 넉 달에 한 번씩 산 밑으로 내려가 생산품을 직접 팔고, 그 값으로 생필품을 사서 돌아갔다. 사영이 곤륜파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전서응을 꾸준히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중원의 도가 문파에선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무공을 배운 이보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문파에서 살아온 사영에겐 도리어 익숙한 모습이었다. 사영은 바빠 보이는 궁인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며 큰 숨을 들이마셨다. 약 빚는 냄새를 오랜만에 맡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들어간 약초가 다르니 무심서와 아주 같진 않았지만, 어젯밤부터 술렁이는 가슴을 한결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되긴 했다.
사영은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빨간 칠이 된 문을 두 번 두드리고 이름을 말하자 곧장 허락이 떨어졌다. 문은 기름칠도 하지 않은 듯 경첩에서 끼익 소리가 났고, 드리운 주렴은 보석도 옥도 아닌 나무 구슬이었다. 파문을 당했다 해도 여전히 소박한 분이시구나. 홀로 생각하며 들어간 사영은 좌식 책상에 앉아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읽는 나라연을 마주하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당도하자마자 뵈었어야 하는데, 문안이 늦어 죄송합니다. 과분하게도 하오문의 소문주를 맡은 임사영이라고 합니다, 궁주님. 편히 불러 주십시오.”
“8년 만에 스승을 만났으면 일주일을 밤낮없이 얼싸안고 울었어도 이해하지. 미안하게 여길 필요 없소. 앞에 앉으시오.”
나라연이 책상 앞에 깔아 둔 얇은 방석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마디가 굵고 관절은 흉터로 덮인 권사(拳士)의 손에 속속들이 끼워진 가락지와 팔찌를 보며, 사영은 권유받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말했다.
“간밤에 떠들썩한 소리로 폐를 끼친 것은 아닐지 송구스럽습니다.”
“몇 시간 내내 차음막을 펼쳐 두었으면서, 무어. 평안하기만 했고, 설령 들렸다 하더라도 사제지간에 충분히 회포를 풀었다면 됐소.”
“……궁주님은 일면식도 없던 하오문의 구원 요청을 받아 친히 신강까지 걸음해 주시고, 부군 되시는 분과 문도를 보내어 고립될 뻔한 저희 남매를 구출해 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와병하신 스승님을 살펴 주셨습니다. 저희 사형제는 궁주님 덕분에 숙원을 풀 수 있었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사영은 진심을 담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계획이 얼마나 어그러졌을까. 어찌저찌 모시고 나오는 것까진 성공했어도 발끝부터 얼어붙는 스승님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좌절했을 게 뻔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구나.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한동안 가만히 묵례하고 있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라연이 말했다.
“……소문주, 손을 이리 주시오.”
“예?”
“무기 잡는 손을 홀대해서야 쓰나. 약선 대협이 건장하게 키워 준 육신만 믿고 쉽게 생채기를 내면 안 되지.”
가볍게 타이르는 말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사영의 양 손바닥에는 선명한 손톱자국이 딱지를 붙이고 남아 있었다. 나라연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사영의 손을 잡아 상처를 보더니, 혀를 쯧 차며 옆에 두었던 목각함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고약과 면포가 사영의 손에 첩첩이 발랐다.
사영은 처치를 받으며 마주 앉은 나라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한 인상의 얼굴에서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뺨은 한창때를 누리는 청년처럼 붉었으나 차분한 눈이 한없이 깊었고, 머리카락은 센 곳 없이 새까맸으나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있었다.
사영은 화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세 사형제 중 무공의 수위는 가장 뒤떨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문의 비범한 기준이었다. 남들은 한 번 보기도 힘든 영약을 밥처럼 먹고 자란 것도 모자라 스승의 피로 벌모세수를 했으니 웬만한 노고수와 대마두 말고는 사영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활불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떠한 기세도 없었고, 무슨 무공을 배웠는지도 감지하기 어려웠다. 손은 분명 격투가의 형상인데 자세에는 격의가 없었으며 내공 또한 일반인의 수준이었다. ‘이렇게 평범할 리 없는데’라는 생각과 실제로 느껴지는 미미한 존재감 사이, 오히려 아무런 이질감도 없어서 도리어 의아해지는 감각을 사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현경이구나. 아, 진실로 나는 운이 좋았다. 사영은 믿는 신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원시천존이든 천지신명이든 누구든 붙잡고 감사하다 빌고 싶었다.
짧은 틈을 타 다시 설움이 치솟으려 하는 사이 처치를 마친 나라연이 입을 열었다.
“……너무 고마워하지 마시오, 소문주.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신강까지 가는 길에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궁주님.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은덕을 받아 어찌 보답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신을 보내는 도중 분실할 가능성이 있어, 돌아올 날은 적었어도 떠나는 날은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목적한 분이 누구신지조차 제대로 적지 않은 요청에 응해 주신 궁주님께선 이미 충분한 아량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니오, 내가 한 실수가 많아.”
다시 혀를 찬 나라연은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며 알았겠지만…… 내 남편은 중원에 그리 좋은 감정이 없소. 소문주가 보낸 서신을 보곤 내가 행여나 중원의 환란에 엮여 큰일이라도 당할까 봐 덜컥 겁부터 집어먹고 숨겼겠지. 그로 인해 곤륜파와 하오문의 사이에 무슨 감정이 생기든, 중원이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떻게 무너지든 나만 무사하면 됐다고 할 인간이야. 장담컨대 전쟁이 벌어지면 내 남편은 호시탐탐 날 낚아채 다른 땅끝으로 도망칠 기회만 노릴 거요.”
“아…….”
-여와는 정말 눈치도 없고 둔해 빠진 바보에 멍텅구리 숙맥이에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담.
사영은 문득 자신이 아는 또 다른 기혼자가 일하다 말고 책상을 두드리며 쏟아내던 불만을 떠올렸다. 물론 그 둘은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다시 제 앞에서 눈 뜨고 보지 못할 애정 행각을 하고 있긴 했으나, 아무튼 매몰찬 말로 투덜거리는 모양이 어쩐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애정이 식지 않은 부부들은 듣는 이가 반려의 흉을 거들면 도리어 기분 나빠하곤 했다. 사영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곤 친절하게 웃으며 그렇군요, 한 마디로 답했다.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인간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선 매일같이 산보를 다녀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었소. 약선 대협의 편의를 봐 드린 것은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성의니, 부담 갖지 말고 쉬다 가시오.”
“도움만 받은 도리로 사양해야 마땅하나, 상황이 여의찮으니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오문과 제 사형제들은 궁주님께서 베푸신 은정을 영영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몇 번이고 공손히 감사를 표하는 사영을 지그시 지켜보던 나라연은 팔짱을 풀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깍지를 낀 뒤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사영의 기골을, 내공과 눈빛을, 그리고 자세를 공들여 보는 시선이 그다지 부담스럽거나 불편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아마도 저의가 불순하지 않아 그렇겠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사영은 현경의 고수 앞에서 기꺼이 경계를 내렸다.
잠시 말을 고르던 나라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위현으로 가던 도중 소문주의 사제를 만났을 때, 내가 망발을 한 적이 있소.”
“예?”
“내 땅이 위협당하리란 불안에 눈이 멀었든, 그대들이 예상보다 큰일을 저질러 경악을 했든 망언은 망언이지. 대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자를 감히 데리고 나와 마교를 자극했다고 윽박질렀소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희생된 자의 가족이 피 웅덩이 위의 평화를 진심으로 반길 리도 없고, 제물로 연장한 평화가 그리 두터울 리도 없는데.”
“…….”
“약선 대협에게도, 그 말을 듣고도 내게 화를 내긴커녕 인륜을 저버릴 수 없다 말한 서문 소협에게도, 그리고 소문주의 둘째 사제에게도 각기 찾아가 사과할 생각이오. 소문주는 마침 내게 먼저 찾아와 주었군.”
대전의 계기. 사영은 조용히 곱씹으며 손바닥에 감긴 면포를 만지작거렸다. 이제껏 몰랐을 리 없었고, 이제 와 무서울 리도 없었다. 하오문주 희부터가 사영의 계획을 들었을 때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에는 광명교와 마교가 무슨 관계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광천마제 초월량이 마교도들을 끌고 백주대낮의 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아 아주 긴밀한 유착관계임은 확실했다. 무공도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사술만으로 전율할 일을 벌인 초월량은 그 뒤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을 데리고 나오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분란이 생길 게 뻔했다. 중원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약선 초윤의 실종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굴었다. 사회적인 위치상 타 문파의 수뇌들을 자주 만난 사영은 그들의 언행에서 ‘속세에 잘 나오지도 않는 약선 한 명의 희생으로 광천마제가 영영 보이지 않는다면 남는 장사지’ 같은 속내를 볼 때마다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삼켰다. 위로한답시고 어깨를 두들기는 행동이나, 그 한 몸으로 환란을 막아 주신 약선께 감사하다는 둥의 말이 모두 역겹기 그지없었다.
……물론 화가 난 티를 내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천오가 칼부터 뽑은 적이 많아 속병에 걸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어느 자리에서도 가리지 않고 불온한 언동이 들리면 칼부림을 하고 보았던 사제가 나라연천금강의 말을 듣고도 얌전했다니, 정신을 잃으신 스승님 앞에서도 기어코 아양을 떨었구나 싶었다. 더불어 이런 식으로 사과를 받은 것도 처음이라 조금 멋쩍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