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생소한 기분을 가만히 곱씹던 사영은 곧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존중에 불과하던 예의범절에 경의가 섞이기 시작했다.
“사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정중히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많소. 내 잘못에 미안하다 말했을 뿐인데.”
나라연천금강의 어조는 얼핏 퉁명스러웠으나, 함의는 다감하기 그지없었다. 사영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붕대 감긴 양손을 허벅지 위에 모아 잡고 느릿느릿 매만졌다. 아무 재촉도 없는 침묵이 지나가고, 아이들이 와다다 뛰어다니는 소리가 방 앞을 세 번쯤 지나쳤을 무렵에야 말문이 트였다. 목구멍이 바싹 마른 것처럼 까슬까슬한 목소리였다.
“……못 뵌 사이…… 스승님께서 많이 변하셨습니다.”
“……변했다?”
“예. 아, 정신을 주무르는 삿된 술법에 당하신 건 아닙니다. 스승님의 본질은, 그러니까…… 저희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성정은 분명 그대로셨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약선 대협은 이곳에서 깨어나자마자 제자들의 행방부터 물었소. 그대들의 무모한 행적에 하얗게 질려선 부들부들 떨더만.”
나라연천금강은 정신을 차린 약선을 마주했던 순간을 돌이켜 떠올렸다. 서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경의 고수, 광천마제를 한 번 봉인했던 실력자. 긴 거리를 거쳐 흘러들어 오는 소문은 곁가지를 떼어 낸 채 강렬한 한 줄기만 남는 법이었다. 하지만 앙상해진 정보 속에서도 약선 초윤을 수식하는 언어들은 하나같이 범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렬했으니, 개인적인 호기심이 없었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직접 목도한 약선은 확실히 경이로웠다.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나라연천금강은 그의 신비로운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기지도, 빛이 번지는 눈동자에 경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의 동공 너머로 비치는 혼백을 알음알음 염탐하며 탄식했다. 약선 초윤은 너무나도 파악하기 쉬웠고, 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연약하게 흔들리다가도 심지를 꼿꼿이 세우는 사람이었으며 슬픔은 삼켜도 기쁨은 티 내는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이었다. 이백 년을 살아온 작자가 누구보다도 인간답다는 점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인간성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살아왔다는 점이 나라연천금강을 제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표정이나 딱딱한 말은 상관없었다. 약선 초윤은 두 눈과 목소리로, 손끝으로, 온몸으로 자신이 사람임을 외치고 있었다.
나라연은 그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 몸에서 묻어 나오는 세월은 무겁기 그지없는데 눈동자는 젊고 맑아 한창때의 청년 같았고, 모든 내공을 금제당해 대부분의 힘을 잃었는데도 그자를 이기는 심상이 떠오르질 않았으며…….
어쨌든 약선 초윤이 자기 제자들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짧은 상념 끝에 공연히 어깨를 으쓱이는데, 어째 사영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나라연은 설핏 불안감을 느끼고 어린 호걸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에 집중했다.
“……스승님께선 본디 그리 유한 모습을 보이는 성정이 아니십니다. 물론 저와 제 사형제들은 그분이 지극히 온화하신 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스승님은 늘 견고한 벽에 싸여 계셨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웃지 않으셨고, 한 번도 울지 않으셨어요.”
“……그렇소?”
“예. 정체 모를 자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그리고 저와 제 동생이 하산할 때는 잠시나마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셨지만…….”
하오문에서 마두(魔頭) 태운을 도륙 내실 적에는 그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사현의 눈을 보고 반쯤 미쳤던 사영은 심마에 들기 직전의 상태로 난도질당한 태운을 붙잡아 도망쳤다. 스승님의 눈도 바라보지 못했고 뒤도 돌아보지 못했으며 어떠한 말도 남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예시로 당시의 일을 들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잊을 만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심장을 옥죄는 후회의 기억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모셔 왔으니 언제든 사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말아 넣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사영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돌아오신 스승님께선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지으셨고, 또 슬픔을 숨기지 못하셨습니다. 간밤에 오랜 대화를 나누며 더욱 확실히 느꼈습니다. 스승님께선 변하셨습니다.”
“…….”
“그리고 저는 사람을 돌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상실만이 인간을 단번에 변화시켰다.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잃고 어린 동생과 길거리에 나앉은 자신처럼, 스승님을 잃고 광인이 되어 하루하루 미쳐 가던 서문천오처럼 중요한 것을 잃은 이만이 이제껏 고수하던 태도를 하루아침에 갖다 버릴 수 있었다.
8년 만에 만나 뵙게 된 스승님은 이전보다 조금 더 작아 보였고, 든든하기만 하던 등과 어깨도 수척하여 병색이 짙었다.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기운 없이 내리까는 시선에서 사영은 상실을 느꼈다. 스승님께선 물질이든 추상이든 매우 크고, 중요하고, 지금까지 당신을 지켜 주던 무언가를 잃으신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 스승님의 단단한 겉면에 정을 대고 망치를 두드려 기어코 깨트렸다.
이를 악문 사영의 턱에 신경질적인 교근이 곤두섰다. 사영은 깍지 낀 손을 세게 맞잡았다. 팔과 손등에, 목과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바닥을 응시하는 두 눈에 흉흉한 증오심이 반질거렸다. 지난밤은 사형제 셋이 모여 이 사무치는 원념을 만찬처럼 씹어 삼켰지…….
그러나 곧 짧은 한숨을 내쉰 사영은 감정을 추슬렀다. 곤륜파의 운궁주 앞에서는 이 정도만 내보여도 충분했다. 고개를 들자 나라연천금강의 현명한 다갈색 눈이 이쪽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영은 조금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궁주님, 광천마제 초월량이 하오문을 습격한 목적은 오로지 저희 스승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스승님을 다시 모셔 왔으니, 그 흉수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초월량은 마교의 십만교도를 전부 손에 넣고 다스릴 지위와 무력이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오래지 않아 마교의 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원의 무림은 오랜 내전과 첩자의 농락으로 쇠약해졌고, 아직도 강시를 박멸하지 못했습니다.”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이겠소이다, 소문주.”
“……언제고 벌어질 전쟁이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진 않겠습니다. 저희 사형제는 언젠가 터지리란 가정에 불과했던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앞당겼고, 중원은 아직 이른 때에 한층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알량한 일신의 무공만을 믿고 택도 없는 일을 추진해 많은 사람을 고난에 빠트렸다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
“이른 환란을 불러일으킨 대가라고 하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으나, 저희 사형제는 중원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소속된 단체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저 중원 무림에 닥칠 겁재를 막는 데에 이 몸을 투신하려 합니다.”
나라연천금강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영을 바라보았다. 이립을 막 넘은 소문주는 젊은 나이에 걸맞는 기개를 갖추고 호기롭게 선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치기라고 하기엔 깊게 뿌리를 내리고 기둥을 꼿꼿이 세운 채 넓게 가지를 뻗어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같은 형상이…….
과연 약선 초윤의 첫째 제자일 만하다. 자식도 없고, 직전제자도 없는 나라연은 약선 초윤이 조금 부러워졌다.
사영은 품에서 조심히 죽통을 꺼내 들었다. 붉은 모란 매듭이 달린 뚜껑을 열고 안에 들어있던 두루마리를 손바닥 위에 쏟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 셋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설령 기적적으로 저희가 마교의 침입을 막아 내더라도, 지금처럼 조각조각 분열되고 취약해진 중원은 작은 위기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백협맹이 썩은 속살을 낱낱이 드러내고 와해됐는데 오죽할까. 대형 문파를 향한, 아니, 정파를 향한 믿음 자체가 흔들렸소. 이젠 누구도 협의와 도리를 내세우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외다. 저놈들은 뒤로 무슨 이득을 보고 있을까 의심부터 하겠지. 남궁영이 셋째 부인을 들일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는데.”
“궁주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그것이 현 중원의 상황입니다.”
사영이 손바닥만 한 두루마리를 나라연의 책상 위에 공손히 내밀었다. 나라연은 가락지와 팔찌를 둘둘 감은 손으로 이를 받아 부드럽게 펼쳤다.
그리고 내용을 보자마자 멈칫 굳었다.
사영은 글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라연에게 포권을 취하며 깊게 머리를 숙였다.
“이에, 저희 하오문을 비롯한 사천당가, 모용세가, 하북팽가, 아미파, 제갈세가, 화산파, 소림사, 무당파와 휘하 256개의 중소 문파가 규합하여 새로운 맹을 창단하려 합니다. 이 맹이 내세우는 기치는 오로지 하나뿐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은 인의로 아울러 상생하라.’”
“…….”
“정파와 사파의 구분 없이, 무공의 고하에 관련 없이, 또 전통과 권력과 상관없이 오로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모이려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맹우를 팔아넘기는 일은 용서되지 않고, 또 맹우를 홀로 위기에 처하게 두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입니다.”
“……지독하게 이상적이군.”
“어려울수록 하늘을 보라 배웠습니다.”
사영이 조금 웃으며 답했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이 없는 맹이라니, 사파인 하오문에 소속된 사영도 처음 들었을 적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의심했다. 하지만 작금에 와선 뼈저리게 느꼈다. 기반이 되는 체제가 흔들리며 무너질 것 같다면, 새로운 규칙과 기준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맹은 소속 문파가 추구하는 길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민간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맹우를 배신하지 않으며, 재앙 앞에 단결할 수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일 것입니다. 숲을 이루는 나무가 다양한 것처럼, 가지각색의 무예를 익히고 각자 다른 가치관을 지닌 자들도 하나 되어 느슨하고도 무성히 얽힐 수 있음을 증명하겠습니다.”
“…….”
“‘무림맹(武林盟)’의 창단에 함께해주십시오. 곤륜파가 다시는 홀로 무너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사영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고 답을 기다렸다. 나라연천금강은 희와 당염초, 모용정, 팽치정과 반야장 등 뜻을 모은 문파의 수장들이 친필로 남긴 문장을 몇 번이고 읽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뜻은 좋았다. 뜻은 좋았지만 오래 살며 많은 파국을 보아 온 탓일까.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목표를 듣고 나니 신뢰감이 생기지 않았다. 백협맹의 일원이었어도 거리가 먼 탓에 제대로 된 취급도 받지 못했고, 이렇다 할 교류도 없었다 보니 구태여 이 일에 함께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협의와 도리를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구나. 나라연은 조금 쓰게 웃으며 하나하나 따져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창 바깥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사영과 나라연은 조금 놀란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운궁의 담벼락 안, 매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제자들이 훈련하는 야외 연무장에 검은 머리통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운궁의 무인들이 입는 복장과 모양은 같고 색은 다른 옷을 입은 이들도 많은 것을 보아 다른 궁에서 이곳을 찾아온 듯했다.
그들은 둥근 원을 그리고 서서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만년설이 쌓인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웃통을 벗어젖히고 더운 김을 풍기는 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다들 얼굴이 빨개져선 흥분해있었고, 타궁의 사람들은 들뜨다 못해 아예 화가 난 듯했다.
사영은 의아한 얼굴로 목을 쭉 빼서 나라연의 어깨너머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우뚝 굳어 입을 쩍 벌렸다.
격양된 인파가 비워 둔 둥근 공간 가운데, 짧은 다갈색 머리에 기골이 장대한 자신의 남동생 임사현이 애병(愛兵)을 빼 들고 등을 보이며 우뚝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