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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45화 (245/257)

245화.

천오가 척척 걸어 들어와선 방 한쪽의 6인용 탁자에 쟁반을 내렸다. 그런 뒤 가장 상석에는 초윤의 그릇을 살포시 놓아두고, 이 자리에 없는 사영의 좌석을 일부러 띄운 뒤 제일 멀리 떨어진 말석에 사현의 죽을 덜그럭 놓았다. 불편한 심기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행동에, 초윤은 심각한 상황인데도 잠시 하순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래, 스물일곱 살이면 아직 어리지. 아주 드물게 천오의 막내다운 모습을 보게 된 듯했다.

이 감상은 사현이 또한 다르지 않았는지, 사현이는 킥킥 웃는 표정 그대로 자신의 그릇을 밀어 스승과 가까운 자리에 놓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천오와 마주 앉게 되어서도 눈은 피할지언정 실실거리긴 매한가지인 것으로 보아선 천오가 사형제를 위협하지 않았다는 말만큼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초윤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느릿느릿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챙겨 주는 수저를 들고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맑은 갈색의 육종용 죽과 당귀 양고기탕을 한 입씩 먹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함께 식사를 시작한 천오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저지른 일을 들키기 전에 실망하지 않았다는 확답부터 냉큼 들어 놓으려 했던 것이냐?”

“……아닙니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쓰듯 대답한 천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초윤의 앞이 아니었다면 사현을 노려보거나 탁자 밑으로 걷어차고도 남았을 분위기였다.

천오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반응을 보여 주자, 아픈 골치는 둘째치고 슬슬 상황이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현이는 아예 웃음을 참지 못해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미 저지른 걸 어떡하겠어. 다른 일도 아니고 날 찾으려고 노력했다는데. 초윤은 천오의 행동이 불러왔을 호영향을 애써 헤아리며 합리화했다. 그래도 정파의 사람들을 죽이면 곤란해질 것은 알았는지 웬만하면 때리기만 했다는데, 그 정도면 천오도 많이 노력한 게 아닐까. 이젠 내가 있으니 이전처럼 난폭한 짓은 안 하지 않을까. 천오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은 잘 듣는 애잖아……. 그리고 천오 덕분에 혼란이 빨리 가라앉기도 했을 거 아냐. 문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중대한 위기에서 그냥 문파의 자존심과 체면과 어처구니만 잃고 끝난 거니까……. 더불어 천오의 명성과 인망까지도…….

맞아, 생각해 보면 천오도 난데없는 일을 당해 정신 없는 상황에 무림은 휘청거리지, 강시는 기어 나오지, 온갖 문파에 배신자가 끼어 있고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 과격한 수를 쓸 수밖에 없을 법도 했다. 〈귀환영웅〉의 주인공 모용서도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변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기행을 저지르지 않았었나. 초윤은 홀로 납득하고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작게 신음했다.

스승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중원 곳곳을 홀로 누비며 무림의 썩어 빠진 부분을 가차 없이 도려낸 서문천오.

곧 닥쳐올 위기에서 무림을 구하기 위해 중원의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동료들과 함께 힘을 쌓고 각지의 문제를 해결한 모용서.

이유와 방식은 달랐지만 행적과 결과가 비슷했다. 천오의 지난 8년이 주인공의 자취를 덧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까닭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염라군 주천오(周天吳)는 명림서하의 가슴우리를 뜯고 심장을 터트려 신물을 빼앗았다.

〈귀환영웅〉의 세계가 모용서를 중심으로 돌아간 이유는 모용서가 신물을 사용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세상을 다시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천오가 그 까마귀 신물을 빼앗아 사용했으니, 이제 이곳은 주천오의 소원을 위해 세워진 새로운 세계였다. 더 이상 소설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한 사람의 바람만을 위해 세상이 조형되었다면 그이를 주인공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깽판을 치는 것은 무협지 주인공의 미덕이었다. 초윤은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을 떠먹으며 시선을 들었다. 묵묵히 식사를 함께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천오와 동생의 보복이 뒤늦게 두려워졌는지 가끔 헛손질하는 사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사현이를 살려 줘야겠다. 웃음을 삼킨 초윤이 입을 열었다.

“천오야, 사람이 사람으로 있기 위해선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

“인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내 것이 아닌 고통에도 공감하며 가엾게 여기는 마음, 힘들어하는 이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을 필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래, 너희는 특히 평생 무기를 들고 살아야 하니 더욱 유념해야 한다. 무기는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도구지만, 그럴수록 사람의 도리가 무뎌지면 안 돼. 남과 나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면 손속이 과해지고, 손속이 과해지면 주변이 무너지며, 주변이 무너지면 곧 나 또한 붕괴하기 마련이다. 홀로 강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아이들은 수저를 멈추고 초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먹으면서 들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생각해 보니 밥상머리에서 교육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만큼 귀찮은 상대가 없구나. 얼른 마무리 지어야겠다. 초윤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를 절대 다치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목적을 위해서 정당화하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그저 치열하게 고민하거라. 상대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생각하고, 그의 인생과 판단을 폄하하지도 동정하지도 말거라.”

“……어떤 것도 결론짓지 않는다면 고민하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남에게 너희 인생을 채점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너희에게도 남의 생애를 평가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게 된다면 최소한 상대를 알아 두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야지. 왜냐하면, 하나. 기억되지 않을 개죽음을 당할 까닭은 누구에게도 없고. 둘, 죽음의 무게를 어떻게 다루는지야말로 사람과 짐승을 가르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아직 온전히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저 계속 사고하는 데에 의의를 둘 뿐이다.”

잊을 만하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참상을 자아낸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부상과 죽음이 만연한 이 세계관에서 지니고 있기엔 미련스러울 정도로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사고방식이었지만.

목숨을 하찮게 여겨서 좋을 일은 없었다. 남의 삶을 해하면 자신의 자아 또한 닳아 해지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퇴색될 죽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이 세상의 기본적인 설정이 글러 먹어도, 천오가 주인공의 역할을 맡게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오문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내가 죽인 사람들을 최대한 알아봐야겠다. 그러면 지금보단 떳떳한 마음으로 천오와 얘기할 수 있겠지.

초윤은 차분하게 잔을 들어 따듯한 차로 입가심을 했다. 힐긋 보니 천오는 알 듯 말 듯 한 무표정이었고, 사현이는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그러고 보니 천오가 ‘주인공’이라는 전제하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천오야, 하나 묻겠다.”

“예, 스승님. 하문하십시오.”

“너의 적은 누구냐?”

느닷없는 질문을 받은 천오가 초윤을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승님을 해하려는 자들입니다.”

“……마교나 광명교가 아니라?”

“제가 마교와 광명교를 증오하고 적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스승님을 해하고 제게서 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원 무림이 스승님께 삿된 짓을 저질렀다면 그들 또한 적으로 규정했을 것이며, 이는 소속이나 세력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조건입니다.”

그…… 아무튼 정사파보단 마교가 적이라는 거지? 사파에는 사형제가 있고, 정파는 마교와 적대하니 아군이나 마찬가지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하오문이 난데없이 무림맹에 가입한 것도 이해가 갔다. 무협지는 대체로 정파, 사파, 마교 등으로 갈려 있고 세계관 속 대중적인 인식은 마교를 절대악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의 배경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졌다. 주인공이 각종 세가나 도가 문파 같은 정파 소속이라면 사파와 마교가 악역이었고, 하오문이나 녹림 등 사파 출신이라면 정파와 마교가 악역이었으며, 마교도 신분이라면 반대로 중원 무림이 주된 악역이었다.

하지만 천오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낭인의 신분이며, 스스로도 세력보단 행동이 적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하오문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이 아예 소용없어졌구나. 천오가 그 둘을 딱히 분간하지 않으니까…….’

현실적인 이유야 어찌 됐든, 작품을 보는 시선으로 해석하자면 원인은 천오와…… 천오의 기준이 되는 자신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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