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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50화 (250/257)

250화.

영약을 찾아 여행하는 동안 천오에게 경호를 맡겨야만 한다는 사실도 미안해 죽겠는데 괜한 일을 더 시킬 순 없지. 초윤은 생각에 잠긴 설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이 냉증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던 중에 사영이 제시한 방안이 바로 대초원의 북해빙궁이다. 냉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이들이라면 해결할 방도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가 보겠다며 나섰다.”

“대협께서 소문주님을 만류하셨사옵니까?”

“그 먼 길을 홀로 떠나게 하여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어찌 알고. 기운을 차리면 천오와 함께 극양의 영약이나 찾아다닐 생각이다.”

그편이 나한테, ‘초윤’의 몸에 훨씬 익숙하기도 할 테고. 초윤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앉은 설린은 허벅지에 올린 손을 모아 잡고 연신 꼼실거리며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훌쩍 떠났던 사영이 또 말없이 먼 길을 가려고 했다니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것도 아니고 스승 되시는 약선 대협의 존체를 위한 일이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지 작은 머리통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8년이면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어엿한 중학생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구나. 사영이와 사현이도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었는지에 대해선 별말 없었지만, 각자 나름의 인간관계를 쌓고 친구나 동료를 만들었겠지? 연인은 있었을까? 설린이는 사영이를 동경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걸까? 사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현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또 없을까?

……천오는 그동안 나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저, 약선 대협.”

갑작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초윤이 화들짝 놀라며 상념을 깨트렸다. 내렸던 시선을 들어 보니 설린이 손끝으로 입을 가린 채 조금 당황스럽게 굳어 있었다. 내가 ‘초윤’의 캐릭터성을 너무 못 지켰나? 지레 찔린 초윤이 황급히 표정을 굳히고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다행스럽게도 설린은 약선의 무른 모습보단 스스로에게 놀란 듯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소녀가 반쯤 실성한 채로 초원을 건너온 탓에 뒤늦게야 떠올랐사옵니다. 그, 여정에 오르기 전에 무림맹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들었사온데. 정확히는 제가 하오문 휘하에서 몇 년간 근속했던 경력이 있어, 함께 일한 동료들과 함께 무림맹의 총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서론이 길다.”

“비, 빙궁이라 하셔서 기억이 났사옵니다! 제가 막 떠나기 전에 북해빙궁에서 무림맹의 창단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낸다는 서신을 받았사옵니다. 그러니 구태여 대초원을 종단하지 않으셔도 잠시 맹에 와 주신다면 빙공의 보유자들을 대면하실 수 있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설린은 속으로 사영의 행보에만 정신이 팔려 중요한 정보를 곧장 기억해 내지 못한 스스로를 마구 꼬집으며 또박또박 조리 있게 말했다. 반면 초윤은 자신을 두고 와당탕 구르며 멀찌감치 떠나간 무림의 정세를 놓쳐 버린 채 황당하게 물었다.

“……빙궁이 무림맹으로 사절을 보내? ……그래, 이번의 무림맹은 정사에 구분을 두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올 법도 하겠구나. 하지만 대초원 너머의 빙결 호수에 사시사철 틀어박혀 있는 이들이 중원까지 나오겠다고 앞서 일렀다니, 예상치 못했다.”

“확실히 빙궁은 폐쇄적인 성향이 짙사옵니다. 백협맹이 창단했을 때도 서신은커녕 아무 연락도 없었고, 가끔 강호로 나오는 빙공 고수나 방랑 낭인의 증언이 아니라면 빙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정보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정말이옵니다. 그리고 이는 소녀의 추측에 불과하온데, 대협. 그들이 하필이면 ‘지금’ 무림맹을 찾아오는 이유가 있을 듯하옵니다. 박주시를 기억하시옵니까?”

박주시? 남궁세가가 자리 잡고 있던 안휘성의 북쪽에 있는 의학 도시 아닌가. 커다란 약재 시장과 의료 기술, 그리고 고도로 훈련받은 의료진이 있었지만 부패한 세력이 도시를 꽉 틀어쥐고 있는 탓에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적정한 값의 몇 배가 되는 돈이 없으면 약을 구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며,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남궁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엎드려 빌어야 하는 곳. 초윤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네가 절맥증을 고치기 위해 들렸던 곳 아니더냐. 남궁세가가 풍비박산이 났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지, 그 뒤로 안휘성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 현재 살아남은 남궁세가의 잔당들은 중원의 곳곳에 숨어 있사옵니다. 이쪽에 계신 ‘흑무상’ 소협과 천보도 소협, 그리고 모용세가와 하북팽가에서 적극적으로 추적하고 섬멸해 주신 덕분에 타진의 가닥이 보이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남궁의 방계 중 마교와 결탁하는 일을 반대했다가 유폐된 이들을 발견해 무림맹에서 보호하는 중이온데, 정황을 들어 보니 50년 전 남궁영이 가주의 자리에 앉았을 시기부터 세가가 급격히 변질된 듯하옵니다. 남궁영은 하오문의 대란(大亂) 이후 종적이 묘연하옵니다만…….”

“그만. 빙궁에 대한 네 추측부터 듣겠다.”

“아, 네! 박주시! 박주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마교도를 2년 전 모두 ‘살멸(殺滅)’하였사옵니다. 이쪽의 ‘흑무상’ 소협께서 정말 많이 이바지해 주셨어요. 역시 약선 대협의 슬하에서 수학하신 덕분인지, 제 눈에는 평범해 보이는 상가에서도 귀신같이 이상한 점을 찾아내어 급습하시더군요.”

역시 아까 천오가 설린이한테 뭐라고 했나? 나 몰래 전음으로 험한 말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가 못 보는 사이 노려보기라도 했나? 분명 밝은 얼굴로 천오의 공로를 말해 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앙갚음처럼 보이지? 왜 이렇게 그놈의 ‘흑무상’에 강세를 주어 말하는 것 같지? 얘네 둘 제법 친하지 않았나? 천오가 연구하라고 장명쇄도 빌려줬다면서!

양육자 된 도리로 할 말이 없어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사이, 설린은 나름의 한풀이를 다 한 듯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박주시의 약재 시장은 그 뒤로 한 차례 대격변을 겪은 뒤 체계가 정리되어 이전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 되었사옵니다. 이제는 약을 구하는 데에 누군가의 허락이나 자격은 필요 없으며, 약재상들과 의원들에게 높은 자릿세를 요구하는 인습도 모조리 철폐하였사옵니다. 무림인과 민간인의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약재 시장은 단일세력의 휘하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의견에 모두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일종의 중립지대 형식을 갖춘 지 반년쯤 되었사옵니다.”

“나쁘지 않은 방향이구나.”

“실로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소식이 도매상인을 통하여 빙궁에 닿은 듯하옵니다.”

빙궁이 자리 잡은 곳은 시베리아의 남쪽, 여름 한 철을 제외하곤 사시사철 얼어 있어 빙결 호수라 불리는 곳이었다. 현대에 들어선 시베리아의 숲에서 찾아낸 생약이 뛰어난 효과를 증명하고 인기를 얻었지만, 아직 고대 시대에 머무르는 이곳의 북쪽 땅에서는 약초 하나 찾기 위해 숲을 뒤지다간 그대로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북해빙궁은 약초가 귀하다는 사실을 ‘초윤’이 기억하고 있었다. 북서쪽으로 2500리를 가면 약재 시장이 있긴 했지만 전부 근방에서 구한 것들이라 냉기만 가득했고. 또 얼어붙은 땅의 2500리 길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3000리보다 몇 배는 힘겨울 터였다. 그런데 빙궁의 북서쪽 2500리 너머 시장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설마 가 본 거야? 이런 약재 오타쿠 같으니라고……. 현경이 되면 몇천 리는 그냥 우습나? 도대체 얼마나 나돌아다닌 건지…….

없는 사람을 향해 투덜거리는데, 설린이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미간을 찡그렸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저편으로 미뤄 둔 생각을 인제 와서 찬찬히 되짚는 모양이었다.

“무림맹의 첫 업적으로 다름 아닌 박주시의 약재 시장을 언급하더군요. 강시나 마교도 등 꼽자면 끝이 없는데, 구태여 박주시를 서신에 적었사옵니다. 보통은 ‘무림’에 설립된 새로운 단체를 추어올린다면 무공으로 이룩한 전과를 말하지 않사옵니까? 저는 이에 이질감을 느끼고, 박주시에서 도매로 약재를 구매해 되파는 상인 중 대초원으로 향한 이들을 찾아 그들이 무엇을 구했는지 찾아보았사옵니다.”

설린의 행동 양식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희는 문장 몇 줄을 듣는 것만으로도 책의 모든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묘사 한 줄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린은 열세 살 남짓했을 적에도 더할 나위 없이 총명하고 습득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아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오문주 희의 아래에서 몇 년을 일했으니, 모자랐던 실전 경력과 본능적인 직감을 키우고 괴물같이 성장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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