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1)화 (1/115)

1화

세상에서 가장 원통한 일은, 일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야간 근무를 하다가 죽었다. 회사에 난입한 웬 괴한의 칼에 찔려서.

다음 생에는 금수저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

그리고 환생했다. 재벌가 막내아들로.

아무래도 죽기 전에 빈 소원은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오.”

핸드폰으로 내 계좌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어려서부터 받아 온 용돈을 모아 둔 것뿐이지만 숫자 단위가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면 독립해도 평생 돈 많은 백수로 살 수 있겠다.

온순하고 착하게 굴어 집안 어른들의 예쁨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생에서도 그런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원하는 바를 곧잘 얻어 냈던 터라, 환생 이후에도 그렇게 지내 왔다.

너른 침대 위를 행복하게 뒹굴 때였다.

띠링!

갑자기 촌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홀로그램 같은 창이 떴다.

[차은수 님께 드리는 환생자 특혜!]
[S급 가이드로 발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하마터면 집어던질 뻔한 핸드폰을 꼭 부여잡았다.

뭐야, 이거.

[나라의 평화를 지키자!
당신의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폭주하면 대한민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어서 가이딩을 통해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 주세요.
성공 시: 생존
실패 시: 사망]

“S급 가이드? 퀘스트?”

반사적으로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최상위 등급의 가이드로 발현했다고?

그리고 그걸로 특정 인물들을 도와라?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아, 그렇지.

웹소설에서 많이 읽었다.

시스템이 주인공에게 강제 퀘스트를 안기면서 존나게 굴리는 스토리.

“시발.”

기가 찼으나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이미 비현실적인 현상을 몸소 겪어 본 덕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는 게 어디 정상인가.

게다가 이 세계는 전생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은 인류가 에스퍼, 가이드, 일반인으로 나뉜다.

에스퍼는 초능력을 쓰는 존재인데, 힘을 쓸수록 체내의 파장이라는 것이 뒤틀렸다. 그것을 다스려 주는 상대가 가이드, 해당 행위를 가이딩이라고 한다.

가이딩을 못 받아 결국 파장이 망가지면 에스퍼는 폭주했다. 보통 자기가 가진 힘을 사방팔방 흩뿌리면서 날뛰었다. 그로 인한 인명이나 재산 피해는 에스퍼의 등급이 높을수록 방대해지고.

에스퍼에게나 국가적 차원에서나 가이드는 꼭 필요한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이드의 수는 에스퍼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러니 당연히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나타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그런데 내가 S급 가이드가 되었단 말이지.

“…….”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 보았다.

몸에 아무 변화도 안 느껴지는데.

에스퍼랑 만나 봐야 알 수 있나?

[퀘스트 팁이 주어집니다.]
[폭주 위험군 명단]

여러 인물의 정보가 사진과 함께 촤르르 뜨며 내 시선을 앗아 갔다.

“미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치 못하게 우리 집안 맏이인 형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놀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같이.

“존나 다 내 취향이야.”

잘생겼다.

귀엽고 예쁘고 잘생긴 건 소중하다. 무조건 지켜져야 옳았다.

내가 죽고 말고를 떠나서, 저 사람들이 폭주하다 죽는 꼴은 못 본다. 게다가 전부 남자인데, 헤테로가 아닌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전생에서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만났던 섹스 파트너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굉장한 미남들이기도 하고.

어느새 공손해진 자세로 정보를 훑어보았다. S급 남성 에스퍼라는 사실이 모두의 공통점인 듯했다.

아무래도 형이 가장 신경 쓰인다.

“음.”

형은 가이딩하기 조금 그런데.

장남인 형, 누나, 나. 우리 삼 남매 중에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은 형은 과거에 입양됐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친형제처럼 돈독히 지내 온 사이였다.

그리고 가이딩은 신체 접촉을 이용하는데, 그 강도가 딥할수록 효율이 올라간다고 들었다. 당연히 섹슈얼적인 면이 없을 수가 없겠지.

……그래도 이게 형을 지키는 일이라면야.

뭐 어쩌겠어.

사랑하는 가족을, 그냥 손 놓고 잃을 수는 없잖아?

***

[은수: 형, 언제 와?]

겉옷을 입다가 메시지를 확인한 차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나가던 팀원이 그에게 말을 붙였다.

“누가 보면 애인인 줄 알겠습니다, 팀장님. 또 동생분 연락이죠?”

“야. 너 아직도 모르냐. 우리 팀장님한테는 막냇동생이 애인보다 더한 존재야.”

자신의 책상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던 다른 팀원이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기저기서 긍정하는 말들과 함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은혁은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들 그만 정리해.”

“들어가시게요? 오늘도 가이딩 안 받으시고요?”

누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곳 에스퍼 테러리스트 전담팀에는 가이딩실이 있다. 팀원들은 귀가 후의 컨디션을 위해, 거기서 가이딩을 받고 퇴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전담팀에 배정된 가이드들은 모두 C급. 그들은 S급 에스퍼인 차은혁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아주 미약한 효과의 가이딩은, 오히려 파장을 거슬리게 자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차은혁은 본인의 상태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면 가이드를 찾지 않았다.

“어. 간다.”

짧게 대답한 그가 실내를 빠져나갔다.

겨울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눈송이가 약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차은혁이 야외 주차장에 세워 둔 자신의 차를 탄 순간.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큭.”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 뒤, 차은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퇴근이 늦었다.

[나: 지금 출발. 저녁은.]

[은수: 아까 아주머니께서 차려 주고 가시긴 했는데, 형이랑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지]

[은수: 아 누나는 오늘 일이 생겨서 회사에서 잔대]

모친은 출장을 떠나 있으니, 현재 집에는 가족 중 막내뿐인 상황이었다. 차은혁은 지체 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남동생은 최근 법적 성인이 되었지만, 차은혁에게는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특히 혼자 있다고 하면 불안감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 주변에 경호원들을 배치해 두었으면서도.

나이 차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열세 살 적이 기점이었다.

늦둥이인 차은수의 옹알이를 보며 온 가족이 행복했던,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날.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에스퍼 테러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저택의 방범 시스템을 파괴하고 깊숙한 보금자리를 침범했다. 그러고는, 가족 앞을 가로막고 나선 부친을 무참히 죽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귀엽네.’

부친을 살해한 사내가, 요람 속에서 잠든 차은수를 응시했다.

차은혁은 잠시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동생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뱀처럼 기어올랐다.

숨이 멎은 아버지. 실신한 어머니. 넋 나간 여동생.

내가 은수를 지켜야 한다.

의지는 방아쇠가 되어, 미성숙한 몸속의 잠재력을 바깥으로 터뜨렸다. 어설프지만 살의에 찬 힘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러리스트인 사내가 차은수에게 뻗던 제 두 손이 쩌저적 얼어붙는 과정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우습다는 듯 그것을 무효화시켰다.

얼음이 입자화되어 산산이 흩날렸다.

‘아직 어린데 벌써 발현했구나. 대단하다.’

결국 차은수를 품에 안은 사내가 자신을 돌아보며 웃었다.

‘일반인 주제에 설친 쓰레기 같던 아비랑은 달라.’

‘……내 동생한테서 당장 떨어져.’

‘글쎄. 내가 네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멀쩡한 두 손이 아기의 작은 몸을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약자는 너거든.’

당연한 가르침을 주는 교사 같은 태도였다.

‘그래도 기특하니 기회를 주마.’

그렇게 지키고 싶은 이 아이, 잘 지켜봐.

내가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까 말이야.

괴이할 정도로 단조롭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차은혁이 회상을 끝내자 서리 낀 핸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내의 온도 또한 눈에 띄게 내려가 있었다.

악몽 같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늘 이랬다. 물론 불안정한 파장 탓도 없진 않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차은혁은 그 사내를 잡기 위해서 여태껏 달려왔다. 부친의 복수를 위함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가 돌연 나타나 차은수를 해할지 모른다는 생각.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위험을 초래할 근원의 뿌리를 뽑는 것뿐이었다.

“오셨습니까.”

집 입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경호원들이 묵례를 해 왔다. 차은혁이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직접 선별한 자들이었다.

차고에 차를 넣어 둔 뒤, 잘 닦인 돌바닥 타일 위를 걸었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던 저택에서 떠나온 지 오래다. 그러나 마치 그곳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양, 광활하게 펼쳐진 정원은 부친이 생전에 좋아했던 방식대로 꾸며져 있었다. 눈이 약간 쌓인 게 누군가는 운치 있다며 한참 감상할 풍경이다.

“형?”

바로 그 누군가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옅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현관 밖 벤치에 앉아 있었다. 꽤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코끝만이 아니라 보얀 뺨까지 발갛다.

차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왜 나와 있어. 감기 걸리게.”

“형 기다릴 겸 바람 좀 쐬고 있었어. 눈 오니까 정원 너무 예쁘지 않아?”

힐링된다며 웃던 차은수가, 다 식은 머그잔을 흔들어 보였다.

“근데 춥긴 추워. 차가 금방 식더라.”

“그럼 왜 안 바로 들어가고……. 됐다.”

차은혁은 한숨을 삼켰다.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혼도 못 내겠다. 원래 매번 지는 쪽은 자신이었다.

“들어가.”

현관문을 활짝 열고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라는 의미였다.

군말 없이 일어선 동생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안색이 많이 안 좋네. 혹시 그 가이딩이란 거 부족해서 그래?”

“피곤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급에 맞는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게 맞지만.

그러나 차은혁은 막냇동생에게 에스퍼가 겪는 고통에 관해 자세히 털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동요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흐음.”

그런 형의 모습에, 차은수는 오묘한 미소를 띤 채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