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심태성은 적막한 정원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오랫동안 말아 쥔 탓에 피가 통하지 않는 주먹이 보랏빛으로 질렸다.
그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자신은 차은혁에게 살의를 품을 주제가 못 된다고.
아침 일찍 황급히 뛰어오는 중년인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인물이 이곳 가문의 전담의라는 설명을 전해 듣자마자, 차은수에게 어떤 이상이라도 생겼나 싶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어 뒷일을 재지 않고 능력을 써서 실내로 이동한 순간.
얼음으로 빚어진 창날이 그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차은혁이 한참 후 내뱉은 지시에, 심태성은 바로 따르지 않았다. 구태여 고개를 돌려 차은수의 모습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 바람에 지이익, 하고 날붙이의 첨단이 볼을 그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공포에 얼굴이 허옇게 질린 전담의가 살피고 있던 차은수는…….
“이동하는 게 네 능력인가 보지.”
냉랭한 저음이 들려왔다.
놀라지 않고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던 차은혁이 심태성의 맞은편에 멈추어 섰다.
그가 심태성을 노려보았다.
“아니. 남들에게 인생을 속이는 것도, 필요해지면 진실을 드러내 원하는 걸 얻어 내는 것도. 모두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어.”
“…….”
심태성은 차은혁이 그답지 않게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무언가 달라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전에 없던 독점욕으로 물든 눈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도 꼭 그래야만 했습니까.”
“……뭐?”
“저렇게 쓰러지실 정도로 몰아붙여도 될 분이 아닙니다.”
기어코 분노가 새어 나왔다.
차은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와 내 동생 사이의 일인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들지? 가이딩 한 번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는 위협적으로 심태성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은수는 처음 만난 굶주린 에스퍼도 도울 만큼 베푸는 성격이다. 넌 그 애의 동정심을 자극한 것에 불과해.”
자신의 가이드를 공유한 상대를 향한 살기가 내뿜어졌다.
심태성은 상처받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도련님께 팀장님이 가장 큰 존재일 거란 점도.”
“…….”
“다만 저는 제 구원자를 잃을 생각이 없습니다.”
같은 인물에게 구원받은 에스퍼들의 시선이 충돌했다.
“내가 널 적으로 판단해야 하나?”
“그 반대의 의미로 꺼낸 말이라는 것, 알지 않으십니까.”
심태성은 차은혁을 안다. 차은혁은 이성적이다. 그것은 한 집단을 이끄는 이에게 있어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으리라 확신했다.
그 생각을 간파한 차은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빌어먹게도 심태성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틀렸다면, 창끝은 심태성의 지척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순간이동의 가치란 오랜 시간 자신을 속여 넘기고, 소중한 가이드를 선수 쳐 탐한 상대에 대한 살심도 억누를 만큼 높은 것이었다.
***
혼몽한 의식 속에서 유영하며 생각했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됐더라.
“정말 다른 문제 없는 거 맞아요, 박사님?”
“……그렇습니다.”
“근데 왜 아직도 안 깨어나는 거죠?”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드물게 단순 몸살감기로도 의식을 잃고는 합니다. 열도 떨어지셨으니 염려 마시지요. 곧 의식을 되찾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만. 정 박사님만큼 은수 건강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어디 있겠니, 은세야.”
부드러운 손이 내 이마를 짚는다.
“일단 알겠어요.”
조용조용하던 대화가 끊겼다. 이후로는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
나 살아 있냐.
“은수 도련님?”
내 링거액을 교체하던 희끗희끗한 머리의 사람이 멈칫했다. 우리 집안의 오래된 전담의였다.
“저…….”
물 좀 달라고 말하려다가, 맛이 간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멀쩡하면 그게 이상하긴 하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전담의는 내가 뭘 바라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그는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고, 협탁에 있던 컵에 물을 따랐다.
“천천히 마시셔야 합니다.”
기력이 딸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주의받은 대로 조금씩 물을 머금어 목을 축였다. 전담의의 시선이 움직이는 목울대를 따갑게 찔러 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매만지자 크게 답답하지 않은 목티가 손에 잡힌다.
“어디,”
내게서 도로 컵을 받아 간 전담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듣고 계시다시피, 큼, 목이 이렇고. 어지럽고 메슥거리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요.”
대답을 하면서도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어제 아침에 정신을 잃으셨다는 소식에 급히 찾아뵀습니다.”
그럼…….
형에게 들린 채 마구 박히는 꼴을 거울로 고스란히 마주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도중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그때 바로 형이 전담의를 부른 걸까.
하긴. 병원에 가는 건 곤란하지. 내 몸 상태를 검사한다면 분명 어디서 억지로 당하고 왔다고 판단될 테니까. 의료진뿐 아니라 다른 보는 눈들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느니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오픈하기로 결정했겠지.
“은수 도련님.”
진지한 부름이 들려왔다. 전담의는 잔뜩 경직된 표정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어려서부터 늘 의연하셨지요.”
“…….”
“아무리 병치레가 잦으셨어도 말입니다.”
주름 잡힌 얼굴에 언뜻 비장함이 스친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쉽게 치료되지 않습니다.”
……어.
“만약 이곳에서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면……. 그래서 은수 도련님께서 도움을 바라신다면.”
전담의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박사님.”
내가 형에게 강간당했다고 여겨, 신고를 하든 도망을 치게 해 주든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다는 뜻이었다.
문득 형이 어떤 모습으로 전담의를 호출했을지 궁금해졌다.
“저는…….”
흔들리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실은 저도 즐겼거든요.
“형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눈빛이 날아든다.
나는 부러 전담의의 손을 꼬옥 맞잡으며 망설이는 척했다.
“형은 폭주하기 직전으로 보였어요. 당장 가이딩 받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상태였겠죠.”
당시를 회상하듯 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해해요.”
“…….”
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듯, 전담의는 얼빠진 낯이었다.
이윽고 떠듬떠듬 말문을 연다.
“은수 도련님께서……. 가이드로 발현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가이딩 때문에…….”
에스퍼인 형이 나를 강제로 취했고,
지금 내가 그걸 이해한다고 말한 거냐고.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표정이었다.
“……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전담의가 경악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에스퍼에게, 특히 등급이 높은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얼마나 절실한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그렇기에 형이 나를 범한 것이 납득되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막냇동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치였다.
그런 일을 겪고도 형을 두둔하는 내가 믿기지 않는 눈빛이기도 했다.
“부탁드릴게요, 박사님.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해 주세요.”
“은수 도련님…….”
“차은수.”
대뜸 화를 꾹꾹 누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흠칫한 전담의와 나란히 문 쪽을 보았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형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여태 잡고 있던 전담의의 손에 땀이 찬다. 창백해지는 만면에는 명백히 형을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이 무겁게 말했다.
“어디에도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
“혹여 외부에 은수가 가이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너부터 의심하겠다는 경고였다.
조폭 잡는 경찰이 도리어 조폭처럼 구는 걸 봤을 때의 심정이 이런 걸까. 오랫동안 알아 온 나이 지긋한 어른에게 너무하다 싶어 인상을 썼다.
“형.”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물끄러미 맞보는 내 얼굴에, 점점 뜨뜻 뭉툭해진다.
“이만 쉬세요, 박사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부드럽게 떠밀자 전담의가 저항 없이 물러섰다. 그러고는 제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그가 다소 빠른 손놀림으로 빈 카트리지와 트레이 따위를 챙겨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잠깐 창밖을 흘끗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박사님께 무슨 무례야, 형.”
고요해진 공간에 내 음성이 울렸다. 안색을 살펴 오던 형이 멈칫했다.
이내 조용히 답한다.
“입막음은 부탁으로 되는 게 아니야.”
“…….”
우리 형 사고방식이 이렇구나.
“그리고 분명 비밀에 부치기로 했을 텐데.”
“……형이 오해받게 되잖아.”
그러느니 내 정체를 밝히는 게 낫지.
적어도 에스퍼가 가이드를 욕망하는 건 이상하지 않으니까.
나는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유린당한 기억이 떠오른 양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언제 형을 똑바로 보았냐는 듯 눈을 회피하는 행동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