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주변 사람들이 전부 괴물이 되어 자신을 공격한다면 어떨까. 어떤 이는 공포에 질려 무력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반격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장내를 채웠던 연기가 점점 한군데로 모이더니 이내 왜소한 체구의 노인 형상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약해 빠진 것들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드문드문 고인 피 웅덩이를 피해 걸었다. 단상 앞에 도착하자, 그 위에 걸터앉아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서준호의 몸을 쓰고 있는 주청경이었다.
“에스퍼가 있더군요.”
“……예.”
허상에 당하지 않는 케이스는 두 가지. 노인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거나, 노인의 혈액을 섭취한 자여야만 했다.
전자에 해당하는 존재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게 후자에 해당하는 존재를 앗아 갈 줄이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훼방이었다.
“순간 이동이라…….”
주청경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만한 능력을 지닌 에스퍼를 제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태 자신처럼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몰라도, S급 에스퍼인 차은혁을 가이딩할 수 있는 이의 호위라면……. 더군다나 차은혁이 애지중지하는 혈육이기도 한 이의 호위라면 당연히 그 정도 상대가 맡아야 하긴 하겠지.
그러나 납득한 것과는 다른 문제로, 계획의 실패는 언제나 불쾌하다.
차은혁의 동태를 살피고자 향한 곳에서 놀라운 수확을 얻은 이후로 쭉 즐거웠던 기분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엉망이었다.
파스스스.
돌연 살을 에는 한기가 몰려왔다.
단상의 두 사람을 조여 오듯 사방이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긴장한 노인이 반듯한 허리를 더욱 곧추세웠다. 주청경은 표정 없이 근원지를 응시했다.
검은 하네스로 타이트하게 조인 전투복 차림의 남자가 뚜벅거리며 걸어온다. 낮은 굽에 짓밟힌 성에가 파삭 비명을 지르며 부서졌다.
살기가 넘실거리는 흑안이 청년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요.”
거짓된 존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반갑습니다, 차은혁 씨.”
“…….”
카가각!
허공에서 얼음 파편이 튀며 기다란 형태의 무기가 생성되었다. 날카로운 날에 낀 서리가 번뜩였다.
차은혁은 손등이 불거질 정도로 강하게 창대를 움켜쥐었다.
“이런. 저는 대화를 하려고 기다렸는데, 너무 싸울 의지가 만만한 것 아닌가요.”
주청경이 곤란한 듯 뺨을 긁었다.
“게다가 이거 일반인 몸입니다?”
그 협박에 상대방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챘으나, 차은혁은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길 이런 꼴로 만들어 두고 잘도 지껄이는군.”
혐오를 담은 대답에도 주청경은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상관없지만 당신은 다르잖습니까. 국가 소속 에스퍼가 하나 있는 인질을 죽이려 들면 어쩌자고…….”
아.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척 얼굴을 끄덕거린다.
“당신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군요.”
“…….”
“당신 가이드를 납치하려던 새끼를 잡아 족치는 거지.”
사실이었기에 도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은수를 입에 담은 것은 차은혁의 살의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뿌드득 소리가 나게 창을 고쳐 쥔 차은혁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중상을 입히거나 죽인다면, 본체에도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다.
서준호가 동생의 친구라는 점은 오로지 그 생각에 파묻혔다.
벼려진 창날이 웃고 있는 청년의 가슴을 관통하려던 찰나였다. 서준호의 육신이 눈을 감고 털썩 쓰러졌다.
“진정하시죠.”
동시에, 거리가 상당히 있는 뒤쪽에서 시체 하나가 일어섰다.
차은혁은 몸을 돌리며 창을 바닥에 꽂았다.
쾅!
쩌저저저적.
무기를 매개로 뻗어져 나간 빙로가 시체의 발끝에 닿았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동결되었다.
주청경은 이어질 공격을 안다는 듯 차은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흥분 좀 가라앉히시라니까……. 장희강, 잡고 싶지 않으십니까?”
양부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차은혁이 멈칫했다.
“뭐?”
“제가 당신 가이드를 노리는 건 이해하세요. 저도 많이 주린 에스퍼라서 말입니다.”
당당한 개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저희에겐 공통된 적이 있거든요.”
“…….”
“장희강의 목을 따고 싶은 건 저 역시 마찬가지란 뜻이죠.”
주청경이 차츰 웃음기를 지웠다. 응고된 피에 반 이상이 덮인 낯이 한층 더 섬뜩해졌다.
제 진심을 보이는 태도였다.
차은혁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유는.”
“그것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런데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짜증나지만, 장희강과 제 사상만큼은 같습니다. 그에 반하는 당신을 여태 건드리지 않은 걸 고려해 보면……. 음. 충분하지 않나.”
“…….”
정확히는 차은혁이 지켜야 할 것들을 해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
장희강과는 다르게.
“장희강도, 주상호를 죽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죠.”
주청경은 다시 웃었다.
“왜인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생기 없는 시체의 눈이 지금껏 사태를 가만히 방관하던 노인에게로 향한다. 그에 고개를 숙여 보인 노인의 몸이, 연기가 되어 창밖으로 날아갔다.
협상이 결렬될 때를 대비한 수였다.
차은혁은 냉정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욕구대로라면 놈을 턱밑까지 얼린 뒤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지만……. 머리는 습관처럼 득과 실을 따지고 있었다.
본체가 따로 있는 능력자다. 여기서 바로 잡을 수도 없고, 잡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이쪽에서는 놈의 실체를 모르고 놈은 이쪽을 안다.
신뢰할 수 없지만, 장희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주겠다고도 했다.
보통 저런 류는 두 번 설득하지 않는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장 얻는 것 하나 없이, 차은수를 집착적으로 노리는 적 하나가 명확히 추가되는 결과만 발생할 터였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협력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가이드에 한해선 벌써 다른 에스퍼와도 손을 잡은 것 같던데.”
주청경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면 설마, 제가 차은수 씨를 어떻게 해 버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입 다물어.”
“하하. 적어도 장희강을 죽이기 전까지는 오늘처럼 노리지 않을 테니 마음 놓…….”
퍼벅. 시체의 얼굴이 차디찬 창에 그대로 꿰뚫렸다.
행동은 주저 없었으나, 피하고도 남을 만큼 느린 공격이었다.
대답을 들은 주청경이 만족했다.
“그럼 또 보죠.”
또 다른 시체가 짧게 소리 내어 웃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차은혁은 바깥에서 다가오는 팀원들의 기척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
-제가 서 있는 곳은 잠실에 위치한 아트에일 호텔의 정문 인근입니다. 어제저녁 건물 72층에 위치한 연회 홀에서 테러가 발생했다고 하는데요, 현재까지도 접근 및 출입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테러가 일어난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지인이 전화를 걸어왔고, 또 황급히 달려와 마주친 가족들은…… 말해 뭐 할까. 창백하게 질린 어머니를 안아 드리고, 펑펑 우는 누나를 달래느라 한참 진땀을 뺐다.
당시 나는 급한 일이 생겨 서준호에게 선물만 주고 호텔을 떠나 목숨을 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텔에서 나가는 모습이 찍히지 않은 CCTV나, 타고 갔던 차가 그대로였던 것은 형이 처리했다고 들었다.
거짓이라고 말할 목격자도 아무도 없었다. 서준호를 제외한 전원이 죽었으니까.
그리고 서준호는…….
“그날 아침부터 기억이 없어……. 이게 말이 되냐고!”
병원에 입원한 녀석은 내게 매달리며 울었다. 나는 종일 서준호를 위로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생일 파티에 온 사람들이 다 죽었다니. 혼돈에 빠지고도 남겠지.
이때 나는 주청경의 능력이 단순 빙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빙의 대상의 기억도 삭제할 수 있는 거다. 제가 몸을 차지했을 때의 기억에 국한되지는 않는 듯했다.
문득 그런 추측도 들었다. 빙의는 제약이 있지 않을까. 내 몸을 빼앗지 않은 점을 생각해 보면, 전담의나 서준호처럼 일반인만 조종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
“…….”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보았다. 운전 중인 심태성은 늘 그랬지만, 오늘은 나 역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었으니까.
유명 정재계 인사들의 자제들이 대거 죽은 초유의 사건이다. 장례식장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드는 기자들을 막느라, 수많은 유족이 오열하느라 조용할 틈이 없었다. 아직도 울음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도 않아서.
아무리 죽음을 겪어 봤어도, 알고 지내던 이들의 죽음에 이토록 무감한 게 정상인가?
심지어 내 탓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를 노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테러를 하려면 했겠지만…….
그럼 그게 과연 그날 그곳이었겠냐고.
“도련님.”
애초에 내가 S급 중에 테러리스트도 있음직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패착이었다.
또한 이 세계의 환경을 너무 우습게 본 것도 있다.
손 하나만 까딱해도 일반인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에스퍼들을, 그리고 그들끼리 대립하는 위험천만한 세상을 말이다.
시발.
실제로 겪어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근데, 잠깐만.
퀘스트 포기가 되나?
띠링!
[퀘스트 포기는 불가합니다.] |
반응도 존나 빠르다.
그냥 혹시나 한 거거든.
만일 포기할 수 있다 했더라도 막상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S급들이 폭주하면 나라가 세계 지도에서 지워질 만큼의 재앙이 닥친다는데, 어떻게 선뜻 그럴 수 있을까.
띠링!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
……어?
띠링!
[퀘스트 포기는 불가합니다.] |
띠링!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
띠링!
[퀘스트 포기는 불가합니다.] |
뭐야, 이거.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음과 경쟁이라도 하듯 눈앞을 뒤덮는 창들에 머리가 굳었다.
시스템이 미쳤나?
띠링!
[■■트■ ■■하시■■■까?] |
“도련님?”
“……!”
큼직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힌 심태성이었다.
“어디 아프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차는 어느새 갓길에 세워진 상태였다.
“아…….”
나는 기괴함에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바싹 마른 입으로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 순간, 창들이 전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