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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57)화 (57/115)

57화

두 눈을 거칠게 비비고 창을 다시 확인했다.

그 순간.

띠링!

[■■■를 ■■하시겠습니까?]

띠링!

[■■■를 ■■하시겠습니까?]

활자 오류가 난 시스템 창이 반복적으로 떴다.

마치 장례식 날 겪었던 그 일처럼.

뇌리에 남아 있던 찝찝한 기억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어.

잠깐만.

이거 설마 또…….

퀘스트 포기하겠냐던 그 질문인가?

“…….”

아니. 아닐 수도 있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으로 고뇌에 빠졌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감만으로 여기서 결정을 내리면 어떤 손해로 돌아올지 모른다.

답답하네. 무슨 내용인지 보여야 대답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제3의 눈을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띠링!

[■■■를 ■■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이 제 전능함의 일부를 떼어 준 것처럼 사기적인 스킬이 아닌가.

내가 지정한 대상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시스템이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넘어서서 어떤 형태로 작동되는지, 시스템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몰라, 시발.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나는 눈을 감고 시스템을 떠올렸다.

바로 그 찰나였다.

띠링!

[■■■를…….]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쩌적. 쩌저저적.

기계음과 더불어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도로 눈을 번쩍 떴다. 어둠뿐이던 공간에 하얗게 균열이 가고 있었다.

“뭐, 뭐야.”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위쪽에도 역시 급속도로 뻗어 나가고 있는 금이 보였다.

비현실적일 만큼 기괴한 장면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재앙에 휩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쩌저저저적.

반사적인 두려움에 온몸이 차게 식으며 땀이 났다. 저절로 한껏 움츠러든 나는 머리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와장창 부수어진 공간의 파편들이 나를 덮쳤다.

***

[차, 차은수 님.]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감고 있는 눈 안으로까지 파고드는 밝은 빛이 정신을 깨웠다.

[차은수 님.]

인상을 찌푸렸다가 풀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워 있는 나를 쪼그린 채 내려다보고 있던 어린애와 시선이 마주쳤다. 통통한 볼이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근데…….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동자는, 동공 따위도 없이 마냥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면서 입을 열었다.

“누구…….”

[저어, 저예요, 시스템!]

녀석이 어째서인지 무척 감격스럽다는 어조로 외쳤다.

어, 뭐……?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모셔 와서 죄송해요. 하지만 손 놓고 차은수 님을 뺏길 수는 없었어요.]

“…….”

……좋아, 일단.

일단 이 어린아이가 시스템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얘가 말할 때마다 해당 내용이 눈앞에 시스템 창으로도 떴으니까.

그래. 아무렴. 이런저런 일 다 겪어 봤는데, 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만날 수도 있는 거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데……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와는 대조적인 새하얀 공간이었다.

정체불명의 무수한 기호가 그득한 창들이 쉴 틈 없이 생성되고, 수정되고, 사라진다.

감히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듯한 그것들에 압도당해,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를 눈치챈 기색의 시스템이 내 손을 꼬옥 잡아 왔다. 분명 사람의 살갗인데 너무 차가워서 흠칫하고 말았다.

[여긴 제가 세계를 주관하는 곳이에요. 그,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차은수 님.]

“…….”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그걸 말이라고.

대답 없이 시스템을 응시했다.

시스템이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 드려야 할지…….]

그러다 우물쭈물하며 말을 고른다.

[전생이 기억나시죠, 차은수 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전생에서 어떻게 죽으셨는지도…… 기억나실 거예요.]

시스템이 내 눈치를 보면서 꺼낸 말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회사에서 칼 맞았지.”

이후에 옥상에서 떨어졌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때 저는 이쪽 세계로 데려올 영혼을 구하고 있었어요.]

시스템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이곳의 핵들을 지켜 줄 영혼이요.]

“……핵?”

[세계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세계를 유지시키는 생명이 있어요. 그들을 핵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에스퍼, 개중에서도 S급이라고 부르죠. 그들이 바로 핵이에요.]

“……!”

[현재의 핵은 한국에 있는 S급 에스퍼들이고요.]

나는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면서 경청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미래를 보았어요. 가이딩을 받지 못해 폭주하고, 죽어 버리는 미래를. 그리고 그 죽음들로 인해 소멸하고 마는 이 세계의 미래를요.]

……허.

[이후 저는 미리 누군가를 그들과 격이 맞는 가이드로 발현시키려고 했지만, 이 세계에는 그럴 만한 존재가 없었죠. 그랬기 때문에 결국 다른 평행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땅한 영혼을 물색하기 시작했어요.]

“…….”

[그러던 와중에 마침 죽음을 맞이하신 전생의 차은수 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설마, 내가 그 마땅한 영혼이었다?”

[네! 그래서 즉시 이곳으로 영혼을 모셔 왔어요.]

다시 돌아봐도 기쁘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나 내 쪽은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이거…….

내 환생이 시스템의 안배로 이루어졌다는 뜻인 거지?

“…….”

와, 시발. 기가 막히네.

사실 이 모든 게 내 망상은 아닐까.

[차은수 님께서 어린 시절 무척 병약하셨던 건, 섭리를 거스른 생명체여서였어요. 다른 세계의 존재셨는데 저 때문에 이 세계에서 환생하셨으니……. 영혼이 이 세계에 바로 적응하지 못하셔서 그 거부 반응이 육체로 나타나신 거죠. 근데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었어요……. 진심으로 죄송해요.]

시스템이 울상을 지었다.

[그나마 안정화되어 나아지신 성년 때, 그때 발현시켜 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와아, 아니. 하하…….”

실성한 듯 웃다가 정색했다. 손도 뿌리쳤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해 달랬어?”

[네, 넷?]

“그러니까 지금, 네 필요에 의해서, 다른 세상의 내 영혼을 낚아채다가 여기에 심고, 새로 태어나게 했다는 거 아니야. 그 탓에 내가 뭐만 하면 골골대는 몸이 됐던 거고. 거기다 멋대로 가이드로 만들더니 협박성 퀘스트까지 던져 놓고는, 그래 놓고 최선?”

꽉 문 잇새로 끊어 말했다.

비록 그토록 바라던 금수저로 환생하고, 퀘스트도 어쨌건 스스로 즐기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래. 솔직히 존나 즐겼다. 복잡한 심정도 크지만 그건 별개고, 아무튼 인정한다.

그런데 섭리대로 여기가 아니라 원래 세상에서 환생을 했다면, 어쩌면 여기에서보다야 훨씬 평화롭게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사뭇 빡치는 것이었다.

거긴 적어도 에스퍼고 뭐고 없다고.

또한, 알고 보니 내 두 번째 삶을 설계했다는 상대에 대한 거부감은 본능적인 것인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신적인 존재일지라도.

말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잖아, 시발.

“가만.”

인상을 팍 썼다.

“그러고 보니 전에……. 퀘스트 포기할지 묻다가, 안 된다고 했다가. 왜 번복했던 건데?”

단순 오류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찝찝한 일이었다.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한지, 시스템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게……. 원래 계셨던 세계의 시스템이, 차은수 님의 영혼을 돌려받기 위해서 이쪽에 자꾸 끼어들고 있거든요……. 그때 그 포기하겠냐던 질문도, 이곳에 오기 전에 계셨던 공간도 모두 그쪽의 짓이에요. 때마침 차은수 님께서 제 권능이 깃든 스킬을 시전하셔서……. 제, 제가 그걸 감지하고 그곳을 깨부쉈고요…….]

“그건 또 뭔……. 거기에도 시스템이 존재했다고?”

[네……. 저처럼 특정 인류에게만 존재를 드러내거나 했다면, 모르셨을 수도 있을 거예요.]

더 놀랄 것도 없다.

……그럼 아까 어둠 속에서 자꾸 떠오른 시스템 창의 질문도, 역시 퀘스트 포기를 거듭 묻는 내용임이 맞았던 걸까.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했다면 곧장 원래 세계로 영혼이 이동됐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기 세계의 일부라면 풀 한 포기에도 집착하는 시스템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 그게 하필 그쪽일 줄은 몰랐어요.]

시스템이 우스운 소리를 지껄였다.

“너도 필요한 영혼을 찾아서 다른 세계들을 헤매다가 기어코 납치까지 해 왔잖아. 집착하는 건 똑같, 아니, 더 심해 보이는데?”

[그건…….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시스템은 잔뜩 위축된 채 힘없이 수긍했다.

기죽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저 안쓰럽게 여길 만한 것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겉모습에 휘말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실은 개미 눈곱만큼 불쌍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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