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어딘가로 옮겨졌거나, 어떠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장소를 대면했다.
“…….”
먹물에 잠긴 듯한 공간.
원래 세계의 시스템이 다시금 자기 영역으로 나를 불러낸 것이다.
자꾸 기절했을 때 데려오는 이유가 뭘까. 정신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영혼을 빼 올 수 있기라도 한 건가.
영혼 상태인 것으로 추측되는 몸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띠링!
익숙한 효과음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곧장 허공에 시스템 창이 떴다.
[■■■를 ■■하시겠습니까?] |
……또다.
또 같은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입을 다물고 창을 쳐다보았다.
“퀘스트……. 포기할 거냐고 묻는 건가요.”
한 박자 늦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창이 사라지고,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
그때 문득, 다른 말을 나한테 전할 수 있었으면 진즉에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세계의 시스템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나를 불러낸 원래 세계의 시스템은 이곳에서 허락된 권한이 거의 없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고민 끝에 재차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맞으면 창을 세 번 깜빡여 주세요.”
퀘스트 창이 깜빡였다.
정확히 세 번이었다.
“혹시 지금 여기서 그러겠다고 하면, 바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나요?”
깜빡, 깜빡, 깜빡.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 짐작이 맞았구나.
원래 세계의 시스템이 나를 데려가려고 한다던 이 세계 시스템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어. 이런 방식으로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는 거였다니.
……근데 원래 세계의 나는 죽었잖아.
저승에라도 가게 되는 건가.
그리고, 내가 돌아가게 되면 이 세계는…….
‘저희에게는 차은수 님이 필요해요.’
‘아마 차은수 님께서도 아실 테지만……. 이제 네 명 다 차은수 님 없이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
간절했던 시스템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내가 떠나면 S급들이 모두 죽는다. 이후 세계가 소멸한다.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과정이겠지.
형, 심태성, 주청경, 장희강.
누나와 어머니까지도.
모두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는 상황을 상상했다.
“…….”
시발.
절대 안 될 일이다.
돌아가야 할 이유보다,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너무도 명확했다.
물론 내 두 번째 삶이 이 세계 시스템의 설계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굉장히 꺼림칙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분노마저 솟구쳤었고.
그러나 시스템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신이 내 영혼을 납치하고 앞일을 짰다고 해서, 한낱 인간인 내가 뭘 어쩔까.
지금 이곳에서 퀘스트를 포기하고 돌아가면 엿을 먹이는 셈이니 복수 정도는 되겠으나…….
“죄송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시스템 창을 상대의 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돌아가면 이쪽 세계가 없어진다고 들었거든요. 저는 제 가족이, 사람들이 죽는 걸 원치 않아요.”
이 세계의 소멸을 무책임하게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돌아간다고 해서 딱히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남고 싶어요.”
내 말이 울려 퍼진 이후.
우우웅……!
대기가 강하게 울렸다. 창 또한 눈에 띄게 진동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마치 내 선택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기껏 회수하려고 왔더니 거부하는 모습에 화를 내고 있는 건가. 건방지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사적으로 긴장감이 싹을 틔웠다. 기이한 이 공간에서 시스템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뇌리를 스쳤다.
나는 여차하면 제3의 눈을 써서 이 세계의 시스템을 부를 각오를 했다.
하지만, 원래 세계의 시스템은 더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은 속■ ■습■다.] |
단지 새로운 창들이 떴다.
[■■이 들■ 말 ■■가 사실■ 아닙■■.] |
“…….”
인상을 찌푸린 채 문구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절반은 깨져 있는 활자 때문에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었어도 오류가 생기니 시도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얼마나 불완전하면 자기 영역인데도 이럴까.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 보이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
의아하게 물으려던 찰나였다.
창이 픽 꺼졌다.
동시에,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꿈을 꾼 기분으로 눈을 떴다.
뭐야, 시발.
존나 놀랐네.
그러나 놀란 심정과는 다르게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손은 멋대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이불을 정돈했다.
……어.
잠깐만.
핸드폰도, 이 침실도. 뭔가 다 까마득하면서도 익숙하다.
오래된 기억이 끄집어내졌다.
여기, 전생에서 내가 살던 집 아닌가?
“…….”
어안이 벙벙해진 와중에도 다리가 절로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머지않아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나는, 전생의 모습이었다.
허…….
이게 진짜 뭔 상황이냐고.
설마 원래 세계 시스템이 나를 그냥 멋대로 빼 온 건가?
아, 아니.
아니다.
전생의 나는 죽었잖아. 그리고 아까 핸드폰으로 본 날짜도 과거였어. 죽기까지 한참 남은 과거.
……그리고 몸은 또 왜 통제가 안 되는 거야.
머릿속은 난리가 났는데도 나는 졸음기가 남은 얼굴로 여유롭게 양치와 세수를 했다. 피부에 닿는 미온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서 노트북을 켜고 뉴스 기사를 훑어본다. 오늘은 공휴일이었다. 휴일을 시작하는 내 루틴이 이랬던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보고 있는데 집중이 되지 않던 화면 한구석에서, 문득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와, 퀄리티 봐라.”
내 입이 감탄사를 흘렸다.
게임 광고 창이었다. 각기 다른 이미지의 캐릭터 다섯이 카드처럼 나열된 일러스트를 내세우고 있었는데, 실존하는 인물처럼 보이는 수준의 그래픽이었다.
다들 웃음기가 전혀 없는 표정이라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중앙에 있는 옅은 갈색 눈동자와 머리를 가진 남자만이 그나마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외모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들을 떠올린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 남자는 나, 그러니까, 차은수인 나였고…….
나머지 넷은 형과 심태성, 주청경, 장희강이었던 것이다.
[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가이드?”
게임 제목을 읽어 본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광객들 안내하는 직업 같은 걸 뜻하는 건가. 왠지 아닌 것 같은데.
딱 그런 의문을 가진 채.
……어떻게 알았냐면, 이때 실제로 내가 그랬으니까.
이제, 기억이 나.
이제 깨달았다고.
이 상황은 내 과거의 일부였다.
이미 꿈으로도 꾸어 본 바 있던 과거 말이다.
뒤통수를 둔기로 세게 처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치] |
대혼란에 갇힌 내 속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기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러스트에 반한 나는 망설임 없이 설치 버튼을 눌렀다.
[설치 중] [설치 완료] |
다운로드는 수상할 정도로 금방 끝났다.
꼭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은 유일무이한 S급 가이드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폭주 직전인 동급 에스퍼들을 구원하는 것. 수많은 선택지를 통해 네 명의 S급 에스퍼를 공략하는 즐거움을 누려 보세요.] |
게임 시작 직후 설명이 이어졌다. 어떤 세계관인지, 에스퍼와 가이드, 가이딩이란 무엇인지.
설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표정이 묘해졌다.
“살아남기라기에, 뭔 생존물인 줄 알았더니 장르가…….”
이런 게임은 안 해 봤는데.
호기심이 생긴 나는 일단 확인을 눌렀다.
그러자 내가 일러스트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캐릭터이자, 재벌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설정이 소개되었다. 성씨를 제외하고 이름을 적으라는 칸에 나는 그냥 내 이름인 ‘은수’를 적었고…….
스무 살의 내가 가이드로 발현한 시점부터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나는, 전생의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내가 가이드임을 알게 된 형 차은혁이 이성을 잃고 나를 범하려던 장면.
심태성과 첫 가이딩을 하게 된 장면.
주청경이 호텔에서 테러를 일으킨 장면.
모든 사건이 내가 차은수로서 겪은 일과 동일했다.
게임에서 선택지를 고른 사람이든,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차은수든……. 결국에는 양쪽 다 나였으니 행동이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에서.
그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기억을 잃은 채로 환생했다고?
‘……저는 미리 누군가를 그들과 격이 맞는 가이드로 발현시키려고 했지만, 이 세계에는 그럴 만한 존재가 없었죠.’
‘그랬기 때문에 결국 다른 평행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땅한 영혼을 물색하기 시작했어요.’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말하던 시스템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 죽음을 맞이하신 전생의 차은수 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아, 시발.
나 속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