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시발, 괴물.
이제는 또 괴물이라고.
[그것들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존재들이에요.]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원통하게 여기고, 늘 분노와 파괴욕에 휩싸여 있죠.] |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적해졌다.
[원래는 세계의 관리자, 그러니까 저 같은 시스템들을 무서워해서 감히 세계를 공격해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두 세계의 융합 과정에서, 차은수 님 세계의 근원이었던 시스템이 사라지고…….] |
“…….”
사라졌다?
그 시스템도 눈앞의 시스템과 같이 전능했던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허무히 사라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심지어 여러 번 금기를 어겼다는 이 시스템보다야 온전한 상태였을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아.
문득 그쪽 시스템이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강제로 데려가게 되면 이쪽에도 리스크가 생깁니다만……. 어쩔 수 없겠네요.’
그 리스크란 게 무엇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어쩌면 그것이 소멸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스쳤다.
분명 융합 같은 걸 바라지 않았을 테니……. 이 시스템과 싸웠건, 미처 대응할 틈 없이 기습적으로 당했건.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이겠지.
기괴하게 느껴졌던 배경의 얼룩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검은 부분들이 흡사 혈흔처럼 보였다.
[……남아 있는 제 나약해진 상태를 눈치채고, 괴물들이 때때로 달려들고 있어요.] |
내 생각을 읽고 있을 텐데도 시스템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눈치만 슬슬 보며 설명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러잖아도 시공간이 불안정해지면서 세계 곳곳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에……. 아주 좋은 먹잇감으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죠.] [그들을 전 세계 에스퍼들이 처치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
삐빅. 허공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에스퍼들이 괴물들을 상대하는 영상 기록들이었다.
나는 멈칫하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공중의 균열을 파고든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럽고 비현실적인 형상.
마치 섬세하게 구현된 게임 그래픽 같았다.
에스퍼들은 괴물에게 덤벼들었다. 많은 인원이 괴물 하나와 싸웠고, 높은 확률로 죽어 나갔다.
지나치게 힘을 써서 폭주하는 경우에는 전투에 방해가 되어, 동료에게 죽임당하는 비극도 존재했다.
휙휙 장면을 바꾸어 가며 여러 경우를 띄우던 화면은…….
이내 괴물을 혼자 상대하는 네 명을 각각 보여 주었다.
익숙한 이들이었다.
“……!”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만감이 교차한다.
장희강과 주청경도 나서서 괴물을 죽이는 모습이 가장 놀라웠다.
각자의 조직이 있던 테러범들이, 융합된 이 세계에서는 영웅이 되어 있다니.
에스퍼들끼리 싸우던 세계가 공통된 적을 죽이는 세계로 변화한 것이다.
저렇게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같이 영혼 없는 얼굴들로 괴물과 교전하는 모습이, 꼭 저렇게 싸우다 뒈져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보여 드린 영상은 융합된 세계 기준의 과거예요.] [최근 시점으로 와서, 장희강이 차은수 님을 찾아온 날이 바로 융합이 이루어진 날이고요.] [핵들의 기억은 융합이 되는 즉시 돌아왔어요.] [제가 만들었던 통로……. 그러니까 게임을 통해 차은수 님을 만났던 그 순간부터 시작한, 모든 기억이요.] |
시스템이 옹송그린 채 덧붙였다.
[그건 제 예상에도 없던 현상이었어요…….] |
그래서 장희강이 나를 찾아낸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되찾자마자 빨리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다른 셋은?
[당연히 그들도 제정신이 아닌 채로 차은수 님을 찾기 시작했었어요. 실제로 다들 차은수 님이 갇혀 계신 곳까지 당도했었죠.] [하지만 차은수 님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 그들은 모종의 합의를 했어요.] [그……. 차은수 님을 찾아낸 순서대로 시간을 보낼 생각인 것 같았어요. 마지막에는 모르겠지만.] [괴물들이 예고 없이 쳐들어오는 세상이니, 그런 위험 요소로부터 차은수 님을 완벽히 지키기 위해서는……. 싫어도 서로 손을 잡는 게 맞다고 여긴 듯해요.] |
조금 웃긴데.
괴물 때문에 위험에 처할 인류가 지구상에 나뿐인 것처럼 얘기한다.
[핵들에게는 차은수 님이 전부니까요.] |
시스템이 부디 알아 달라는 듯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말했다.
[차은수 님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에요.] |
그건 내가 더 잘 알았다.
[다만, 다들 차은수 님께서 도망치셨다고 여겨서……. 그래서 그, 감정 상태가 조금 더…….] |
시스템이 차마 말을 또렷하게 끝맺지 못하고 자꾸 흐린다.
그러잖아도 강했던 집착 같은 감정이 이제 형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네 명 입장에서는 내가 두 번이나 튄 걸로 보였을 테니 이해가 갔다.
무섭다기보다는 어느 정도인지 직접 가늠해 보고 싶어진다.
장희강의 감정은 이미 매일 온몸으로 느끼고 있지만.
“…….”
끊임없이 경쟁하던 넷이 동맹을 맺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놀랍다. 특히 장희강을 원수로 여기던 형이.
“그래서.”
나는 똑바로 일어섰다.
“앞으로도 얌전히 휘둘리면서 가이딩이나 하라고?”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시스템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본론이었어?”
[차, 차은수 님.] |
시스템이 움찔했다.
[……그렇지 않아요.] |
금이 간 얼굴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현재의 세계 역시 핵들이 없으면 멸망하지만, 그들을 보살피는 건 오로지 차은수 님의 선택이신걸요.] |
그걸 이제 깨달았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사죄드리고 싶었어요.] [어떤 시스템에게든 생명체를 멋대로 휘두를 권리는 없는데…….] |
죄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다.
[운명을 조작해서, 정신과 육체에 멋대로 손을 대서 정말 죄송하다고.] |
“…….”
정적이 흘렀다.
시스템의 동그란 뒤통수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게 다야?”
[네?] |
“그게 다냐고.”
입으로 사과하는 건 누구나 다 한다. 심지어 인간은 경우에 따라 물질적인 보상도 겸했다.
그런데 시스템이 내민 영혼 납치의 보상안이, 기만의 대가가 고작 말뿐이라면 안 되는 일 아닌가.
존나 실망스럽잖아.
[그…….] |
고개를 번쩍 든 시스템은 당황한 듯 또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바, 바라시는 거라도……?] |
“네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거.”
[……!] |
시스템이 두 눈을 키웠다.
나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고 입을 닫았다. 잘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였다.
그래, 시발. 처음 계획대로 격앙된 채 욕이나 갈기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이득이지.
[……가장 좋은 거라면.] |
시스템은 바로 생각난 것이 있었는지 눈가를 파들파들 떨었다.
[제 권능인데…….] [하, 하지만 남은 권능이 별로 없어요, 차은수 님.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곧 소멸할 예정이라.] |
“네가 소멸해도 이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고?”
[네…….] |
“좋네. 그럼 그 권능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그건.] |
시스템은 울먹이는 태도로 대답했다.
[지금 시점에서 제게 남아 있는 권능을 전부 드린다고 했을 때,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우선 괴물들이 차은수 님께 접근하지 않을 거예요.] |
괴물들은 시스템을 무서워한다더니.
그 힘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꺼리는 듯했다.
[전에 쓰신 적 있던 제3의 눈도 다시 사용하실 수 있겠죠.] [본인을 제외한 생명체의 병이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
미쳤나?
조금 남았다더니 엄청 쓸 만하잖아.
“줘.”
곧바로 짧게 고갯짓을 했다.
“주고 소멸해.”
아까 시스템이 말하는 게 이미 죽을 준비도 다 하고 나 불러낸 것 같은데. 죽기 전에 죗값 치르면 후련하겠네.
괴물이 침입한다는, 이 엿된 세계에서 지니고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힘이다. 세계를 관장하는 상위 개체의 힘이니 오죽하겠냐마는.
[…….] |
시스템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필요하겠냐는 망발을 꺼내지는 않았다.
제 말대로 지금은 자신이 사죄하는 자리였으니까.
시간을 질질 끌며 망설이던 시스템은 머지않아 입을 오물거렸다.
[차은수 님께서 원하신다면…….] |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흔들림 없는 모습에 시스템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네, 차은수 님. 전부 드릴게요.] |
이어 천천히 손을 내밀어 왔다.
[여길 잡아 주세요.] |
나 역시 팔을 뻗어 그것을 맞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정말 권능을 남김없이 전이하고 바로 소멸할 셈인지, 시스템이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그리고……. 지금의 차은수 님께서는 과거의 차은수 님이 아니세요.] [이은수 님으로서 살아오신 삶과 합쳐지고, 융합된 세계의 환경에 맞추어 많은 정보가 달라졌죠.] |
영상이 떴던 위치에 현재의 내 정보창이 생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읽기 좋게 간략히 정리된 정보들이었다.
그것을 감흥 없이 훑어 내리던 내 눈길이, 텅 빈 가족 관계에서 멈추었다.
“…….”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그것을 알아챈 듯이 시스템이 우물쭈물했다.
[차은수 님의 가족이었던 이들은……. 이 세계에서도 무사히 존재하고 있어요.] |
나는 말없이 시스템이 내밀고 있던 손이나 덥석 잡았다.
시스템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보여 드리지 않아도,] |
“됐어.”
시스템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작은 손에 힘이 꼬옥 들어가며 내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럼…….] [……감사했어요. 차은수 님.] |
나를 쳐다보는 파란 눈에서 이채가 흐른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
앞으로는 제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길 바라요.
어린 목소리가 소곤거렸다.
이내 접촉점을 통해 이질적인 무언가가 전달되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것 같기도, 차가운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감각.
정확하게 형용키 어려운 그것이 내 안에 전부 퍼졌을 때.
시야가 차단되듯 까맣게 변했다.
……단단한 물체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