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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79)화 (79/115)

79화

장희강은 약속을 지켰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를 거울 방에 가두지 않았으니까. 나는 1층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기껏해야 거실과 침실, 욕실 정도였지만.

“으…….”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식탁에서 할 때도 나를 부숴 버릴 셈인가 싶었건만, 어제도 정신을 못 차리게 몰아붙였다.

……순수한 섹스였는데 말이다.

행위 자체는 가이딩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깨끗하게 씻겨 놓고 옷까지 갈아입혀져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관계를 갖더라도, 뒤처리 역시 박수를 칠만큼 깔끔하게 잘해 놓는다. 늘 잠에서 깰 때마다 개운한 상태라서 마음에 들었다.

고요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나 혼자네.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로 들어가 기계적으로 양치와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갔다.

장희강은 집을 아예 비운 듯싶었다.

나는 탁 트인 거실 창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이나 멀거니 바라보았다. 솔직히 할 게 정말 없었다. TV도 없는 휑뎅그렁한 곳이니 말 다했지. 장희강이 이곳을 집으로 쓰기는 했던 건지 궁금한 수준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회색 돌바닥. 주욱 이어진 담벼락. 그리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른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차은수.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희미한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

유리창 밖으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전보다 훨씬 수척하고 날카로워진 얼굴.

나는 눈을 한껏 키웠다.

다음이 형이었어?

“형?”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형을 쳐다보았다.

내 표정 변화를 눈에 담던 형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얼추 맞추어졌다.

넋이 나간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는 것은 딱딱한 유리창일 뿐이었다. 그 너머의 형도 내 손바닥이 있는 위치에 자기 손을 겹쳤다.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형.”

목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도와 설움으로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시야가 맑아졌지만,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할 말이 너무 많다는 듯 형을 바라보았다.

나를 구해 주러 온 거냐고.

버리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몸은 괜찮은 거냐고.

동시에, 혹시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듯한 기색도 내비쳤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스스로 환상까지 만들어 냈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렇지 않다는 듯, 형이 입을 열었다.

“은수야.”

바깥이라 아주 작게 들렸지만 아까보다는 선명한 음성이었다. 익숙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리웠던 부름이다. 나는 실제로도 살짝 울컥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장희강의 통제를 거스르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당장 코앞에 있는 형을 만날 생각으로만 가득 찬 것처럼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장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별다른 잠금장치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서.

모퉁이를 돌자, 멀지 않은 거리에 여전히 서 있는 형이 보였다.

“……!”

나는 힘껏 달려가 형의 너른 품에 안겼다. 단단한 팔뚝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마주 안는다.

닿자마자 자석처럼 형에게 흡수되는 가이딩이 느껴졌다. 당연히 예상은 했지만, 상태가 어지간히 나쁜 게 아닌 듯했다.

“흐으, 형……. 진짜야? 진짜 형이야?”

“그래.”

따뜻한 손길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엉엉 울었다. 사실 그때도 우는 일이 별로 없기는 했는데…… 필요에 의해서는 울긴 했었으니까.

“보고 싶었다, 은수야.”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숨이 차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고. 정말 너무 보고 싶었다고.

나를 다독이던 손이 멈칫했다.

“발 다치게 신발도 안 신고.”

허리와 무릎 뒤로 각각 손이 들어왔다. 그 상태로 나를 가볍게 안아 든다. 이어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분노에 눈이 돌아가 있기는커녕, 사뭇 잔잔하고 다정한 태도였다. 기대가 어긋나 놀랍기도 한 반면, 조금 김이 식었다.

나는 울음을 멈추기 위해 노력하는 척 흐끅거렸다.

형은 그런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즐거웠어?”

“…….”

……어?

젖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방금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곱씹어 보느라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문득, 형의 까만 눈동자가 향한 방향이 내 얼굴이 아닌, 목에 있는 장희강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속내를 들킨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즐긴 거 눈치챈 거 아니지, 시발?

“그게, 무슨…….”

“억지로 당하면서도 느낄 만큼 예민한 몸이라.”

내 다리가 걸쳐져 있던 손이 느릿하게 내려와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놈이 얼마나 만족했을지 감이 안 잡혀.”

평온을 가장했던 목소리가 점점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미칠 것만 같았는데.”

지그시 감았다가 뜬 눈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시체들이 꺼멓게 타 있었다.

인내심을 겨우 틀어쥐고 있는 분위기가 나를 위축시켰다.

“말해 봐. 그렇게 떠나 버린 이유.”

“……!”

“두 번째도 게임 속 세상에 불과한 줄 알아서였는지. 아니면…….”

나와 S급들 간의 첫 만남이 게임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건 원래 시스템과 장희강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넷이 손을 잡았다고 하니, 정보 공유가 이루어진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네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지.”

“…….”

지금 형은……. 내가 일언반구 없이 모든 걸 버려두고 떠날 만큼, 자신 또한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던 존재인지를 묻는 것이다.

어떻게 세계를 오갈 수 있었는지, 내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우선순위가 꽤 흡족하다.

“나는…….”

웃고 있는 속과 다르게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미안해.”

“…….”

“미안해, 형.”

결국 내가 꺼낼 말은 사과밖에 없었다.

“더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그렇게 돕겠다고 맹세했는데…….”

지키지 않고 사라져서 미안해.

그냥 전부 내 잘못이야.

나는 면목이 서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

“…….”

형은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결국 내가 자기 말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아……!”

나를 쥐고 있는 양쪽 손이 급속도로 차가워진다.

시발, 짜릿해.

이러다 아주 그냥 얼려 버리겠어.

“형……?”

두려움에 물들어 가는 낯으로 형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충동에 휩싸인 눈빛이 나를 짓눌렀다.

***

차은혁에게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냥, 전부…… 의미가 없더군.’

원수의 맥 빠지는 모습이 간간이 떠오르던 어느 날.

아침이 채 되기도 전에 그는 어떠한 꿈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거친 숨이 터졌다.

이내 눈가마저 젖었다.

비록 내용은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지며 날아갔지만…… 악몽이 아닌 행복한 꿈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깨어났다는 사실이 극도로 고통스러웠으니까.

끔찍한 파장으로 인해 늘 엉망인 컨디션이 더욱 망가졌다. 도저히 잠을 더 청할 수가 없었다.

이마를 감싸고 호흡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대에 앉은 채 날뛰는 감정을 다스리던 중이었다.

창밖으로 찬찬히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내뿜던 해가 사라졌다. 종말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급속도로 어두워진 하늘은, 쩍쩍 갈라진 듯 거센 비를 쏟아부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전.

그는 돌연 정신을 잃었다.

‘커헉……!’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기억이 동기화된 상태였다.

바뀐 세계, 바뀐 과거, 바뀐 현재.

온갖 새로운 지식과, 잃었던 기억들.

……개중에는 그를 쫓아다녔던 공허감의 원인도 있었다.

차은혁은 숨이 멎은 채로 차은수를 떠올렸다.

어떻게 내가 너를 잊었을까.

어떻게…….

이윽고, 그는 자해라도 하고 싶어졌다.

과부하가 걸린 뇌에서 다급히 찾아낸 정보가 절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차은수는 더 이상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모친과 누이에게 혈육인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현재의 세상에서도 차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턱대고 차은수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어째서인지 누군가 머릿속에 대고, 차은수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 낸 자기 세뇌에 불과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차은수를 찾아냈다.

정확히는 저보다 더 빨리 그를 찾아낸 장희강을.

‘이거 웃기게 돌아가네.’

뒤이어 주청경과 심태성이 나타났다.

장희강의 사저 정원에 모인 넷은, 서로를 향한 살기를 드러내면서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깝게 붙은 건물 내부에 있을 차은수에게 불똥이 튈까, 섣불리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혈투를 벌이던 에스퍼들은 이제 없었다. 그들은 그토록 바라던 존재를 눈앞에 두고 오히려 이성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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