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끊임없는 거짓은 스스로마저 속일 수 있다. 꾸며 낸 감정 역시 어느 순간에는 이게 진심이 아닌가 헷갈리게 될 수도 있었다.
주청경과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낸다면, 멘탈이 나가서 순종하던 내가 진심으로 주청경을 따르는 그림이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내 몸도 마음도 따먹었다고 착각할 에스퍼를 사실상 내가 우롱하는, 그런 상황을 떠올려 보니……. 상상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물론 장희강과 형이 그랬듯 주청경에게 주어진 시간도 한정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감정적 교류나 지배에 대한 욕심도 내다 버린 것 같아 보였다. 그럼 육체적으로 얼마나 굴리겠느냐고. 아마 하루도 빠짐없이 가지고 놀겠지. 나는 내심 단단히 각오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전부 놓아 버린 듯이 주청경의 품에 안겨 울었던 그제도, 그리고 어제도 아주 평화롭게 지나갔다. 주청경이 나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규칙이니 뭐니 긴장감을 유발하며 내뱉었던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쩐지 일부러 휴식을 취하게 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쉬기는 푹 쉬었다. 딱딱한 바닥이나, 묶여서 꼼짝도 못하는 손발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며 몸을 뒤척였다.
“……!”
반사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보았다. 다리 또한 강제로 붙어 있지 않고 편하게 벌어져 있었다. 결박이 전부 풀린 상태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냐.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있는 손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누워 있던 주청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맨몸이듯 그 역시 드로어즈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
잔근육으로 꽉 채워진 나체는 똑바르게 누워 있었고, 만지면 차가울 것처럼 창백했다. 눈꺼풀을 굳게 닫은 얼굴이 솔직히…… 누구나 인정할 만큼 잘생겼다. 얘의 경우에는 예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근데 왜 자기도 여기에서 자고 있는 건데. 셀프 감금이야, 뭐야. 너무 고요해서 자는 게 아니라 기절한 것 같기도 했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사이좋게 붙어 있는 모습이 참 마음에 듭니다.”
창살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얼굴을 돌리자, 철창 밖에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색다르기도 하고……. 잠든 내내 지켜봤는데 전혀 심심하지 않더라고요.”
처음 보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말투와 분위기는, 분명 내 옆에 누워 있는 에스퍼의 것이었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
“질투 나니까 그렇게 집중해서 보지 마세요. 나, 손에 사람 피 안 묻힌 지 꽤 됐는데…….”
“…….”
저 미친 새끼가.
심장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어딜 봐야겠어요?”
……선택지가 하나밖에 더 있을까. 나는 주청경을, 정확히는 주청경에게 몸을 빼앗긴 상대를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의식 없는 육체가 다시금 눈에 담겼다.
“그렇죠.”
짤막한 칭찬이 날아들었다.
“은수 씨. 사실 은수 씨를 처음 만난 이후로 쭉 궁금했어요.”
팅. 팅. 철창을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동요하는 눈으로 주청경의 몸을 내려다보던 내 어깨가 움찔거렸다.
“당신을 느끼면 영혼 없는 내 육체도 좆을 세우지 않을까?”
“……!”
눈을 크게 떴다. 열이 확 오르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표정 관리. 시발, 표정 관리.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힘껏 쥐었다. 저 새끼가 왜 손발을 풀어 주었는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오늘 그걸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그 전에 우선, 은수 씨 몸부터 풀어야겠죠?”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
어차피 이 몸은 죽어 마땅한 자의 것이었다. 집 안에 숨어들려던 쥐새끼를 잡는 것은 집주인의 도리가 아닌가. 죽이기 전에 자신의 즐거움을 보탤 도구로 써 주는 걸, 쥐새끼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했다.
주청경은 철창 안의 차은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으읏…….”
바깥에서 잘 보이게끔 바닥에 누워 다리를 벌린 채 스스로의 좆을 만지는 차은수는 골이 당길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기둥을 움켜쥐고 흔들거나 쓸어내리는 손길이 어색해서 더 꼴렸다. 수음이 처음일 리 없을 테니,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상황에 대한 수치심 때문인 것 같았다.
“하으, 읏.”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예민한 몸은 본인이 일으키는 자극에 반응했다. 보는 사람의 군침을 돌게 하는 예쁜 성기가 느릿느릿 힘을 얻어 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주청경은 자위를 해 보라고 지시했을 때 경악하던 차은수의 표정을 떠올렸다. 무기력한 태도로 따를 줄 알았건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만히 응시하며 기다리자, 결국 무언의 압력을 이기지 못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경고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다리 세우고 더 벌려요.”
낮아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차은수는 머뭇거리면서도 무릎을 세운 채 한껏 벌렸다. 성감과 자괴감 따위로 붉어진 얼굴이 눈을 꽉 감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뜬다. 볼을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도 애잔한 모습이었다.
다리를 따라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작은 구멍이 노출되었다. 곧추선 성기부터 통통한 음낭, 회음부를 흐릿한 눈빛이 핥듯이 주시했다.
“손안에 싸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
고개를 끄덕인 차은수가 좆을 마저 문질렀다. 마찰에 의해 열을 더해 가는 성기가 한계까지 부피를 키웠다.
흐트러진 숨이 허공으로 피어오르고 바닥에 붙은 발이 움칠댔다. 발갛고 도톰한 입술이 하얀 윗니에 꾸욱 짓눌렸다.
“아, 흣.”
뺨과 귀, 목이 보기 좋게 달아오르며 몰려오는 사정감을 표시했다. 최대한 참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신음이 튀어나왔다. 차은수는 허리를 달싹이며 귀두를 감싸 쥐었다.
“흐윽……!”
단정한 눈썹이 찌푸려지고 등이 굽었다. 손바닥이 미끌미끌하게 젖어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사출이 끝날 때까지 손을 떼지 않은 차은수는 전신을 파르르 떨며 숨을 골랐다.
주청경은 차은수가 절정에 이르는 광경을 홀린 듯 감상했다. 희었던 피부가 발긋해져서는, 쾌감과 부끄러움에 눈을 적시는 모습이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잘했어요, 은수 씨.”
철창을 부수고서 차은수를 범하고 싶은 욕구를 인내하느라, 그는 조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제 스스로 풀어 봐요.”
“…….”
방금 가지 않았느냐는 차은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쪽을 보지 말라고 했던 말을 어긴 셈이었지만, 주청경은 수치스러웠을 상황 속에서도 사정에 이른 차은수를 대견히 여겨 너그럽게 설명했다.
“거기 말고, 더 밑에. 내 좆집 말입니다.”
“……! 그건…….”
저질스러운 표현과 요구에 차은수가 도로 하얗게 질렸다. 눈망울에 고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런 걸 시킬 수 있느냐고, 못한다고. 연약하고 간절한 거절의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눈치였다.
주청경은 여상하게 말문을 열었다.
“못할 것 같다면 얼마든지 얘기하세요.”
차은수는 도리어 그 태도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주청경에게 두려움을 느낀 스스로에 곧장 심사가 뒤틀렸다. 마음에 안 드네. 저 새끼 심기도 좀 건드려볼까.
……아니다. 갑자기 또 반항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하란다고 자위까지 한 마당에.
“…….”
가늘게 떨리는 손길이 좆을 놓았다. 끈끈하게 젖은 손과 귀두에서 정액이 선을 그리며 늘어지다가 끊겼다.
이내 차은수는 스스로 구멍을 풀기 좋은 자세를 찾아 주춤주춤 엎드렸다. 망설임 끝에 엉덩이 부근으로 손을 옮기는 그를 지켜보며 주청경이 격려했다.
“다칠 수 있으니까 부드럽게.”
말이 쉽지, 시발. 직접 풀어 주는 건 처음이라고. 속으로 주청경에게 욕을 퍼부은 차은수가 조심스레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이윽고 바짝 긴장해서 다물린 입구가 만져졌다. 주청경은 말을 더 얹지 않고 차은수가 부들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흐으…….”
정액이 묻은 중지가 입구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용기를 내어 삽입해 본 차은수는 손가락을 꼭꼭 무는 제 구멍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중지 하나만 넣었는데도 이렇게 씹어 대는데, 그 좆들이 어떻게 들어갔지? 쟤네는 아프지도 않았나……?
새삼스럽게 S급 신체의 튼튼함을 느끼며 안쪽을 느릿하게 저어 보았다. 습하고 따뜻한 점막에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한없이 침범당하고 좆물에 절여지기를 반복했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더 야릇했다.
하나둘 손가락을 늘려 가며 소극적으로 내부를 넓힌다. 작고 보얀 엉덩이 안쪽의 구멍이 제 주인의 손가락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청경은 뻐근하게 당기는 샅을 느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공존하는 긴 숨이 흘러나왔다.
“우읏…….”
차은수는 주청경의 반응을 살필 여유도 없이 그저 본인의 내벽을 휘젓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줄곧 제 옆쪽에 자리 잡고 있던 주청경의 육신을 곁눈질했다.
엷은 갈색 눈동자에 흥분이 어렸다. 슬슬 몸이 달았다. 스스로의 손 따위가 아니라…… 발기하지 않은 상태여도 위협적인, 저 흉물스러운 좆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만.”
마치 그 속내를 눈치챘다는 듯, 철창 밖의 주청경이 명령했다.
“내 위로 올라가요.”
두 사람의 의견이 더할 나위 없이 일치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