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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98)화 (98/115)

98화

에스퍼도 피로를 느끼는 인간이다. 하물며 등급에 맞는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에스퍼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휴식기를 가진 적이 없던 S급들이 돌연 줄줄이 휴가 일정을 공지했을 때,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추론을 펼쳤다. 파장 때문에 기어코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협회장들의 건강 이상설은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떠돌았고, 불안이 야기된 상황을 기회 삼은 이들은 협회장들을 쿡쿡 들쑤셨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알력 조성은 원치 않는다고, 그렇게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민성은 내심 차은혁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에스퍼는 괴물을 잡고, 정부는 생존과 관련된 수많은 대책 강구에 전념하면 된다. 괴물의 습격이 늘고 있는 현재,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집중하는 것만큼 필요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유석헌을 위시한 상부의 생각은 달랐다.

‘에스퍼들이 국가를 괴물에게서 구해 주면, 국가는 에스퍼들에게서 국민을 구해야지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방패들에게서 말입니다.’

진실로 S급들의 폭주를 염려해 그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은신 능력을 지닌 에스퍼 정보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청경의 사저에 잠입해 그를 살펴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휴가로 인해 협회에서 부재중인 이는 주청경이었다. 대다수가 그렇듯 그 역시 사람이라면 사적인 공간에서는 긴장을 풀고 흐트러질 것이다. 가이딩 부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한다면 그만한 수확이 없으리라 여겼을 테다.

하지만 복귀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정보원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돌아오기는커녕 연락조차 없었다. 원인으로는 여러 경우의 수가 추측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두 가지였다.

잠입에 실패해 포획되었거나, 사살되었거나.

“주청경 협회장이…… 사람 목숨을 그렇게 가벼이 여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의원님.”

김민성이 후자를 부정했다. 괴물을 처치해 사람들을 지키는 이가 살인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유석헌이 코웃음을 쳤다.

“모를 일이죠. 적으로 간주했다면.”

“…….”

“그리고 제가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말입니다.”

평범함과 결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티가 나는 법이다. 사람 좋게 웃는 이 가운데서도 뒤통수를 치는 유형이 있지만, 대놓고 풍기는 비정한 분위기대로 사는 유형 또한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상대들을 간파할 수 있게 된 유석헌은 다른 둘은 몰라도 주청경과 장희강만은 남다른 가치관을 지녔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어쩌면 꼭 괴물이 아니더라도 해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김민성은 유석헌의 말을 들으며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찝찝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방금 들은 이야기가 억측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간에 생포든 사살이든 뚜렷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보원의 소속과 목적을 심문하려는 의도나, 사생활을 염탐당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서…….

“…….”

“…….”

들켜서는 안 될 무언가를 들켰을 가능성도 있었다.

***

남자는 뒤집힐 듯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주청경의 가택에 침투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그는 이번 임무는 성공할 가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그다지 해 본 적이 없던 염려였다.

A급이라는 그의 등급은 결코 낮지 않았고 은신 능력 또한 직업 특성상 활동하기에 최적이었다. 또한 협회 소속의 에스퍼들처럼 괴물을 상대해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면에서 쉽지 않은 임무를 여러 차례 겪어 왔다.

그러나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를 대상으로 임무를 수행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강자에게 위축되는 본능이 임무를 실패시킬 가능성이 높다. 정보원은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는 노력을 거듭했다.

‘…….’

바깥에서 지켜본 건물은 창마다 새카만 암막이 쳐져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전체적인 구조를 훑어본 후 가장 외진 창문 쪽으로 접근했다. 단단히 잠긴 창문에 미리 준비해 온 용액을 바르자, 유리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정보원은 침착하게 내부로 숨어들어 갔다. 창고 같은 방을 빠져나가자 긴 복도가 펼쳐졌고, 난간 아래로 1층이 보였다. 켜진 조명이라고는 전혀 없는 캄캄한 실내였다. 암막 때문에 어둠이 더 짙었다. 그는 은신 능력을 쓴 채로 조심스럽게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대한 철창을 목격했다.

‘……!’

넓고 호화스러운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철창은 그 자체로도 기괴했다. 무언가를 가두기 위한 용도임이 확실해 보였다. 검은 창살로 구성된 외관이 그러잖아도 음산한 실내 분위기를 더하게 만들었다. 안쪽에 뭔가 있는 것일까. 등줄기를 훑는 섬뜩함에 정보원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숨 막힐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기척이었다. 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철창 안에 누군가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정보원은 착용하고 있던 고글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이내 근접한 사진 역시 얻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고자 난간을 밟고 선 찰나였다.

‘이건 뭐지?’

차가운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고…….

“……커억!”

눈을 번쩍 떴다.

심한 뇌진탕이라도 겪는 것 같았다.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공처럼 말았다. 더듬어 본 얼굴에 고글은 없었고, 중요한 장비가 들어 있던 슈트 역시 벗겨져 있었다.

주청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성을 듣고 난 이후부터 아무 기억이 없었다.

“그거 정상이에요.”

똑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정보원이 힘겹게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의자 하나에 편하게 앉아 있는 주청경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보원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눅눅하고 침침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하실인 듯싶었다.

“주, 주청경…….”

“내가 그쪽 몸 좀 썼거든.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

정보원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는 탓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청경이 자신에게 빙의를 했다는 말 같은데, 구경이란 건…….

“은신 능력자죠? 쓸 만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요.”

주청경이 온화하게 이야기했다. 정보원은 저를 아는 그에게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다물었다.

“근데 이제 보니 능력이 아까워. 주인이 멍청해서.”

주청경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본인 능력이 맞닥뜨린 상대의 정신을 조작해서 당신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원리라는 걸 생각했어야죠. 그런 능력이 당신보다 정신력이 강한 상대에게 먹히겠습니까?”

“…….”

정보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침묵을 지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품고 온 것이었다. 주청경이 알려 준 사실 역시 고려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내심 운이 좋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지녔던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음……. 뭐, 이미 각오하고 왔나 보네.”

정보원의 반응을 살피던 주청경은 흥이 식은 듯 중얼거렸다.

“왜 왔냐고 묻지는 않을게요. 답은 이미 알겠더라고.”

그는 여태껏 손아귀에 쥐고 있던 물품을 들어 보였다.

“간이 검사기까지 들고 와서.”

둥근 소형 기계는 접촉 중인 에스퍼의 파장 상태를 파악하는 검사기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단하고 신속하게 알아볼 수 있는 기기로, 전투 시 폭주에 이르려는 에스퍼들의 상태를 체크해 보는 용도로도 쓰이고는 했다.

정보원은 주청경의 손안에서 불빛을 깜빡이는 기계를 쳐다보았다.

확인 등급 S. 위험 수치 0.

완벽한 파장 상태를 표기한 화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

정보원이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멍하게 그것을 주시했다. 주청경보다 등급이 낮은 자신도 동급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아서 늘 불만족스러운 가이딩을 받으며 지내 왔다. 파장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면, 저렇게 완벽한 수치를 기록한 경우는 없었다.

검사기가 가리키는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주청경이 본인의 수준에 적합한 가이딩을 받았다는 것.

경악한 표정을 흘끗한 주청경이 기계를 내려다보았다.

“기록이라도 가져갈 생각이었나 본데, 꿈이 크다는 걸 알면서 왜 그랬어요. 명령도 눈치껏 따라야지.”

“수치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정보원은 주청경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다급히 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의식이 끊기기 직전 목도했던 철창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하게 느껴졌던 사람의 기척도.

설마 그 안에 갇힌 존재가…….

“당신 혹시…… 등급이 맞는 가이드를 발견해서, 감금해 두고 있었던 겁니까……?”

에스퍼가 인류를 보호한다면 가이드는 가이딩을 공급해 에스퍼의 파장을 안정시킨다. 에스퍼의 건강과 능률을 보장하는 가이드는 불가결한 존재였고, 그 개체가 희소하기까지 해서 사실상 에스퍼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S급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그 즉시 전 세계가 원하는 대상이 될 게 당연하다는 의미였다. 타국에서는 그를 데려가기 위해, 자국에서는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해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최선을 다해 현혹하려 들 테다. 물론 불법적으로 노리는 세력 역시 넘쳐날 것이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공간에 가두고 가이딩을 착취하는 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눈앞의 상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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