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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112)화 (112/115)

112화

차은수가 사라졌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인지했을 때 심태성은 끔찍한 악몽이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규율을 어긴 특정 인물이 차은수를 데려갔으리라 여겼다. 이성적으로 전말을 따졌더라면 내리지 않았을 판단이었다.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간 존재는 주청경이었다. 살기가 넘실거리는 심태성의 기세에 전투가 시작될 것처럼 팽팽했던 분위기 속. 주청경은 곧 심태성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찾는 겁니까.’

차은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청경의 눈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의 태도에 심태성은 끓어오르던 머리가 오히려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를 혐오하지만, 그만큼 서로가 얼마나 어렵게 동맹을 맺었는지 알고 있었다. 구태여 이제 와 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세력이 차은수를 납치했을 가능성보다는…….

‘…….’

서준호를 한 번만 볼 수 있게 도와 달라던 말이 떠올랐다. 자책감과 초조함에 휩싸인 안쓰러운 얼굴을 앞에 두고서, 감히 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순간이 다시금 뼈아프게 되새겨졌다. 어쩌면 본인의 의지로 빠져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다방면으로 추측해 보아도 결론은 하나였다. 도망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어째서 진작 벗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자연스럽게 뒤따른 의문은 이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당장 우선순위는 무조건 차은수를 되찾는 것이었다.

주청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태성을 향해 악감정으로 그득한 비난을 퍼붓는 대신 차은수를 찾는 일에 가세했다. 심태성이 지목한 병원과 인물을 살피며 빙의한 대상의 정신을 뜯어보았다. 서준호, 그를 담당한 의료진, 병원장, 정부 관계자들을 목격한 사람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상의 생각과 정보들이 그를 목적지로 인도했다.

한 의사의 기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차은수를 보았을 때는 눈앞이 붉어지는 기분이었지만, 늦지 않게 추적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신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아마 이동 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겠죠.”

주청경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누워 있는 차은수의 옆을 지키던 심태성이 조용히 그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치료 능력도 있고, 심지어 해독까지 가능하네?”

무언가 더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헛웃음이 나올 지경으로 다재다능하다. 그냥 다재다능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해독이 절실한 인류가 떠받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오늘 일이 새어 나간다면 온갖 곳에서 승냥이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고도 남을 것이다. S급 가이드라는 사실만으로도 꽁꽁 숨기고 세상에 내보여서는 안 될 존재였건만, 차은수는 예상치 못한 최악의 방식으로 저의 다른 가치를 증명하며 그 모습이 발각되었다.

“근데 힘을 쓰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니까, 결국 붙잡힐 줄 알고 도망은 시도도 못 한 거야.”

주청경이 팔꿈치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심태성은 다시 차은수를 내려다보았다. 탈환될 때보다 훨씬 좋아진 안색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였다. 만약 순순히 서준호를 만나게 해 주었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까.

“그래서.”

깊은 공동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방으로 날아들었다. 구둣발 소리와 함께 장희강이 열린 문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벽에 기대어 있던 주청경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고, 심태성은 그를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장희강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여기서 회의라도 하자고 불렀나?”

고요하지만 날이 선 공기가 느껴진다. 올가미처럼 이어진 경계심이 팽팽하게 서로를 위협했다.

“목숨 줄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죄를 묻는 자리여야 할 것 같은데.”

“……허튼짓하지 마.”

차은혁이 그를 스치며 들어섰다.

살기 어린 눈빛이 장희강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가 있는 곳인데 함부로 그딴 생각을 한단 말인가. 차은수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을 만한 상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침대 위의 동생에게 돌아간 시선에서 살기가 녹고, 걱정과 불안이 들어찼다.

황급히 다가간 차은혁이 심태성의 반대쪽을 차지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손을 조심스럽게 제 손 위에 올린다. 꼴사납다는 듯 그를 흘끗한 주청경이 입을 열었다. 좋건 싫건 그들을 불러 모은 건 자신이었다.

“이쪽과 동급 가이드인 건 밝혀지지 않았지만, 은수 씨의 가치는 이미 그 정도입니다. 아니, 상회했다고 봐도 되겠죠.”

“…….”

“거머리처럼 집요하고 귀찮게 굴 겁니다.”

입매를 비튼 장희강이 차은수를 응시했다. 긴 속눈썹이 눈가를 푹 덮은 채 미동도 없었다. 혈색은 나쁘지 않지만 목이며 손가락이 너무 말라 보였다.

마치 짠 것처럼 하나같이 차은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잔존하지 않는지 의심하거나 파고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우스웠고, 그렇다고 용케 비밀을 감추고 있던 차은수도 깜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꼭 감투가 필요한가 의문이 들더군요.”

주청경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우리가 갑자기 주어진, 협회장이라는 웃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다 은수 씨 때문이죠.”

협회의 대표라는 것은 상당히 편리한 지위였다. 자신과 장희강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에스퍼들을 관리하며 과거의 사욕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차은수를 지키기에 유용했다. 협회장이 갖는 권세를 통해 전 세계의 에스퍼들을 견제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괴물을 처치해서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도 그들만큼 정당한 신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감투 따위가 없어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충분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처럼 일이 벌어진 참에, 몸에 맞지 않는 영웅이라는 옷은 벗어던져도 되지 않을까. 차은수를 노릴 상대 세력을 먼저 붕괴시키고 장악한다면…….

“안 됩니다.”

주청경이 불온하고 과격한 제안을 던지려는 것을 눈치챈 심태성은 입을 열었다. 눈길은 여전히 차은수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원치 않으실 겁니다.”

“누가……. 은수 씨가요?”

주청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경쾌하기까지 한 실소를 터뜨렸다.

“잠깐만요. 여기 있는 에스퍼 중에 은수 씨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 사람이 있습니까?”

감금하고, 멋대로 취하고,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각자의 절박함에 한 사람을 대상으로 이기심을 채운 것은 모두가 같았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 이곳에 없었겠죠. 위선 떨지 마세요, 심태성 씨.”

“…….”

“그냥 우리끼리 공생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 외에 거치적거리는 건 미리미리 치우자고요.”

“과해.”

차은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받아쳤다.

“쓸데없는 일이다. 앞으로 더 주의를 기울이면 돼.”

“아하. 대책이라도?”

명백히 시비를 거는 듯한 어조에도 차은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지켜보는 눈이 하나가 아니면 되겠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주청경의 비소에 금이 갔다. 흠. 상황을 관망하던 장희강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한집 살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래. 보호 수준을 높이려면 못할 것도 없어.”

“미쳤군요.”

한 공간에 있는 당장만 해도 본능에 가까운 살의가 들끓는데, 거주 공간을 합치자는 게 웬 말인가. 주청경은 말도 안 되는 지껄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실 이점 또한 존재함을 알았다.

함께라면 분리될 일이 없다는 것.

사실 차은수와 헤어질 때의 기분과, 차은수가 다른 것들과 생활하는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며 느낄 기분 중 어느 쪽이 더 더러울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었다. 원래는 후자가 확실히 버티기 힘드리라고 여겨 차은수의 안위를 나누어 맡았지만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히려 이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청경은 애매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

심태성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본인들이 차은수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고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한다. 단지 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논의를 이어 가고 있는 이 과정이 대단히 비윤리적으로 느껴졌다.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래 왔듯이 그 또한 동참했다.

“그리고, 다들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듣고도 차은수에게 눈먼 괴물들의 태도가 변함없다면, 목숨이 달린 갈등을 불사하고 매사를 중재할 의도로.

***

뭐……? 인간의 육체로 권능을 과용해서 부작용이 발생한 거랬던가.

피투성이로 기절할 때는 열받아서 욕을 하긴 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면 이해를 못 할 것도 없겠지 싶었다. 한마디로 권능이 마음 놓고 쓸 양은 되지만, 마음 놓고 쓸 수는 없다는 뜻이었겠지. 몸이 한낱 인간이라서. ……존나 친절한 시발 블루.

평생 없던 안구 건조증이 생긴 것처럼 눈이 뻑뻑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은 움직일 수나 있을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속은 타는 듯이 쓰리고 목구멍도 심각하게 따끔거렸다. 겨우겨우 손끝을 움찔대며 눈꺼풀을 들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나를 살피는 누군가의 형체가 아른거린다.

“은수야.”

조금 떨리는 저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시원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 뺨을 감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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