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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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얌전히 슈퍼카를 타고 길을 가고 있는 저에게 누군가가 창을 열고 휘파람을 불며 시비를 걸었다. 열등감에 찌든 양아치 새끼들이 종종 비싼 한정판 차를 보면 시비를 걸 때가 있기에 권태정은 가볍게 그 시비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상대가 급발진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양아치는 권태정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차를 스치기라도 할 것처럼 위협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왕 참은 거 한 번 더 참았으면 좋았겠지만, 권태정은 참지 않았고, 도망가는 그 차를 쫓아갔다. 삼십 분이나 집요하게, 수백 대의 차 블랙박스에 찍히도록. 그게 전부였다.
그 일로 권태정은 쏟아지는 블랙박스 제보와 함께 뉴스를 탔고, 동시에 태성그룹이 뒤집혔다. 그대로 회장실로 끌려 가 누나, 형과 함께 ‘재벌 2세의 아찔한 질주’라는 타이틀로 보도되는 뉴스를 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깨졌다. 무려 막내아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로 유명한 아버지에게.
“그냥 씨발, 죽여 버릴걸.”
끝까지 가서 콱 박아 죽이거나 재벌에게 대들어 죄송하다고 연기하던 그 뺨이라도 올려붙였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권태정은 생각할수록 빡치는 그날의 일을 머릿속에 채운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씨발, 씨발. 진짜 존나 씨발.
이럴 때는 힘들어 뒈지겠다는 생각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운동을 하는 게 최고였다. 원래라면 아래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탁 트인 전망을 보며 뛸 텐데 얼굴이 대대적으로 더 팔린 만큼 당분간은 필요 이상의 외출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자숙한다더니 운동하고 있더라는 말이 굳이 인터넷에 퍼지게 할 이유는 없었다.
집, 철거촌, 집, 철거촌 반복이나 해야겠다 생각한 권태정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일단 부엌으로 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습관처럼 억제제를 두 알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이런 걸 먹지 않아도 페로몬 조절이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만, 때때로 제어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러트가 오기 전이나 미친 듯이 화가 날 때는 평소와 똑같이 제어를 해도 페로몬이 엄청 강해져서 그런지 완전히 가둬지지가 않았다. 억제제는 그런 순간들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 장치였다.
아침이라 살짝 불안정하던 페로몬이 천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 뒤에야 권태정은 운동기구들이 있는 2층으로 계단을 올랐다.
탁 트인 유리벽 쪽에 놓은 러닝머신 위에 오른 권태정이 적당한 속도로 걸으며 몸을 풀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데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탓에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한 시간 정도만 뛰고 씻을 생각이었다.
걷기에는 무리인 속도까지 올린 권태정이 그리 힘들지 않게 달리며 러닝머신 위에 둔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아빠’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네, 회장님.”
-오늘부터 다람동으로 출근하지?
“네.”
-출근하기 전에 잠깐 들러.
“어디로?”
-집. 아침 먹고 가.
“나 아빠랑 아직 같이 밥 먹을 기분 아닌데.”
-까불지 말고.
“네, 네. 여덟시까지 갈게요. 삼십 분만 뛰고.”
-조심하고.
제가 억울한 입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를 혼내고, 실장 자리까지 없애고, 철거촌으로 보낸 아빠에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권태정은 아빠를 사랑했다.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누나와 형이 기겁을 하는데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그리고 저를 걱정하며 아침부터 먼저 전화를 건 아빠의 목소리에 안 좋던 기분이 반쯤 괜찮게 풀릴 만큼. 그래서 권태정은 금세 괜찮아진 기분으로 러닝머신 속도를 더 높였다.
* * *
권태정의 본가, 그러니까 회장인 아버지와 사장인 첫째 누나, 부사장인 형이 같이 사는 집은 권태정의 집에서 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워낙 집이 넓고 좋아 세대 분리가 완벽하게 되는 집이라 굳이 독립할 필요가 없었지만, 홀로서기를 해 보고 싶은 마음에 한 독립이었다.
“막내 도련님, 오셨어요?”
“네, 여사님. 회장님께서 같이 아침 먹자고 하셔서 왔어요. 저도 아침 좀 주세요. 독립하고 제일 아쉬운 게 우리 여사님 밥 못 먹는 건데 간만에 먹겠네요.”
“잘 오셨어요. 회장님께서 우리 막내 도련님 안 계시니까 적적하신가 봐요.”
“누나랑 형 있는데요, 뭘. 그리고 저 없어서 적적하신 분치고는… 너무 쥐 잡듯 잡던데요.”
“어휴, 그거야 속상해서 그러신 거죠.”
“다 커서 부모 속이나 썩히고 저 어쩌면 좋아요.”
커다란 몸까지 숙여 가며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들과 대화를 나누던 권태정이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몸을 돌려 저에게 다가오는 누나와 형을 바라보았다.
“막내야, 너 얼굴이 그게 뭐야. 너 억울하다고 굶으면서 시위한 거야?”
“자숙 중인데 얼굴 좋으면 안 되잖아.”
“그래도 잘 챙겨 먹고 다녀. 아버지 보시면 속상하셔. 너 억울한 건 우리가 다 아니까 맘 풀고. 언론은 이제 잠잠해질 거야.”
“언론이 잠잠해지든 말든 그딴 건 상관없는데 다람동인지 다람쥐인지 거기 사무실이 너무 후져. 뭔 시뻘건 컨테이너를 가져다 놨다니까.”
뭔지 알겠다는 듯 웃은 권태정의 누나, 권유정이 턱을 괴고 맞은편에 앉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막내에 대한 귀여움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전에 가 봤어. 눈에 뜨이긴 하더라. 여름에는 엄청 덥다던데 조심해.”
“여름 되기 전에 나와야지. 6월에 철거라며.”
“아, 그렇지. 다행이네. 뭐든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응.”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하는 누나를 보며 권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비난하고, 약 올리는 사람들만 보다가 제 편을 들고, 억울함을 알아주는 가족과 마주하니 그래도 숨통이 좀 트였다.
“대충 자료 보니 그 방송만 더 안 나가게 조심하면 될 것 같더라. 내 친구가 그 방송국 다니잖아. 슬쩍 물어보니까 후속 보도 하고 싶어서 열심인 것 같더라고.”
“안 그래도 어제 백 비서한테 들었어. 거기 어린애 하나 있던데. 걔로 후속 보도하고 싶어 한다고.”
“아, 맞아. 제대로 이슈 될 것 같다고 공들이나 보더라. 얘기 만들기 딱 좋잖아. 철거촌에서 이주비 사기당해 몸져누운 할아버지, 협박하는 사채업자. 그 대신 빚 갚는 손자. 그리고 그런 불쌍한 주민들을 내쫓으려고 압박하는 악덕 기업.”
권태정은 형 권기정의 말에 몸을 의자 뒤로 기댄 채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자극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확실히 방송을 타면 재미가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물론 그게 제 일이니 문제가 되는 거지만.
“듣기로는 얼굴 더 알려지는 게 싫다면서 거절하고는 있다던데 솔직히 마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 방송사에서 모금해 준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이제 스물 된 어린 친구라 언론의 파급력이 얼마나 센지 누구보다 잘 알거고….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요즘은 몇 초 만에도 폭로하려면 다 하는 세상이잖아. 마크하기 쉽지 않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형. 내가 설마 그런 어린애 하나 내 맘대로 못 할까.”
“그래, 알지. 우리 막내 잘할 거야. 말재주도 있고, 수완도 좋고 맘먹으면 뭐든 해내잖아.”
누나와 형이 조언과 함께 응원을 건네는 것에 웃은 권태정이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굿모닝.”
“그래, 굿모닝이다.”
자리에 아버지가 앉은 뒤에야 착석한 권태정은 앞으로 놓이는 밥과 국을 보다가 저를 빤히 보는 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오늘부터 새로운 일하는데 밥이라도 든든히 먹고 가라고 불렀다. 쉬운 일 아니니까 신중하게 진행하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네, 이제 안 그래요. 참고, 또 참고 누가 지랄해도 참고, 참는다고 지랄해도 또 참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많이 참았다 싶을 때 한 번 더 참고, 성질 좀 죽이고, 어려운 일 생기면 유정이랑 기정이한테 말하고.”
“네….”
순순히 대답하는 막내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회장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권태정은 아버지가 국을 한 번 떠 드시는 것을 본 뒤에야 하얀 밥을 입에 조금 넣었다. 와인 몇 잔만 마시고 쫄쫄 굶다가 이틀 만에 먹는 밥이라 그런지 입 안이 까끌했다.
“철거 진행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나가면 원래 자리로 복귀하게 해 줄 테니까 3개월 동안 주민들 아무 불만 없이 내보내고, 철거할 수만 있게 만들어.”
“네, 걱정마세요.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한 번만 더 방송에 나오면 그땐 재개발이고 뭐고 다 물거품 되는 거 명심하고.”
“뭘 그렇게 자꾸 겁을 주고 그러세요. 지금처럼 조용히 3개월만 보내면 되는 걸 가지고.”
샐러드에 든 사과 조각을 하나 들어 입에 넣은 권태정이 걱정스럽다는 듯 보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과 함께 3개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 * *
빨간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간 권태정은 상쾌한 냄새가 나는 것에 만족하며 눈으로 대충 안을 둘러보았다. 조폭 새끼들이 모여 가죽에 담배나 비벼 끌 것 같던 소파와 줘도 안 쓸 테이블 같은 것은 전부 싹 사라지고 밝은 톤의 가구가 통일감 있게 놓여 있었다.
“백 비서님,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야 좀 있을 만하네요.”
“제가 뭐 한 일이 있나요. 청소하시는 분들께서 고생하셨죠.”
“그 거지 같은 냄새만 안 나도 살겠네. 아, 근데 침대가 없네?”
“네?”
“휴가지 숙소에 침대는 기본이잖아요.”
“아…. 준비하겠습니다.”
“농담이에요. 있으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농담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 백 비서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컨테이너를 한 번 느릿하게 둘러보다가 다시 제 옆으로 온 권태정을 보고 섰다.
“조합장님을 비롯한 조합위 분들께서 실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시는데 자리 만들까요?”
“뭐 자리까지 만들 필요 있나요. 조합 사무실도 이 안에 있을 거 아냐. 이따 그냥 대충 얼굴만 보고 인사하는 걸로 끝내죠. 뭐 내가 그쪽 일에 관여할 것도 아니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조합 사무실 방문 하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어, 그 전에 그…. 이름이 뭐더라. 그 어린애.”
“아, 연이겸 씨요.”
“아, 맞다. 이겸이. 지금 집에 있으려나. 인사 좀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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