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4화 (4/174)

#04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말에 조금 당황한 백 비서가 가만히 그다음에 이어질 권태정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잖아요.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마크하려면 인사라도 해서 얼굴도 익히고, 뭐 오며가며 얘기도 좀 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가 너무 나대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백 비서가 열어 주는 문 밖으로 나간 권태정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며 백 비서에게도 한 대를 권했다.

“괜찮습니다.”

“아, 진우야. 그냥 편하게 하자. 어차피 둘밖에 없잖아. 생각해 보니까 회사도 아닌데 굳이 실장님, 비서님 이럴 필요 있나 싶네. 남 볼 때만 하고,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하자. 정말 안 피울 거야?”

“…난 나중에. 아침에 본가 들렀다 왔다고? 회장님 아직도 화나셨어?”

“화는 아니고 기대와 걱정의 혼종이지 뭐. 골칫거리 다람동 철거 내가 무사히 진행시켜서 화려하게 복귀하기를 기대하시는 마음 반, 경거망동해서 뉴스 한 번 더 타고 그냥 다 조질까 봐 걱정하시는 마음 반.”

기대와 걱정의 혼종이라는 말에 웃은 백 비서, 백진우가 태블릿PC 화면으로 주소를 확인하고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연기를 뱉으며 들어간 권태정은 군데군데 창이 깨지기도 하고, 또 대문이 반쯤 부서지기도 한 집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귀신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분위기였다.

“여기야. 연이겸 씨랑 연규학 씨 집.”

“아, 예의 없게 빈손으로 왔네. 가정교육 못 받은 줄 알겠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인 권태정이 벨을 누르려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벨은 달려 있지 않았다. 권태정은 어쩔 수 없이 가볍게 주먹을 쥐어 정중히 대문을 똑똑 두드렸다.

“…….”

듣지 못한 건지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것에 권태정은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낡은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울리자 그제야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대문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반쯤 남아 짧아진 담배를 입에서 빼내어 바닥으로 버렸다. 그리고 구둣발로 짓밟아 완전히 불씨를 꺼뜨렸다.

“…누구세요?”

드디어 들리는 목소리에 권태정은 슈트를 여며 잠그며 여상한 목소리를 냈다.

“새로 이사 와서 인사드리러 왔는데요.”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다 무너져가는 곳, 그것도 3개월 뒤에 완전히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곳에 누군가가 새로 이사를 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꽤 긴 텀을 두고 들려오는 대답에도 의문이 묻어 있었다.

“…이사요?”

“네. 인사를 꼭 좀 드리고 싶어서요.”

잠시 조용하던 안에서 뭔가가 달칵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무거운 대문이 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너무나도 명백한 경계심과 함께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사진으로만 봤던 소년의 눈이 보였다.

권태정은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상체를 숙여 열린 틈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녹슨 대문에서 나는 쇠 냄새와 담벼락의 이끼 냄새, 그리고 낡은 집과 골목의 쾨쾨한 냄새 사이로 뭔가 새콤하고 달콤한 향이 살짝 스쳤다. 잠시 그 향에 멈칫한 권태정이 다시 눈을 맞춘 채 웃음 지었다. 누구든 보자마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웃음이었다.

“안녕하세요.”

“…….”

“저 오늘 컨테이너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거든요.”

“…컨테이너요?”

“네. 빨간 컨테이너. 아시죠? 완전 여기 다람동 랜드마크던데.”

당황과 혼란으로 흔들리는 소년, 이겸의 눈을 보던 권태정이 그대로 대문을 잡아 바깥으로 활짝 열었다. 잡고 있던 문이 확 열리는 것에 놀란 이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 권태정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사진이 얼굴을 다 못 담았네.”

“…네?”

“아냐. 실례 좀 할게.”

예의 차려 인사하는 놀이는 끝났다는 듯 표정과 태도를 바꾼 권태정이 그대로 거침없이 대문을 넘었다. 골목을 걸어오며 본 집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집이었다. 낡고, 좁고, 지저분해서 도대체 여기에서 어떻게 사나 싶었다. 뭐 물론 제가 사는 게 아니니 상관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구신데 함부로 집에 막… 들어오셔서….”

“새로 온 주민이라니까.”

“…나, 나가 주세요. 안 나가시면… 신고, 신고할 거예요….”

신고라는 말에 대문 밖에 있던 백 비서가 발을 구르다가 조심스럽게 대문을 넘어 이겸의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저희는 재개발 건을 맡게 되어 오늘 새로 온 사람들이고…. 이 분은 실장님이신데요. 주민분들과 더 가까이,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하셔서 오신 건데 놀라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 네….”

백 비서가 상황을 수습하는 사이 방문까지 슬쩍 열어 안을 본 권태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좁은 방 안에는 할아버지가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 있고, 그 옆에는 밥과 반찬 두 가지 정도가 놓인 작은 밥상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막 들어오시는 건 좀….”

문을 닫고 다시 이겸의 앞으로 와서 선 권태정이 다시 상체를 숙여 이겸과 눈을 맞췄다. 가까이 다가가자 또 그 새콤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깐 착각이라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같은 향이 또 나는 것에 권태정은 저도 모르게 제 페로몬을 살짝 풀어 보았다.

분명히 어제 본 비고란에는 베타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얘기를 했었던 기억이 났다. 정말 베타라면, 지금 제가 푸는 페로몬을 백 비서처럼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제가 이제 나가 봐야… 해서….”

새콤하고 달콤한 복숭아 같은 향이 조금 더 짙게 퍼지기 시작했다. 권태정은 이겸의 빨개진 귀 끝과 손끝, 그리고 여전히 약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아주 약간 더 짙어진 페로몬과 마주하며 아주 재밌는 것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아, 뭐야. 얘 오메가네.

물론 평범한 다른 오메가와는 조금 반응이 달랐다. 일반 오메가였다면 우성알파인 제 페로몬에 갑자기 노출됐을 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아래가 젖기 시작할 거고, 이성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들어 저에게 매달렸을 텐데 이겸은 반응이 달랐다.

페로몬 발산도 무척 약하고, 또 제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 정도도 무척 약했다. 보통의 일반 알파라면 이겸이 오메가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성인 저는 일반 알파와는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권태정은 저에게 뭐라 말하는 이겸을 보며 몸을 바로 세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더워?”

“…아니요….”

아니라고는 하지만, 뺨이 살짝 상기된 게 보였다.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오메가가 왜 베타로 둔갑해 살고 있는지, 또 처음부터 이랬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 그렇게 된 건지도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페로몬도 더 풀고, 손도 좀 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함부로 굴면 엇나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은 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 자극에 갑자기 마음을 바꿔 ‘태성그룹 삼남, 이번에는 사생활 침해!’라는 타이틀로 방송국에 제보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페로몬을 갈무리한 권태정이 천천히 안정되며 다시 페로몬 향이 아주 약해지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향은 다시 약해졌지만, 아직도 뺨과 귀는 상기되어 있었다. 아래가 젖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물론 알파가 오메가의 페로몬에 끌리고, 흥분하게 되며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만, 어릴 때부터 다른 사고는 다 참고 수습해 줄 수 있어도 오메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권태정은 물론이고, 권유정과 권기정도 늘 오메가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고작 오메가 페로몬 하나에 달려들 만큼 인내심이 약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우성알파로 살며 수도 없이 많은 오메가들을 접했다. 굳이 페로몬을 노출하지 않아도 우성알파가 가지는 본질적인 체향 하나만으로도 달려드는 오메가가 많았다.

노골적으로 섹스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버리고 한 번만 박아 달라고 침을 질질 흘리며 매달리는 사람도 수도 없이 보았다.

자존심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권태정에게 그런 오메가들은 전혀 흥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고작 실체도 없는 페로몬 따위에 미쳐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이 너무 불결하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될 그 사람의 가장 추한 밑바닥과 마주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겸은 달랐다. 대놓고 제가 페로몬을 흘려도 무너지지 않고 고작 뺨이나 붉히고 있었다. 그래서 권태정은 그런 이겸이 궁금했다. 지겹게 봐 온 오메가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연이겸이.

“미안,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치솟는 궁금증과 낯선 불순함을 짓누르고 달래듯 말하자 그래도 살짝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권태정은 싱긋 웃으며 대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안에 있는 이겸을 보며 친한 것처럼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다음에 봐.”

권태정을 따라 밖으로 나간 백 비서도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겸은 백 비서에게만 똑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권태정에게는 인사하지 않았다. 똑같이 손을 흔들 수도 없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저를 보는 이겸에게서 시선을 거둔 권태정이 제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달라붙는 약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마주했다가는 그대로 달려가 구멍이 젖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른 오메가들에게는 한 번도 든 적이 없는 생각이 연달아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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