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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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대범 그 새끼가 너 못 보게 숨겨도 줬고, 만나지 말라는 것도 들어줬잖아. 그럼 너도 나한테 뭐 하나는 해 줘야지.”
“…….”
장난인가 싶어 본 얼굴은 의외로 차분하고 진지했다. 놀리는 것도 또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닌 것 같은 표정에 조금 위축된 이겸이 괜히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는 손끝을 만지작댔다.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할게요.”
“정말?”
“네.”
“내가 하라는 건 뭐든 다 할 거야?”
“…다는 아니고… 들어 보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면요.”
뭔지 듣기도 전에 뭐든 다 하겠다고 말할 만큼 저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저를 보며 웃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작게 한숨 지었다.
“이상한 거 안 시킬 거니까 한숨 쉬지 마.”
“…….”
“그냥 나랑 석 달만 놀아 줘. 그거면 돼.”
이겸은 놀아 달라는 권태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는 게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매일 바빠 조금의 여유 시간도 없는 이겸은 놀아 달라는 말의 뜻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야. 내가 컨테이너 사는 동안만 좀 놀자고. 심심하니까.”
더 설명할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남자가 말하는 석 달의 의미는 알겠는데 놀아 달라는 말은 여전히 너무 어려웠다.
저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반대쪽 입장에 서 있는 깡패 실장이 도대체 왜 저한테 놀아 달라고 하는 건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매일 해서 시간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 시간만 나면 되는 거네?”
“네?”
“시간은 내가 만들게. 걱정하지 마.”
이겸은 권태정의 말을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오늘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오늘 일은 언제 끝나?”
“…행사 다 끝나고 뒷정리도 해야 하고…. 아마 자정이나 돼야 끝날 것 같아요.”
“이거 하면 얼마나 받아? 한 백 받나?”
“…백이요? 백만 원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돈이 많은 깡패라 그런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전에 있던 용역 실장도 술자리를 한 번 가면 몇백은 그냥 쓴다던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렇게 방탕하게 살다 보니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백만 원쯤은 아무것도 아닌 우스운 돈이 된 모양이었다.
“…십오만 원 받아요. 다른 데보다 더 많이 줘서.”
“십오만 원?”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얼굴을 보며 작게 한숨지은 이겸이 여전히 제 앞을 막고 선 권태정을 향해 조금 가까이 다가섰다.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권태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가까이 다가온 이겸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기만 했다.
“아까처럼 붙어 있는 게 좋아? 말을 하지.”
위협적일 만큼 큰 키와 몸이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앞으로 다가왔다. 이겸은 그대로 밀려 기둥 옆 오목하게 파인 공간으로 다시 처박혔다.
아까처럼 제 몸을 뒤덮어 누르는 남자의 온기와 기분 좋은 향에 이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 지나치게 가까운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나가려고, 나, 나가려고 그런… 거예요. 일하던 중이라…. 컵 깬 것도 치워야 하고….”
“그 돈 내가 줄게. 나랑 집에 가자.”
“…일 아직 안 끝나서 안 돼요…. 제대로 마무리 못 하면 이런 좋은 일 다시 안 들어와요….”
“들어오게 해 줄게. 그리고 만약에 안 들어오면 그 돈도 내가 다 줄게.”
“…그, 그만….”
남자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밀착한 이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까처럼 또 손과 귓가, 그리고 남자와 닿은 몸에 약한 열이 도는 느낌이 났다.
“아….”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 때문에 자꾸만 생각이 흐트러지고, 밀착한 게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조금 더 깊게 밀착하는 남자의 어깨에 입술을 누르며 잘게 몸을 떨었다.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권태정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그런 이겸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싼 권태정이 느릿하게 쓰다듬어 내리다가 가느다란 목덜미를 쥐었다. 순간 이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 저…. 진짜 일하러 가야 해서요.”
“구대범 아직 이 홀 안에 있는데 괜찮겠어?”
“…….”
“모르는 모양인데 쟤 오너 일가야. 여기 회장 친형의 아들. 그래서 아마 끝까지 있을걸.”
이겸의 눈동자가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대단한 재벌가의 가족이었다니 구대범이 한층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일은 다음에 저 새끼 없는 데에서 해. 오늘은 나랑 가고. 응? 내가 또 도와줄게.”
“…….”
“착하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 때문인지 남자에게서 나는 좋은 향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구대범이 무서워서인지 더는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겸은 여전히 저를 압박한 채 눈을 맞추는 권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만 더… 부탁드릴게요.”
“말 잘 알아먹어서 좋네. 예뻐.”
권태정의 싱긋 웃는 얼굴을 본 이겸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몸을 피하고 싶어도 사방이 다 막혀 남자에게서 조금도 멀어질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하든 가만히 있어. 그럼 안전하게 여기서 빼내 줄 테니까.”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것 같기도 한 이겸의 얼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권태정이 그대로 몸을 떼며 돌아섰다. 그제야 숨을 작게 내쉰 이겸이 남자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
와인과 음료가 든 트레이를 들고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아 와인을 고른 권태정이 다시 몸을 돌려 이겸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이겸의 유니폼에 와인을 쏟아부었다.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놀란 이겸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하얀 유니폼이 붉은 와인으로 물들어 엉망이 되었는데도 권태정은 웃기만 했다.
“아, 미안. 실수.”
절대 실수일 수 없는 행동을 한 권태정은 천연덕스럽게 실수라 말하며 어딘가를 보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겸은 권태정의 곁으로 다가오는 다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에 같이 집에 온 적이 있는 그 남자였다.
“어? 연이겸 씨?”
“…안녕하세요.”
얼결에 인사한 이겸은 괜히 와인으로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손으로 가리려 애썼다. 물론 권태정이 남긴 붉고 큰 흔적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 비서님. 제가 실수를 좀 했어요. 직원분 지나가시는 걸 못 보고 부딪혀서 와인도 쏟고, 잔도 깨지고.”
“네?”
“스토리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전 이분한테 사과도 드릴 겸 철거촌 데려다주고 집에 갈 거니까 백 비서님이 여기 뒤처리 좀 해 주세요. 뭐라더라. 그…. 여기 일 마무리 못 한 거 소문나면 뭐 다른 일 안 들어온다니까 그런 일 안 생기게 그냥 다 제 탓인 걸로. 뭐 더 설명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잘 처리하겠습니다.”
역시 저와 오래 일을 해서 그런지 척하면 척인 백 비서를 보고 웃은 권태정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정말 우리 백 비서님 안 계시면 어떻게 사나 몰라.”
“…징그러운 말씀 그만하시고 얼른 가 보세요, 실장님.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와인 뒤집어쓴 직원이랑 같이 있는 거 말 만들기 딱 좋은 상황이잖아요.”
“아, 맞아. 나 요즘 이미지 안 좋지. 그럼 전 먼저 들어갈게요. 수고 좀 해 주세요.”
권태정은 백 비서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오도카니 선 이겸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얼마나 가느다란지 완전히 감싸 쥐었는데도 손가락이 남아 겹쳐질 정도였다.
“아파?”
“…조금요.”
시선을 내려 권태정이 쥔 손목을 바라보던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완전히 들어간 것 같지도 않은데 손목이 조금 아팠다.
“나 진짜 살살 잡은 건데.”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내려 이겸의 손을 감싸 쥔 권태정이 가자는 듯 조금 힘을 주어 앞으로 당겼다. 이겸은 남자의 손안으로 사라진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속을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가자, 이제. 여기 너무 답답해.”
권태정이 기둥을 벗어나 걷기 시작하자 이겸의 발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다들 보는데 손을 잡고 가는 게 부끄러워 놓으려 했지만, 악력이 얼마나 센지 도저히 맞물린 손가락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겸은 꼼짝없이 남자에게 잡힌 채 반쯤 끌려가듯 연회장을 가로질러 문을 나섰다. 조용한 홀 바깥을 걷고,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남자는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저기 손….”
“왜? 도망가게?”
“…도망 안 가요….”
“그래도 안 놔줄래.”
“…아파요….”
“알아. 세게 잡았으니까 아프겠지.”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또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다. 이겸은 권태정이 꽉 쥔 손가락을 조금이라도 풀려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간지러워.”
저는 아픈데 간지럽다는 권태정의 말에 힘이 쭉 빠진 이겸이 저항을 포기하자 그제야 손에서 힘이 조금 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겸은 한결 편해진 느낌과 함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소한 움직임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가장 깊은 층에 다다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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