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25화 (25/174)

#25

“아직 안 식었는데 뭐.”

“커피로 할까 하다가…. 밤이라 못 주무실 것 같아서요. 저희 카페에 다크초콜릿으로 하는 핫초코가 있는데 그건 많이 안 달거든요. 그래서 그걸로 만들어 봤는데….”

“아, 다크라서 별로 안 달구나.”

그냥 쉽게 마시기 좋을 만큼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신 권태정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고마워.”

씩 웃는 얼굴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던 이겸의 고개가 아래로 확 숙어졌다. 이번에도 목덜미에 열이 오른 채였다.

“…다행이에요.”

“이건 가면서 마셔야겠다. 타.”

이겸을 차에 태운 권태정이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운전석에 올랐다. 상대를 무안하지 않게 하려 억지로 마셔 주는 게 아니라 정말 한 모금씩 마시기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단맛보다 쌉싸름한 맛이 더 강해 훨씬 좋았다.

“번호 좀 알려 주라.”

“…….”

“아까 늦는다고 전화하려고 하는데 번호를 모르더라고. 그래도 3개월 동안 서로 번호 정도는 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권태정은 제 휴대폰을 꺼내 이겸에게 내밀었다. 이겸은 어색하게 화면을 터치해 유심히 보다가 전화기가 그려진 버튼을 눌렀다. 숫자 키패드가 나오는 것에 그제야 살짝 긴장했던 마음이 놓였다.

화면을 터치하는 휴대폰을 써 본 적이 없어서 평소에도 휴대폰으로 결제를 하거나 쿠폰을 쓰고 싶다며 휴대폰을 내미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번호 눌렀어요….”

“통화 버튼 한 번만 더 눌러 줘.”

아래로 보이는 연두색 원 안에 전화기가 그려진 버튼을 누르자 전화가 걸렸다. 이겸은 제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폴더 겉 작은 화면에 뜬 권태정의 번호를 바라보았다.

“저장해 놔. 나 필요할 땐 연락하고. 언제든 해도 돼.”

“네….”

권태정이 필요할 때. 그럴 때는 언제일까. 이겸은 권태정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보며 제 휴대폰에 ‘실장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권태정의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홀더에 넣었다. 그 옆 칸에 있는 제가 준 핫초코를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 크림처럼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거 하나 마셔 준 게 도대체 뭐라고 그러는 걸까.

“대답은 잘하네. 안 할 거지? 전화.”

“…도움 필요할 때 있으면 할게요. 그런데 3개월 안에 도움 필요할 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아, 하긴. 시간제한이 있지. 그럼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을 때 할래. 전화 잘 받아.”

“…네.”

“내일은 뭐 할래?”

이겸은 권태정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 무슨 아르바이트를 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있어도 그 외에 내일 뭘 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시간 잘 가는 거로.”

“…잘 모르겠어요. 해 본 게 많이 없어서…. 그런데 내일도 만나는 거예요?”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제가 잘 아는 것도 없고, 또 일해야 할 시간에 일을 안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서요….”

“나랑 노는 걸 일이라고 생각해. 3개월은 일 안 끊기게 해 줄 테니까. 음, 더 정확히 할까? 시급 십만 원씩 쳐줄게. 나랑 다섯 시간 있으면 오십, 열 시간 있으면 백. 종일 같이 있으면 이백사십.”

“…말도 안 돼요.”

“진심인데. 이런 거 물어도 되나? 빚 있다며. 남은 빚이 얼마야?”

“…삼억 정도요….”

“어르신 통이 크시네.”

“…일억 오천 정도 빌리셨는데… 이자를 못 갚아서 쌓이다 보니까 늘어났어요.”

“구대범 진짜 돈 쉽게 버는구나. 씨발, 난 철거촌에 처박혀 있는데 누군 이자 놀이나 하고 팔자 좋네.”

삼억이라는 돈은 저에게는 그리 큰돈이 아니지만, 이겸에게는 정말 어마어마한 돈일 것이었다. 하루 종일 일해 돈을 벌고, 한 달 내내 동물 탈을 쓰고 뛰어다녀도 이자조차 제대로 갚을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갚았다가는 앞으로 빚만 더 늘고,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정말 시간당 십만 원씩 쳐 줄게. 카페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나랑 있어.”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예요?”

“내 일에는 네가 필요한데, 넌 돈이 필요하고, 난 마침 돈이 많으니까 돈으로 네 시간을 사는 거지.”

“실장님 하시는 일에 제가 왜… 필요한지 알고 싶어요….”

네가 방송에 나가도 안 되고, 관련 있는 사람들을 접촉해도 안 되니까. 솔직히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까지 다 말해 버리면 왜 접촉해도 안 되는지 물을 거고, 그럼 제 신상에 대한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커 권태정은 말을 아꼈다.

“그냥. 얌전히 곱게 나가게 하고 싶어서?”

“…….”

“구대범이 못 채가게 감시도 하고.”

“그게 무슨….”

“그 새끼 보통 새끼 아니야. 돈 되는 일이면 뭐든 다 해. 지금이야 보는 눈이 있어서 그냥 두지만, 그게 오래 가진 않을걸. 그 새끼가 철거촌에서 사고라도 치면 씨발, 그거 내가 다 독박 쓴다고.”

구대범이 무척 거칠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이겸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잠들기 전이면 가끔 저에게 신체 포기 각서를 들고 웃으며 다가오던 얼굴이 떠오르고는 했다. 거기에는 돈을 갚지 못하면 신체의 소유권이 구대범에게로 넘어가 그 신체를 어떻게 사용하든 자유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자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다음에는 여기에 사인하게 될 거라고 웃던 구대범은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이겸이 방송에 나와 방송국 사람들과 세간의 집중을 받게 되며 주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겸은 권태정의 말대로 그 효과가 오랫동안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종이를 가지고 저에게 올 게 뻔했다.

“구대범이 얌전히 너한테 돈이나 갚으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그 새끼 돈 안 갚으면 여기저기 다 팔아먹는 놈이야. 그게 장기든, 가족이든, 몸이든.”

“…저한테도 그런 이야기 하기는 했었어요. 오메가가 아니라… 아쉽다고 하면서.”

“아… 그렇지, 참. 오메가가 아니지.”

저야 우성알파라 아주 약한 오메가의 페로몬까지 감지해 이겸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구대범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베타라면 당연히 알 수 없을 거고, 알파라고 해도 우성이 아닌 이상 저렇게 약하고, 체향처럼 느껴지는 페로몬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권태정은 그때 잠깐 만났던 구대범을 떠올리려 애썼다. 알파였나? 아님 베타? 기억해 보려고 해도 아예 신경을 안 썼더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 오메가가 아니니까….”

네가 오메가인 걸 모르니까. 돈이 되면 가차 없이 사람도 매매하는 구대범이 왜 이겸을 두고 보기만 하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메가인 것을 모르니 얼굴 하나만 보고 팔아넘기기에는 메리트가 떨어진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가만히 두자니 얼굴이 아까워 이겸의 거취를 다시 한번 고민하려는 찰나 이겸이 우연히 방송을 타 얼굴이 알려지게 되며 구대범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나대다가 방송을 타게 되면 본인의 로열 캐피탈은 물론 대국물산까지 싸잡혀 들어갈 거고, 그랬다가는 구 씨 일가가 뒤집힐 게 분명했다.

아, 그랬으면 재밌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이제 다시 슬슬 고개를 들고 지랄하기 시작하는 그 재수 없는 낯짝을 떠올린 권태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여튼 존나 병신 같은 새끼.

“아, 너 말고 구대범.”

저한테 욕을 한 건가 싶어 바라보는 이겸에게 웃으며 아니라고 한 권태정이 침울해진 이겸에게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매만졌다. 어깨가 움칠대는 게 느껴졌지만,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겸도 마찬가지로 권태정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난 제발 3개월 동안 아무 일도 없이 존나 지루하더라도 다람동이 조용했으면 하거든? 그러려면 네가 날 도와줘야 돼.”

“어떻게….”

“구대범이 너한테 지랄 못 하게 해 줄 테니까 넌 나랑 있어.”

“…….”

“다람동 조용히 무너지게 해 주는 대가로 아까 말한 시급 줄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야. 조용한 철거. 거기에 네 안전은 덤.”

밤길을 빠르게 달린 차가 철거촌 안으로 들어섰다. 이겸은 차가 골목 앞에 설 때까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남자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너무 도박처럼 느껴졌다.

원래 인생에 요행이라는 건 없는 거니까. 뜻밖에 얻는 너무 큰 행운은 결국, 부질없이 흩어지는 법이었다. 이겸은 스무 살 같지 않은 생각을 했다.

“생각할 시간 필요하면 줄게. 하루 정도? 더 주고 싶어도 시간이 얼마 없어서.”

“제가 싫다고 하면… 이제 안 오실 거예요?”

“아니? 그땐 강제로 널 데려가야지. 네 동의 없이, 내 맘대로. 무력으로.”

“…….”

“아, 방금은 좀 진짜 깡패 같았다.”

핸들에 팔을 올리고 엎드려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아직 이겸의 몸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달칵 눌러 풀어 주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겸이 얼른 내릴 준비를 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볼게요.”

“같이 가.”

“혼자 가도 괜찮아요. 집 바로 앞이잖아요.”

“구대범이 집 앞에서 기다릴 수도 있잖아. 그리고 이게 남아서.”

제 안전벨트를 풀며 이겸이 준 핫초코 컵을 든 권태정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제 완전히 식어 차가워졌을 것을 차 밖에 서서 마시고 있는 권태정이 창밖으로 보였다. 이겸은 괜히 열이 오르는 뺨을 손바닥으로 한 번 꾹 눌렀다가 떼고 차 문을 열었다.

“식어서… 맛없을 텐데…. 그만 드셔도 돼요. 제가 다음에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맛있는데? 내 취향이야.”

식어 빠진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신 권태정이 저를 바라보는 이겸에게 상체를 확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놀란 이겸이 한 박자 늦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놀람과 곤란함, 경계와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다 보이는 너무나 솔직한 표정에 권태정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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