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29화 (29/174)

#29

이겸은 다시 세 가지 세트 구성을 비교하며 눈에 담았다. 주변에 나오는 것은 다 같은데 메인으로 나오는 빵이 달랐다. A세트는 팬케이크가 나오고, B세트는 프렌치토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C세트에는 베이글이 나왔다.

“저는…. 팬케이크 먹어 보고 싶어요.”

“마실 건? 커피도 있고 뭐 주스도 있고. 오늘의 커피는 고르지 마.”

“…저는 그럼… 오렌지에이드….”

이겸이 마실 것까지 고르자 벨을 누른 권태정이 A세트 두 개와 아메리카노, 오렌지에이드를 주문했다. 이겸은 능숙하게 주문하는 권태정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아래로 지저분한 제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이따 화장실에 가서 휴지로 닦아 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권태정의 차에 타면 발이 닿는 곳에 흙이 다 묻어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왜?”

“…아, 아니에요.”

권태정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이겸이 어색하게 살짝 미소 지었다. 뭘 보고 있었는지 보려고 하거나 계속 물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권태정은 캐묻지 않았다.

“…저 실장님.”

“응.”

“그럼 앞으로는 이벤트 회사에서 일 생겼다고 연락 와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카페는요?”

“음, 이벤트 회사 일은 하지 마. 토끼 탈 뒤집어쓰고 힘들게 뭐 하러 고생해. 카페는….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그 시간에 내 옆에 붙어서 제대로 돈 모으겠다 싶으면 관둬도 되고.”

카페 아르바이트 정도는 해도 된다는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안도했다. 다른 일들은 벅찰 때도 있지만, 나름대로 카페 아르바이트는 즐겁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료를 레시피대로 만드는 일도, 또 쇼케이스를 정리하는 일도, 사람들의 주문을 받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아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 카페 일은 계속할게요.”

“그래, 맘대로 해. 아, 그런데 너 진짜 쉬운 길 두고 삥 돌아간다.”

“…….”

“나 같으면 나랑 24시간 붙어 있으려고 난리 칠 텐데. 그럼 하루에 이백사십, 한 달이면 삼십일…. 칠천이백이네.”

시급이 십만 원이라는 걸 대충 들어도 어마어마했는데 24시간으로 계산을 하니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나오는 것에 놀란 이겸이 조금 멍해졌다. 한 달에 칠천이백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돈이었다.

“어때, 계산 듣고 나니까 나랑 막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고 그래?”

“…솔직히 저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실장님은 저랑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 괜찮으세요? 몇 시간도 아니고 24시간이잖아요….”

이겸의 말에 장난스럽게 웃은 권태정이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머뭇댐이 없어 놀리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나야 너무 좋지.”

“…왜… 좋으신데요?”

“그냥 좋은데. 뭐 특별히 이유가 필요해? 난 지금 너랑 여기 있는 것도 좋은데. 난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같이 못 있거든. 낯도 엄청 가리고, 사람은 존나 더 가려. 깡패 새끼 주제에 까다롭지?”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팔짱을 낀 채 의자 뒤로 기대어 앉아 이겸을 바라보았다. 이겸은 그런 권태정을 보다가 괜히 앞에 놓인 티슈를 만지작거렸다. 어색하고, 어쩐지 귀가 달아오르는 정적이 불편했는데 다행히도 노크와 함께 직원이 들어와 음료를 놓아 주었다. 티슈를 만지는 것보다는 음료를 마시는 게 더 나아 얼른 빨대를 문 이겸이 권태정의 눈치를 보았다.

“넌 나랑 있는 거 싫어?”

“…….”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질문인 것 같은데 바로 답이 맺히지 않았다. 이겸은 음료를 마시지도 않고 빨대만 살짝 문 채 권태정의 질문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같이 있는 게 불편한 적도 있었고, 그래서 피하고 싶고, 숨고 싶은 적도 있었다. 가벼운 태도에 당연히 농담이라 여겨 쉽게 넘긴 적도 있고, 조금 전처럼 여전히 어색할 때도 많았다. 확실히 같이 있는 게 너무 너무나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

싫지 않았다. 구대범과 있는 것은 너무너무 싫고, 전에 철거촌을 관리하던 관리실장 역시 보기만 해도 너무너무 무섭고 싫었는데 권태정과 있는 것은…. 싫지 않았다. 불편해도, 어색해도… 낯선 것투성이고, 지저분한 신발도, 또 낡은 옷도 창피하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니고 불편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실장님이랑 이렇게 같이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나이? 많지. 그래, 우리 나이 얘기하자. 재밌겠다.”

이겸의 말에서 갑자기 화젯거리를 고른 권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싱긋 웃었다.

“나 너보다 나이 많은 거 맞는데 얼마나 많을 것 같아?”

“음….”

솔직히 얼굴만 봐서는 저보다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십 대 중반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말 많이 생각해도 이십 대 후반 정도일 것 같아 보였다.

“…일곱 살?”

“일곱 살이면 스물일곱? 고맙긴 한데 그것보다 많아.”

“…스물아홉?”

“조금 더.”

“서, 서른?”

“서른둘.”

서른둘이면 저보다 열두 살이나 많다는 말이었다. 이겸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다시 권태정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저보다 어른 같은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그건 슈트나 경제력 같은 것에서 오는 여유 때문이지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놀랐어?”

“…네….”

열두 살이나 더 많다는 걸 알고 나니 권태정을 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완전한 어른의 위치에 있는 권태정을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어색해졌다. 그 어색함은 대부분 어른을 향한 동경과 부끄러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뭐야. 분위기 풀고 싶어서 말한 건데 역효과 난 거야?”

“…….”

“뭐가 그렇게 불편하고 어색한데. 서른두 살 개인적으로 안 좋아해?”

“…그,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경험이 많이 없어서요…. 아주 나이가 많은 분들이나 저보다 두세 살 많은 형들만 자주 봐 와서….”

이겸의 입에서 나오는 나이 많은 분들과 형들이라는 말에 권태정의 머릿속으로 나이가 지긋한 다람동 주민과 동물 탈을 쓰고 있던 놈들의 얼굴이 느릿하게 스쳐 지났다. 이겸의 생활 반경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카페 사장 몇 살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마흔 정도 되신 것 같아요.”

“구대범은 내가 알기로 나보다 다섯 살 많거든? 그러면 서른일곱. 아, 씨발. 또 생각하니 빡치네. 서른일곱에 직업이 사채업자야. 당당하기나 하면 모르겠는데 걔 어디 가서 로열 캐피탈 한다고 말 안 한다? 금융업 한다고 그래. 지랄도 작작….”

나이 이야기를 하다가 옆으로 빠져 갑자기 구대범을 욕하는 권태정을 멍하니 보던 이겸의 입술 위로 사르르 웃음이 번졌다. 권태정의 뒷말은 이겸의 웃음과 함께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좀 어색함 풀렸어?”

“…네….”

“넌 구대범 욕해야 웃네. 앞으로 욕 많이 해야겠다.”

씩 웃은 권태정이 노크와 함께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상냥하게 인사한 직원이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이 된 접시를 각각 앞으로 놓아 주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벨 눌러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권태정과 이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웃는 낯으로 말한 직원이 룸을 나섰다. 권태정은 접시에 놓인 것들을 눈으로 구경하고 있는 이겸을 보며 작게 웃었다.

“먹어.”

“잘 먹겠습니다…. 실장님도 맛있게 드세요.”

“응.”

마음 같아서는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아 뭘 어떻게 먹는 건지 자세히 알려 주고 싶은데 억제제를 먹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형이나 누나한테 억제제 좀 달라고 말을 하는 건데 자는 곳이 좀 달라졌다고 평소 루틴이 깨져 억제제 생각을 아침에 조금도 하지 못해 이 난리였다.

권태정은 억제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며 팬케이크 위에 같이 나온 시럽을 조금 뿌렸다.

“여기 시럽.”

이겸은 시럽 병을 받아 조금 전 권태정이 한 것을 따라 조심스럽게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렸다. 네모난 조각으로 놓인 버터가 귀여워 별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

권태정이 팬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조각내 입에 넣는 것을 보며 똑같이 자른 이겸이 권태정을 따라 입에 넣었다. 폭신폭신한 느낌과 달콤한 맛이 입에 퍼지는 순간 이겸은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너무 맛있어요.”

다행히 이겸의 입에 팬케이크는 맞는 모양이었다. 물론 딱히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묻기도 전에 맛있다고 먼저 말하는 걸 보니 마음으로 만족감이 마구 차올랐다. 비교가 된다는 게 우습지만, 작년에 500억짜리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와 비슷한 만족감이었다.

“다행이네. 많이 먹어.”

“네…. 그런데 실장님은 이런 곳 자주 오세요?”

“응. 어제 간 레스토랑이랑 여기 내가 좋아하는 데야. 여기가 내가 다니는 데 중에 제일 편한 데고. 음, 네가 그 김밥집 가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랄까.”

“아….”

“왜? 나랑 안 어울려? 뭐 깡패니까 금팔찌 차고 국밥이나 퍼먹고, 밤에는 술집 가서 돈이나 뿌리며 놀 것 같은데 호텔 레스토랑이나 다니고, 자연이나 찾아다니니 이상해? 지금이라도 내가 관리하는 업소나 한 바퀴 쭉 돌까?”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제가 괜한 걸 물어 권태정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놀란 이겸이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얼른 두 손을 저었다. 정말 아니라는 얼굴을 한 이겸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부드러운 오믈렛을 한 입 먹었다.

“장난이야. 얼른 먹어.”

이겸을 대놓고 놀린 권태정이 자꾸 얼굴을 볼 때마다 묘하게 한 방울씩 아랫배로 떨어지는 미약한 감각에 곤란하다는 듯 포크로 팬케이크 위를 툭툭 두드렸다. 억제제를 먹지 않으니 페로몬 제어는 물론이고 오메가를 보며 반응하는 느낌까지 달라져 무척 당혹스러웠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