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30화 (30/174)

#30

이겸에게서 페로몬 향이 짙게 나지 않아 망정이지 만약 일반 오메가 정도만 됐더라도 지금쯤 식탁 위에 있는 것들을 싹 밀어 버리고 이겸을 눕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러트 조차 호르몬제를 맞고 아주 깔끔하게 지내 온 시간들이 전부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 묘하게 감각을 긁는 느낌이 분명 있었다. 권태정은 팬케이크를 먹어 시럽이 묻은 이겸의 입술을 보며 노골적으로 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페로몬은 제어해도 생각까지 제어되지는 않았다.

씨발, 진짜 집에 빨리 들러야겠다. 이러다 사고 치겠네. 절대 흐트러지지 않으려 머리에 힘을 확 준 권태정이 녹음이 우거진 유리벽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멋대로 날뛰는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나온 권태정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이겸을 주차장에서 기다리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돌팔이 : 내일 검진일인 거 알지? 직접 안 보내면 또 안 올 거 알아서 굳이 보낸다. 내일 3시까지 늦지 않게 와.]

우성 형질만 담당하는 저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조현준에게 온 메시지를 본 권태정은 작년 여름부터 바쁘다는 이유로 검진을 가지 않고 땡땡이쳤던 것을 떠올렸다.

딱히 이상한 증세나 뭐 그런 게 없으니 굳이 검진을 갈 필요가 없어 가지 않은 것인데 그 뒤로 조현준은 3개월에 한 번, 검진을 하기 전에 직접 문자나 전화를 해서 권태정을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권태정은 조금도 압박을 받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만.

[바빠]

[돌팔이 : 내일 안 오면 러트 때 호르몬 주사 안 놔 줘]

[뭔 의사가 그런 걸로 협박을 하냐]

[돌팔이 :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시간 보고]

[돌팔이 : 너 요즘 시간 많은 거 전 국민이 다 알아]

아, 이런 씨발. 뉴스 타는 거 진짜 존나 피곤하네.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가게에서 나오는 이겸을 보며 휴대폰을 대충 포켓 안으로 욱여넣었다.

“타.”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고 생각한 권태정은 조수석에 타는 이겸의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유심히 보던 거라 그런지 저절로 시선이 움직여 붙었다.

아까 본 것처럼 여전히 낡고 너덜너덜한 운동화인 건 변함이 없지만, 앞코와 옆에 묻어 있던 흙이 정리된 게 보였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내내 발을 숨기려 하더니 화장실에서 신발을 닦고 온 모양이었다.

운전석으로 가던 권태정은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누나 소유의 백화점을 떠올렸다. 거기 가서 신발이라도 하나 사서 신기면 좋을 것 같은데 문제가 있다면 거기 직원들이 모두 저를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일 층으로 들어가 대놓고 올라가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고 아무래도 퍼스널 쇼퍼에게 연락을 따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이 차는 산 지 얼마 안 돼 그 백화점에 타고 간 적이 없어 번호 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제가 백화점에 왔다는 걸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권태정은 차에 타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제 담당 퍼스널 쇼퍼인 유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한 삼십 분쯤 뒤에 잠깐 들를 것 같은데. 네. 아니요. 제가 아니라 스무 살 정도 되는 어린 친구 신을 운동화 좀 봤으면 해서요. 네. 가격대는 좀 다양하게요. 너무 비싼 건 또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서. 네, 그리고 조용히 올라갈 거니까 다른 직원들 없이 부탁합니다.”

권태정은 저의 담당 퍼스널 쇼퍼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저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찾아 물건들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눈치가 빨라 좋았다.

조용히 올라간다는 말 한마디만 해도 눈치껏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오늘도 곧바로 준비해 두겠다는 대답이 돌아와 속이 다 시원했다. 흡족해진 권태정이 전화를 끊고 차 문을 열었다.

“…씹.”

차 안에서 달달한 복숭아 향이 났다. 평소라면 이겸의 페로몬이 참 이겸을 닮았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억제제를 패스한 오늘은 조금 감상이 달랐다.

복숭아를 꽉 손에 쥐어 과즙이 줄줄 흘러내리게 만들고 싶기도 하고, 또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싶기도 했다. 이겸의 페로몬에 반응해 예민해진 권태정은 평소보다 더 자세를 꼿꼿하게 세운 채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뭔가 화가 난 것 같은 예민한 표정을 본 이겸이 몸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쥔 채 입술을 감쳐물었다.

“볼 일이 있어서 백화점 잠깐 들렀다가 집에 갈 거야.”

“…어느 집이요?”

“내 집.”

“아…. 네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차에 타자마자 또 가까운 곳에서 나기 시작하는 좋은 향에 감쳐문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백화점에 도착할 때까지의 삼십 분이 이겸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조금만 방심해도 쉽게 멍해지고 고개가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이겸은 차가 어두운 주차장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곳에 서는 것을 본 뒤에야 조금 안도했다. 여기서 내리면 주차장 특유의 냄새와 이 좋은 향이 뒤섞여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내려.”

“저도요?”

“응. 내 볼일에 너도 필요해.”

권태정이 말하는 볼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내리라니 따라 내린 이겸이 고무 냄새와 페인트 냄새 같은 것이 뒤섞인 주차장 냄새에 비로소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몸이 이상해질 것만 같아 다리를 오므리고, 버티던 순간을 벗어나니 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따라와.”

성큼성큼 걸어 멀어지는 권태정의 뒤를 얼른 따라 발을 옮긴 이겸이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부스에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뭐해, 얼른 들어와.”

“네….”

멀거니 바라만 보자 권태정이 문을 잡고 얼른 들어오라 고갯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이 철컥 맞물려 닫히고,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내린 직원이 웃으며 권태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시는 길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갑자기 연락해서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저한테는 실장님 모시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 앞으로도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네.”

“그럼 올라가실까요?”

이겸은 저를 보고도 상냥하게 인사하는 직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백화점에 와 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가끔 TV안에서 보던 백화점과는 꽤 다른 분위기였다.

문으로 들어가면 층층이 매장들이 있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는 모습과는 굉장히 달랐다. 이겸은 직원을 따라 꼭대기 층에 내려서도 여기가 백화점이 맞나 싶어 주위를 고개만 돌려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고객님,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네.”

주위에 정신이 팔린 사이 권태정은 이미 어디로인가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이겸은 저를 안내하는 직원의 말에 얼른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앉아.”

방 안은 꼭 집처럼 되어 있었다. 소파도 있고, 큰 거울도 있고, 또 테이블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행거들도 멋있게 놓여 있었다. 이겸은 테이블 아래에 깔린 커다란 카펫 위로 놓인 많은 운동화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마음에 드는 거 신어 봐.”

“…저요?”

“응, 너.”

권태정을 바라보는 이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침부터 내내 신발을 신경 쓰고, 보이기 부끄럽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그걸 권태정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놀랍기도 하고, 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아까 주차장에서 흙 때문에 신발 버렸잖아.”

“…….”

“씨발, 비는 왜 와서 타이어 버리고, 신발 버리고.”

혀를 찬 권태정이 매끄럽게 젖어 흔들리는 이겸의 눈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어깨를 눌러 소파에 앉혔다.

“이거 예쁘다. 이거 신어 봐. 내 취향인데. 어때?”

사이즈별로 전부 놓인 운동화들 중에서 이겸에게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의 운동화 하나를 고른 권태정이 앞에 놓고는 그대로 다리를 구부려 앉아 이겸의 발목을 잡아 올렸다. 그에 놀란 직원이 제가 하겠다며 나섰지만, 권태정은 됐다며 직접 이겸의 운동화를 벗겼다.

“제, 제가 신을게요.”

“뭔 발이 이렇게 귀여워.”

눈으로 보기에도 제 발보다 확실히 작은 이겸의 발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조금 전 제가 고른 운동화를 신겨 주었다. 역시 제 안목이 옳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하얀 운동화는 이겸과 아주 잘 어울렸다. 권태정은 이겸의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펼치며 발을 내려놓았다.

“마음에 들어?”

“…네. 예뻐요.”

“다른 쪽도 신어 보자.”

다른 발도 들려는 것에 놀란 이겸이 얼른 권태정을 잡았다. 이겸의 발목을 쥐고 있던 권태정이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는 이겸과 꽤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췄다.

“…제가 신을게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권태정은 쥐고 있는 이겸의 발목을 놓지 않았다. 긴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발목을 쥔 채 느릿하게 움직이자 단단한 것이 손바닥에 걸렸다. 권태정은 손가락을 움직여 이겸의 툭 불거진 복숭아뼈를 매만졌다.

“…아….”

그 노골적인 손길에 이겸은 숨과 섞인 작은 신음을 터뜨렸다. 발목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한데 손을 움직여 만지고, 뼈를 만지니 자꾸만 다리가 오므라들고, 어깨가 움찔댔다.

“…실장님….”

“어? 어…. 그래, 그럼. 네가 신어 봐.”

이겸의 복숭아뼈를 만지다가 조금 더 위로 손을 움직여 바짓단 아래로 넣던 권태정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어 냈다. 그 작은 알약 두 개 때문에 제가 정말 미친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권태정은 멀찍이 떨어져 이겸이 신발 신는 것을 바라보았다. 신는 것마다 전부 다 잘 어울려 신겨 보는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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