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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 소년-33화 (33/174)

#33

병원의 소독약 냄새는 언제 맡아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권태정은 원장실 문을 의례적으로 똑똑 두드리고 바로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던 의사이자 권태정의 친구인 조현준은 늘 겪는 일이라는 듯 놀라지도 않고 권태정을 반겼다.

“러트 때 주사 맞으러 오는 만큼 검진도 좀 꼬박꼬박 나오면 안 될까?”

“매번 아무 문제없다고 나오는데 뭐 하러 매번 해. 그냥 일 년에 한 번 대충 받으면 되지.”

“그런 생각 가지신 분이 오늘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억제제 좀 늘려 줘.”

예상조차 하지 못한 말에 장난스럽게 권태정과 말장난을 하던 조현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권태정은 그런 조현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커다란 몸을 느릿하게 돌렸다.

“억제제는 왜? 지금 양으로도 충분한데.”

“제어가 잘 안 돼.”

“언제부터? 전혀 억제가 안 돼?”

“매일 아침에 먹고, 어제 딱 한 번 낮에 먹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페로몬 억제는 되는데 충동 같은 게 전혀 제어가 안 되더라고.”

권태정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조현준은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보복 운전도 그 충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억제제가 안 들어서?”

“야, 넌 최초 기사만 보고 그 뒤로는 업데이트 안 하냐?”

“원래 사람들은 1보만 기억하잖아.”

“그 일은 그 씨발 새끼가 날 먼저 위협해서 나도 똑같이 돌려준 거고. 내가 말하는 건 그딴 보복심리 뭐 그런 게 아니라…. 아, 뭐라고 해야 하지. 그….”

확실히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오라고 해도 검진을 받으러 잘 오지 않는 권태정이 문자 하나에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왔다는 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조현준은 장난기가 빠진 얼굴로 권태정의 말을 기다렸다.

“가학성?”

“…가학성?”

“어제 본가에서 자느라 아침에 내 억제제를 못 먹었거든. 뭐 하루 정도 거른다고 큰일이야 나겠나 했는데 나더라고. 오메가랑 같이 있었는데 좀 정신을 못 차리겠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그럴 수 있어. 네가 아무리 모든 조절을 잘해도 분명히 억제제가 제어해 주는 영역이 있으니까. 넌 특히 억제제가 그런 가학성이나 충동 같은 걸 효과적으로 억제해 주는 타입인 거고. 그런데 약을 안 먹으니까 평소 제어되던 게 확 도드라져 보일 수 있지.”

의자를 느릿하게 양옆으로 돌리며 듣던 권태정이 움직임을 멈추고 조현준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그 오메가가 좀 이상해.”

“어떤 면에서?”

“아무도 걔가 오메가인 걸 모르더라고. 나한테는 분명 페로몬 향이 나는데 다른 알파들은 모르는 것 같아. 딱히 걔가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경우도 가끔 있어. 열성 중에서도 극열성이거나 아니면 페로몬에 문제가 있거나. 보통 알파들은 못 느끼는데 넌 우성이니까. 워낙 그쪽으로 예민하게 발달해서 알 수밖에 없지.”

권태정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을 먹기 전에는 약의 힘이 없어 불쑥 치미는 충동이라 여겼는데 약을 먹은 후에 더 심하게 드는 가학적 충동에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전부 다 연이겸 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메가와 사고 치지 않으려면 저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그 머리채를 잡아 제 아래로 꿇릴지 모를 일이니까.

“더 웃긴 건.”

“…….”

“나한테만 나는 그 향에 꼴린다는 거야.”

“…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권태정을 보던 조현준이 안경을 습관적으로 올리며 포켓에 꽂혀 있던 펜을 빼 들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서류 위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다른 알파들은 전혀 감지도 못하는 오메가의 향을 너는 맡을 수 있고, 특이하게 그 향에 반응을 하고…. 그 상대한테 가학적인 충동까지 든다는 거지?”

“어.”

“가학적인 충동이 어떻게 들었어?”

“걔가 내 앞에서 뒤로 도는데 머리채를 잡아서 확 내 쪽으로 끌고 싶었어. 억제제나 더 줘. 늘려야겠어.”

어릴 때부터 본 권태정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내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조현준이 고개를 저었다.

“억제제는 더 늘리면 안 좋아. 아무리 너한테 잘 맞고, 좋은 성분이어도 페로몬이랑 신경을 강제로 억제하는 건데 늘려서 좋을 게 없어. 그리고 네가 말한 건 상대가 성적으로 끌리면 베타들한테도 나타나는 증상이야.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애 머리채를 잡아서 내 아래 꿇리고 싶었다고. 이게 심각한 게 아니야?”

“그래서 그렇게 했어? 안 했잖아.”

“…….”

“제어 잘하고 있는 거야. 억제제도 잘 듣고 있는 거고. 자연스러운 것까지 약으로 찍어 누르면 너무 힘들어져. 내가 억제제 먹으라고 하는 건 네 페로몬이 너무 강하고 짙어서 다른 오메가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성욕을 주체 못 해서 네가 일상에 지장을 받을까 봐 먹으라는 거지 자연스러운 감정까지 싹 다 누르라고 주는 거 아냐.”

조현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침음한 권태정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돌팔이를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러다 사고라도 치면?”

“사고 안 칠 거야, 넌. 충분히 스스로 잘 제어하고 있으니까.”

“어디서 오는 확신이야?”

“진짜 제어 안 되는 사람들은 저지르고 오지 저지르기 전에 절대 안 와. 제어 기능 지극히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검진 날이니까 피 뽑고 샘플 제출하고 가. 아, 살다 보니까 권태정이 연애하는 것도 다 보네.”

연애라는 말에 인상을 확 쓴 권태정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하나 들어 조현준에게 던지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연애는, 씨발. 지랄한다. 내 발로 여기 온 내가 씨발, 미친놈이지.”

“어, 억제 안 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다시 처음부터 얘기해 보자. 언제부터 그렇게 막 욕이 나왔어?”

“차단할 거니까 앞으로 문자 보내지 마.”

“피는 뽑고 가라.”

생글생글 기분 나쁘게 웃는 조현준의 얼굴을 노려본 권태정이 원장실 문을 쾅 닫고 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놨다가 듣지 않아야 할 말만 들어 기분이 몹시 불편했다.

저런 개소리나 하다가는 진짜 병원이 망할 거라 생각한 권태정이 제 앞으로 다가와 서는 간호사를 내려다보았다.

“채혈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씨발, 빨리 튈걸. 굳게 닫힌 원장실 문을 노려본 권태정은 다시는 검진 따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간호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현준이 말한 연애라는 말, 그러니까 저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애한테 붙이기에는 어색하고 겸연쩍은,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그 말을 지우려 애쓰며.

* * *

낮에 잠깐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는 권태정의 말에 집에 있던 이겸은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 강지훈의 메시지를 받았다. 네가 산다던 곳 근처인데 잠시 나올 수 있냐는 메시지를 한참이나 보던 이겸은 알겠다는 답을 보냈다.

강지훈이 소개해 준 일을 두 번이나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냥 간 것도 미안하고, 새로 같이 하자는 일도 같이 못 한다고 말하는 게 미안해 사과를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3개월 정도는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말도 제대로 전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딱히 권태정이 집에 있으라고 한 건 아니지만, 나가면서도 어쩐지 말을 해 두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이겸은 권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도록 받지 않은 것에 잠시 어디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간 건가 싶어 걱정에 잠겨 있던 이겸은 지훈 형이 근처에 와서 잠깐 만나고 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혹시 몰라 다람동 입구에서 길만 건너면 있는 카페 이름도 같이 남겨 두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전하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너무 오버를 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권태정이 했던 말을 종합해 보면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정도는 남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겸은 아무 답도 없는 휴대폰을 가만히 보다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걸어서 십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앉은 강지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같이 앉아 있었다. 이겸은 낯을 가리는 성격상 조금 어색하게 다가가 강지훈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 잘 지내셨어요?”

“엉, 나야 뭐 잘 지내지. 넌 잘 지냈어?”

“네…. 저도 잘 지냈어요.”

이겸이 인사하며 옆쪽을 보자 그제야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른 강지훈이 이겸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아, 여기는 내 친구! 얘랑 놀러 가는 길에 시간 떠서 너 잠깐 보고 가려고 불렀어. 너 여기 근처 산다고 한 거 생각나서.”

“아…. 네…. 안녕하세요.”

강지훈보다 인상이 조금 더 안 좋은 남자에게 어색하게 인사한 이겸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오도카니 앉아 괜히 손만 만지작거렸다. 강지훈이 그런 이겸의 앞으로 제 앞에 놓인 에이드를 밀어 주었다.

“이거 마셔. 나 입 안 댔다?”

“아니에요. 형 드세요.”

“나 점심 많이 먹었더니 물도 더 안 들어가. 마셔.”

“…감사합니다.”

어색함에서 도망치려면 음료라도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 빨대를 문 이겸이 청포도 에이드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아르바이트 이야기도 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는데 말도 없이 같이 온 강지훈의 친구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그랬다.

“야, 근데 그때 너랑 같이 간 그 사람 말이야. 긴가민가해서 그런데 맞지?”

“네?”

“재벌 아냐?”

“재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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