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36화 (36/174)

#36

“…….”

아냐, 그냥 갈까. 비 오는 날 조용한 카페 같은 곳 가서 빗소리 들으며 시간 보내도 좋은데. 권태정은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제 앞에 앉아 있을 이겸을 떠올렸다. 머리로 떠올리는데 묘한 열기가 마음으로 번졌다.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씨발, 돌았나.”

보고 싶긴 뭘 보고 싶어.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심란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짧게 숨을 뱉어 냈다. 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문자로 비가 많이 오니 집에나 있으라고 말을 뱉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많이도 오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니 말 그대로 물 폭탄 수준으로 비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고개를 저은 권태정은 서랍에서 티셔츠 하나를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비가 와서 그런지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고, 딱히 운동을 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하기는 하겠지만.

억제제부터 두 알을 삼키고 나자 비가 와서 그런지 뭔가 따뜻한 게 마시고 싶었다. 가장 먼저 늘 마시던 커피를 습관적으로 떠올렸지만, 사실 진짜 마시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핫초코. 이겸이 저에게 만들어 줬던 달콤하고 쌉싸름하던 그게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마실 방법 따위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린 권태정이 아주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핫초코를 떠올리며 몇 모금을 더 억지로 마시다가 잔을 식탁 위에 놓은 권태정이 거실로 가서 커다란 창을 열었다.

마음의 심란한 소리가 묻힐 정도로 큰 빗소리가 마음에 들어 잠시 창밖을 보던 권태정은 창을 연 채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역시 비 오는 날은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여유를 부리며 빗소리나 듣는 게 최고였다.

“…아직 자려나.”

휴대폰을 꺼낸 권태정이 아직 아홉 시가 되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 이겸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굿모닝]

[일어났어?]

별로 굿한 모닝이 아니지만, 괜히 인사부터 보낸 권태정은 곧 화면에 뜨는 이겸의 메시지에 미소 지었다. 물론 제가 웃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연이겸 : 안녕하세요 실장님 저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비가 엄청 온다고 메시지를 적던 권태정은 통화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렸을 때 이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받을 수 있어?”

-네, 지금…. 나왔어요.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빗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권태정은 흘끗 창밖을 보며 전화기 안에서 나는 이겸이 있는 곳의 빗소리에 귀를 더 기울였다.

“비 오는데 뭐 하러 나가.”

-할아버지 아직 주무셔서요.

“아, 아직 주무시는구나.”

-네….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비가 와서 귀찮아 안 갈 거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맞았다. 역시 이겸이 보고 싶었다.

-저기…. 실장님.

“응.”

-비가 너무너무… 많이 오는데 오늘은 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날은 운전하는 것도 위험하잖아요.

“…….”

그 말을 하려고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저인데 정작 소리 내고 있는 사람은 이겸이었다. 권태정은 쉽게 대꾸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이다가 그냥 가만히 다물었다.

-비 오는 날… 나오시는 거 싫다고 하셨잖아요. 만약에 저 때문에 나오셔야 하는 거면…. 물론 저 때문만은 아니시겠지만….

“왜 아니라고 생각해?”

-…네?

“나 너 때문에 거기 가는 거 맞아. 내가 얘기 안 했나. 너 아니면 굳이 그 무너져가는 동네 매일 출석체크 할 필요 없어.”

-…저 때문이면 오늘은 힘들게 안 오셔도 돼요.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을게요.

알았다고 하면 그만인데 그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권태정은 괜히 옆에 있는 쿠션을 구기며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꼴 보기 싫으니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비가 많이 오니 무리하지 말라는 배려인데 어쩐지 조금 서운했다.

“알았어.”

-…….

“안 갈게.”

이겸은 아마 매일 비가 오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안 그러겠는가. 철거촌을 관리하는 깡패 실장이 매일 저를 대놓고 감시하겠다고 찾아가는데 그게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끊어.”

더 할 말도 없고, 이겸도 딱히 말이 없어 전화를 매몰차게 끊은 권태정이 휴대폰을 대충 테이블 위로 던지고 쿠션을 들어 얼굴을 찍어 눌렀다.

유치하고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 그냥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서른둘이나 먹고 스무 살짜리 애랑 이러고 있다는 게 유치해 견딜 수가 없었다.

“…….”

뭐하냐, 진짜. 어린애랑 놀더니 맛이 갔나, 진짜.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래, 비도 존나 오는데 뭐 나야 안 가면 좋지.

애초에 별로 크게 신경을 쓸 일도 아니었다.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말에 기분이 상하는 것도 이상하고. 권태정은 창을 완전히 닫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등진 채 계단을 올랐다.

그냥 오늘은 죽을 만큼 숨이 찰 때까지 운동을 하고, 씻은 다음 또 늘어져라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 * *

철거촌에 내리는 비는 유독 차갑고, 쓸쓸했다. 지붕을 종일 두드려도 돌아오는 답은 없고, 허물어진 담을 더 허물기만 했다. 이겸은 문밖에서 물이 고여 줄줄 흐르는 소리를 듣다가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도착한 간병인을 바라보았다.

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옷이 반 이상 다 젖은 걸 보고 놀란 이겸이 얼른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장마도 아닌데 무슨 비가 이렇게 와. 우산을 쓸 필요가 없어요. 다 젖었네.”

“오늘 하루 쉬셔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상냥하게 웃은 간병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색이 짙어진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챙겨온 새 양말을 꺼내 신었다.

“따뜻한 거 한 잔 드릴까요? 믹스커피랑 보리차 있는데….”

“힘들게 뭐 나까지 챙겨. 내가 할 테니까 편히 있어.”

“…제가 너무 감사해서요. 매일 할아버지랑 종일 같이 계셔 주시고….”

“학생이 너무 착하다. 이래서 할아버지가 매일 이겸이, 우리 이겸이 하시나 봐.”

이겸을 보고 웃은 간병인이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리고 할아버지에게 잠은 잘 주무셨는지, 아침에 식사는 잘하셨는지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물었다. 이겸은 옆에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어제 본 거 또 보시네.”

“아, 또 보시는 거예요?”

“응, 저거 매일 밤 여덟 시 반에 하는 건데 아침에 재방송해 주거든. 어제 보시고도 재밌어서 아침에 또 보시는 거야. 할아버지, 그게 그렇게 재밌으세요? 세아가 친엄마 찾았어요?”

정확하고 분명한 발음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천천히 간병인에게 세아가 아직 친엄마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겸은 드라마 얘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저 화면 하나가 할아버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두운 방에 매일 혼자 계시게 한 게 죄송해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실장님이 우리 할아버지한테 정말 큰 선물해 주셨네. 드라마 못 보셨으면 어쩔 뻔했어요. 실장님도 참 대단하세요. 하실 일도 많으실 텐데 세심하게 다 챙기시고. 오늘도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나오셨더라구요.”

벌써 나오셨다는 말에 고개를 든 이겸이 간병인을 바라보았다.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겸을 눈치챈 간병인이 할아버지의 다리 위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컨테이너 앞에 지나는데 마침 그때 오셔서 인사했어.”

이겸의 눈동자가 닫힌 문에 닿았다. 그리고 마음은 그 문을 열고 나가 대문을 지나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알았어. 안 갈게.’

기분이 상한 것 같던 목소리가 다시 마음을 콕콕 찔렀다. 마지막에 끊는다고 말할 때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는데 권태정이 오 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몸이 들썩였다.

“…….”

한 번 가 볼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한 이상 철거촌에 왔다고 해도 저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닐 것이었다.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을 수도 있고, 또 뭔가를 가지러 왔을 수도 있었다.

“…….”

차가 있는지만 보고 올까? 이겸은 자꾸 컨테이너를 떠올렸다. 굳이 제가 거기 가서 확인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차가 있는지 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왜?’라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었다.

“…저기…. 실장님 혼자 오셨어요?”

“아, 응. 혼자 내려서 들어가셨어. 비서님은 안 오신 것 같더라고.”

“아….”

가야겠다고 생각을 완전히 정한 것도 아닌데 이겸은 어느새 일어나 벽에 걸린 남방을 들고 있었다. 간병인이 밖에 나가려는 것 같은 이겸을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가게? 비 엄청 오는데.”

“아…. 저 잠깐 이 앞에 좀…. 금방 올 거예요.”

“바닥 조심해. 흙이 다 물에 쓸려서 미끄럽더라.”

“네…. 저 금방 다녀올게요.”

간병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이겸이 그토록 열고 싶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래된 운동화 하나를 꺼내 발을 넣었다. 권태정이 사 준 좋은 운동화를 이런 날 신을 수는 없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추우실까 봐 문을 닫은 이겸은 쉴 새 없이 물이 고여 떨어지는 처마를 바라보다가 몇 년 전에 사서 아직도 쓰고 있는 비닐우산을 꺼내 펼쳐 빗속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우산 위로 빗줄기가 요란히도 쏟아졌다. 이대로 철거촌이 떠내려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한 기세였다. 이겸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헌 운동화가 흙에 지저분해지고 비에 젖는 것을 보며 권태정이 사 준 것을 신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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