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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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나서자 골목으로 물줄기가 빠르게 흐르는 게 보였다. 배수구로 물이 빠지고는 있지만, 워낙 많이 내리다 보니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역류하고 있었다.
나와서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벌써 운동화 안이 축축하고, 팔 한쪽이 다 젖어 버린 이겸은 제가 눈에 담고 싶은 것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더 옮겼다. 골목을 벗어나 조금 더 걷자 빗속에서도 눈에 확 뜨이는 빨간 컨테이너가 보였다.
“…….”
우산 손잡이를 조금 더 힘주어 쥔 이겸은 천천히 몇 걸음을 더 옮겨 정문 앞에 서서 비를 맞고 있는 새까만 차를 눈에 담았다. 그 차를 보자마자 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권태정이 아직 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차가 있는 것을 봤으니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겸은 3월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차가운 빗속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저는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도대체 왜.
“…….”
권태정과 통화할 때 들은 마지막 그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서? 안 온다고 했으면서 왜 왔는지 궁금해서? 그것도 아니면….
권태정이 보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말에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컨테이너를 쓰는 사람을 제가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제발 보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매일 밤 빌었던 지난날들을 이겸은 여전히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철거촌을 관리하러 온 사람들이라면 그게 용역이든 조합 사람이든 전부 다 싫었다.
예외라는 게 있을 수는 없었다. 제가 어떻게 저 컨테이너에 있는 사람을 예외에 둘 수가 있을까. 아니, 그건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해?’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권태정의 목소리가 거센 빗소리를 뚫고 귓가에 맴돌았다. 빗소리보다 부드럽고, 또 짙은 흙냄새보다 쉽게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였다.
‘나 너 때문에 거기 가는 거 맞아.’
권태정이 그 말을 할 때 이겸은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침이라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소리 내는 음절 하나하나에서 그의 좋은 향이 나는 것만 같아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 때문에, 코끝에 맴도는 잊을 수 없는 그 향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지도 몰랐다.
이겸은 완전히 축축해진 신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겨우 발을 다시 떼었다.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권태정이 있는 앞.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에 질척하게 풀어진 흙이 미끌거렸다. 이겸은 추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컨테이너 앞까지 다가갔다. 완전히 가까워지자 오히려 더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대로 뒤돌아 한달음에 도망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망치는 대신 빗물에 젖은 손을 들어 차가운 컨테이너 문손잡이를 쥐었다.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거기까지 할 용기는 없었다.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문손잡이를 쥔 채 머무르기만 하던 이겸의 손안에서 문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이겸은 여전히 용기가 없는 손안에서 저절로 돌아가는 것을 보다가 안으로 열리는 문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반쯤 보일 만큼 열린 문 사이로 권태정이 보였다. 이겸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왜 왔어.”
“…….”
“집에만 있을 거라며.”
“…실장님은… 왜 오셨어요?”
문이 조금 더 안쪽으로 열렸다. 문손잡이를 쥔 이겸은 권태정이 당기는 대로 조금 더 안쪽으로 끌려갔다.
“너 때문에.”
“…….”
“네가 이럴 줄 알았나 보지.”
그대로 문이 안으로 확 열렸다. 이겸의 몸이 안으로 확 딸려 들어가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이 문 바깥으로 떨어졌다. 권태정은 우산을 놓쳤는데도 한 번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저만 보고 있는 이겸을 시선만 떨어뜨려 바라보았다. 습한 공기에 달라붙은 달착지근한 페로몬 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
“…….”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아니, 마주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모든 것을 숨겨 줄 것 같은 빗소리와 습하고 달착지근한 공기, 정신없이 저만 바라보는 단 하나의 시선과 더는 머뭇댈 필요가 없는 충동.
권태정은 손을 들어 촉촉하고 차가운 이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얼굴에 닿는 따뜻한 체온이 좋아 이겸은 눈을 감은 채 그 손에 얼굴을 파묻듯 움직였다.
“…….”
권태정은 제 손이 좋은 듯 가만히 얼굴을 비비는 이겸을 보며 차가운 기운과 어울리지 않게 달아오른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제 너도 대답해.”
“…….”
“여기 왜 왔어.”
따뜻함 위로 뚝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눈을 뜬 이겸이 여전히 그 손에 닿은 채 눈을 마주했다. 생각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생각이 조금도 맺히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이유를 대야 하는데, 그냥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야 하는데 그 무엇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멍한 머릿속에는 온통 권태정뿐이었다. 아직 열린 문 바깥에서 나는 커다란 빗소리도, 그 안에서 나뒹굴고 있을 우산도 이겸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겸은 웃음기 하나 없이 묻는 권태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연이겸.”
멍해져 권태정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귓속으로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권태정이 이름을 부른 순간 이겸은 정신을 차렸다. 이제야 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닫고 놀라 권태정을 벗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어디 가게.”
“…실장님….”
“대답하기 전엔 못 가.”
이겸의 얼굴을 감싸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컨테이너 문을 닫은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의 몸을 닫힌 문으로 밀었다.
“…….”
“…….”
시선이 뒤엉키는 것보다 입술이 맞물리는 게 더 빨랐다. 권태정은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차갑고 달콤한 이겸의 입술을 머금었다. 빗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 찬 기운을 머금은 입술은 권태정의 체온을 만나 금세 녹아내렸다.
생경한 감각에 눈을 꽉 감은 이겸이 권태정의 팔을 쥐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머릿속에 맺히는 게 없었다.
권태정은 부드럽고 말랑해진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고 빨다가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건드렸다. 놀란 이겸의 입술이 벌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은 권태정은 그대로 완전히 파고들어 이겸의 혀를 문지르며 입 안을 헤집었다.
단단한 문과 그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권태정 사이에 완전히 갇힌 이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헐떡였다.
“…잠… 잠깐만….”
아주 살짝 벌어진 틈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지만, 그래도 들끓는 감각과 감정 속에서 권태정을 바라보려 눈을 떴다.
“…….”
“…….”
입술이 먼저 닿아 깊게 뒤엉키지 못했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뭉그러지며 얽혔다. 이겸은 멍하게 흐려지는 초점 안에서 저를 바라보는 권태정과 눈을 마주했다. 밀어야 하는데 밀고 싶지 않았다. 저에게만 닿는 시선도 제 뺨을 부드럽게 쥔 따뜻한 손도, 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다시 맞물리는 입술의 감촉도 모두 너무 좋아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컨테이너 지붕을 뚫고 비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겸은 거침없이 파고들어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권태정을 벅차게 받아들였다.
뜨거운 혀가 제 혀에 닿고, 빨아들일 때마다 체온이 내려갔던 몸 여기저기에서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다. 평소 기분 좋게 오르던 미열과는 다른 느낌이 무서워 이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아…. 흐읍….”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떨어지는 순간 숨을 쉬려 해도 권태정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금세 다시 거칠게 파고드는 입술을 마주한 이겸은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에 천천히 몸에서 힘을 풀었다. 힘도 세고, 숨도 거친데 제 뺨을 매만지는 손길은 거칠지 않았다.
“…으응….”
하지만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거칠고, 쾌락이 앞선 키스였다. 이겸의 목에서 작게 울리는 소리에 권태정은 숨도 쉬지 말라는 듯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이겸이 헐떡이며 겨우 숨을 내쉬어도 그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깊게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얽혔다. 흥분과 충동이 뒤섞여 엉망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권태정도 어쩌지 못했다.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
“하아…. 하으, 하아….”
깊게 얽혀 있던 혀가 풀리며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고여 있던 이겸의 숨이 터져 나왔다. 권태정은 눈물에 잔뜩 젖은 이겸의 속눈썹을 보며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터지는 입술을 다시 가볍게 머금고 열이 오른 혀끝을 문질렀다.
“…으응, 아….”
숨을 쉬지 못하게 전부 틀어 막힌 채 폭력적으로 퍼붓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겸은 살살 문질리는 혀끝에 오싹함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늘하고 습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모두 열기로 변해 이겸의 감각을 두드렸다. 목 안쪽이 간지럽고, 또 배 속이 울렁였다. 권태정에게 잔뜩 매달리고 싶었다.
“…하아….”
길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가볍게 다시 마주했을 때 이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속눈썹이 축축해진 느낌이 그제야 났다. 권태정 외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던 눈동자와 머리에 하나둘 원래 맺혔어야 할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책상과 소파, 휑한 내부, 컨테이너.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순간 다시 컨테이너를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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