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45화 (45/174)

#45

마카롱을 집어 아예 이겸에게 내민 권태정은 이겸이 연한 복숭아 색의 마카롱을 한입 무는 걸 보며 미소 지었다.

“근데 난 너 안 좋아할 거란 말은 안 할 거야.”

“…….”

“좋아지면 난 그냥 좋아할래.”

입 안으로 퍼지는 달콤함보다 더 단맛이 마음으로 퍼졌다. 이겸은 마음이 잔뜩 묻은 눈으로 고백 같은 말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난 내 맘대로 할 테니까 넌 네 맘대로 하면 되고, 음…. 뭐 대충 난 할 말 다 했는데. 너도 하고 싶은 말 해.”

“…실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저도… 실장님이랑 어색하고 싶지 않아요.”

“응. 너도 하고 싶은 거 진짜 다 해도 돼. 어제처럼 뽀뽀해도 되고.”

분위기를 바꾸려는 짓궂은 말에 이겸의 귓가와 얼굴이 다시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들고 있는 마카롱 색처럼 발그스름히 물든 이겸의 두 뺨을 본 권태정이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이겸은 권태정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아플 만큼 세차게 뛰는 심장에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 * *

백 비서는 요즘 부쩍 기분이 좋아진 권태정을 보며 회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이겸을 마크한다는 이유로 철거촌에 잘 붙어 있지도 않고 밖으로 돌면서도 힘들다는 말 하나가 나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연이겸 씨랑 같이 점심 안 먹어도 돼?”

“아, 간병인이 뭘 만들어 와서 같이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나도 며칠 보니까 간병인 일 잘하더라. 어르신 수발도 잘 들고.”

“응, 쓸 만해. 적당히 말도 많고.”

“응?”

“그냥. 그런 일 하려면 말수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낫잖아.”

비가 오던 그 날 저와 마주친 간병인이 이겸에게 제가 철거촌에 왔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겸이 컨테이너에 오지 않았을 거고, 닿을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간병인에게 보너스를 줘야겠다고 생각한 권태정이 회를 한 점 먹고, 따뜻한 청주를 한 모금 마셨다.

“현준이가 전화했더라.”

“뭐래?”

“너 감시 잘하래.”

“여기저기서 아주 나 감시하라는 사람만 많네.”

“너 연애하는 것 같다고 그러던데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돌팔이 말을 뭐 그렇게 심각하게 들어. 그냥 검진 오라고 지랄을 해서 간 게 다야. 그리고 어제는 억제제 부탁하러 갔었고.”

“억제제? 떨어질 때 안 됐잖아. 아직 두 달은 충분할 텐데.”

권태정이 억제제를 받아 오는 사이클은 백 비서가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가 모시는 상사의 컨디션을 항상 챙기고, 또 러트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좀 차에도 놓고, 본가에도 놔두려고. 전에 본가에서 잘 때 하루 걸렀더니 진짜 확 티가 나더라고.”

이겸의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허락도 없이 이겸이 오메가라는 것을 굳이 제 입으로 다른 곳에 떠벌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말을 하게 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얼버무린 권태정이 화제를 돌리려 괜히 조현준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내가 술 사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너도 같이 가.”

“언제?”

“아직 몰라. 뭐 금방 연락 오겠지. 그 성격에 벌써 다 예약했을 거 아냐. 또라이.”

겉으로는 느긋해 보이지만, 몹시 성격이 급한 조현준을 떠올린 백진우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 말 너무 많아서 힘든데.”

“그러니까 너도 같이 가야지. 나 혼자 걔 감당 못 해.”

“태정이 네가 감당 못 하는 사람도 있어?”

“어. 몇 명 있어.”

“몇 명이나? 누군데? 진짜 궁금하네.”

청주를 한 모금 더 마신 권태정이 젓가락을 놓으며 작게 웃었다.

“일단 조현준. 말이 너무 많아. 또 구대진. 난 그 새끼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더라. 그냥…. 할 말 존나 많아지다가도 면상만 보면 짠해. 또….”

인간미를 발산하기 위해 조금 더 말하고 싶은데 솔직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제일 감당이 안 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자신이었다.

“아, 좀 나도 약한 척 좀 하고 싶은데 안 되네.”

“애초에 없을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은 백진우가 초밥을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권태정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목 뒤로 삼키며 괜히 물로 입술을 축였다. 요즘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이겸과 있을 때 더 많이 꺼내게 됐다.

짧게 보고 말 사이라 그런지 그냥 소리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깡패 새끼가 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더 그랬다.

아주 작은 틈만 생겨도 권태정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겸을 떠올렸다. 어제 카페에서 나름 진지한 대화를 최대한 진지하지 않게 나눈 후로 더 그랬다.

‘…전 그래도…. 깡패는 안 좋아할 거예요.’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게 마냥 귀엽고 재미있기만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깡패가 아니면 좋아할 수 있는 건가? 단순히 깡패 새끼만 아니면 되는 건가?

“태정아.”

“…….”

“실장님, 권태정.”

“…어?”

“너 전화 와.”

“아….”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본 권태정이 질린 얼굴로 백진우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마음의 준비해.”

“응?”

화면에 뜬 ‘돌팔이’라는 이름을 본 백진우가 곧 그게 조현준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테이블 위로 엎드리며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곧 엄청나게 피곤하고 긴 술자리가 생길 거라 생각하며.

* * *

내일모레 오프라고 할 때 설마 하기는 했지만, 정말 가장 빠른 오프에 맞춰 술자리를 잡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약속이 약속인지라 권태정은 조현준이 주소를 보낸 술집으로 백진우와 함께 움직였다. 철거촌에 잠깐 들러 이겸의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아르바이트를 가는 바람에 엇갈려 종일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술자리는 무척 길고, 피곤하고, 또 나름대로 즐거웠다. 조현준이 고른 술집은 무척 쾌적하고 조용해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실 수 있었다.

평소에 권태정과 함께 다니느라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백진우도 오늘만큼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술을 들이켰다. 권태정이 즉석에서 바로 하루 휴가를 준 이유였다.

시간이 없으니 초저녁부터 달려야 한다는 조현준의 말에 여섯 시 반부터 달린 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헛소리를 픽픽하는 백진우와 조현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간 권태정이 가게에서 부른 대리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나마 제가 제일 정신이 멀쩡하니 저 답 없는 둘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백진우의 집 주소를 떠올린 권태정은 기사에게 백진우의 주소를 말해 주었다. 거기부터 들른 뒤에 차 주인 집에 가라고 끝까지 책임을 다한 권태정은 조현준의 차 뒷좌석에 구겨져 타는 두 사람을 보며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저 새끼랑 술 마시나 봐라. 말 존나 많은 새끼.”

여섯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조현준의 말을 들은 덕분에 골이 다 흔들렸다. 권태정은 곧 저에게 다가오는 대리 기사를 보며 반쯤 탄 담배를 대충 주차장에 버리고 불씨를 꺼뜨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백담동….”

뒷자리에 타 몸을 푹 기대고 눈을 감은 권태정이 제 아파트 주소를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재차 묻는 대리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람동. 다람동 철거촌.”

* * *

카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와서 씻은 이겸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카페에 손님이 굉장히 많기도 하고, 유난히 마감 때 청소할 것도 많아서 정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평소보다 거의 한 시간이나 늦게 카페를 나섰다.

그래서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누워 피곤한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겸은 뭔가 굉장히 허전한 기분에 조용히 이불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갈 때도 그랬고, 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도 내내 느낀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어두운 철거촌으로 들어오면서도 내내 이겸의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던 허전함은 이제 잠자리에서도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

종일 왜 이러는 걸까 생각을 곰곰 해 봤는데 그 생각의 끝에는 늘 권태정이 떠올랐다. 낮에는 간병인이 준비해 온 점심을 같이 먹느라 권태정을 보지 못했고, 저녁에는 술자리가 생겨 못 갈 것 같다는 간단한 통화만 했을 뿐 마찬가지로 권태정을 만나지는 못했다.

꼭 비가 많이 오던 날, 키스한 뒤로 권태정을 며칠이나 보지 못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이겸은 이불이 사부작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

아무래도 어제 깡패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게 솔직한 저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 너무 대놓고 솔직하게 말한 것 같아 미안했다. 좋아하지 않을 자신도 없으면서 그 마음을 숨기려 소리 낸 말이 권태정에게 작은 상처라도 줬을까 봐 신경 쓰였다.

“…….”

편하게 지내자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정말 또 서운함을 느낀 거라면…. 권태정을 또 서운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겸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시무룩해진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근데 난 너 안 좋아할 거란 말은 안 할 거야.’

안 좋아할 거라는 말만 하는 저에게 권태정은 내내 다정한 말을 전해 주었다.

‘좋아지면 난 그냥 좋아할래.’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이겸은 이불 안에서 손을 들어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 위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

누군가가 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매일매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걸까? 권태정이 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상상일 뿐인데도 너무너무 어려웠다. 아마 무척 다정할 거라는 것 정도만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권태정은 참 다정한 사람이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도 웃어 주고, 눈을 맞춰 주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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