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51화 (51/174)

#51

“아니에요. 제가 병원에 있을게요.”

“있어도 지금은 못 만나니까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여덟 시 전에 와. 실장님께서 바로 옆에 숙소 잡아 주셔서 내가 거기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올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실장님께서요?”

“응, 아까 너무 놀라서 실장님께도 바로 연락드렸거든. 마침 철거촌에 계셔서 바로 오시고, 여기 병원 연락도 다 해 주셨어. 할아버지 중환자실 나오셔도 혹시 몰라서 며칠은 입원해 계시는 게 좋다고 하니까 1인실로 해 달라고 다 말씀도 해 주시고. 아, 저기 오시네.”

간병인의 말에 이겸은 얼른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 그래도 조금 안도가 됐다.

“왔어? 많이 놀랐지. 너무 걱정하지 마. 안정 취하러 들어가신 거니까.”

“네…. 감사해요. 저 대신 병원도 같이 와 주시고…. 제가 다 해야 할 일인데….”

“누가 하면 어때서.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놀란 마음부터 추슬러. 그래야 내일 할아버지도 뵙지.”

고개를 끄덕인 이겸은 권태정이 간병인에게 이것저것 말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에 보이는 가볍고 장난스러운 모습이 조금도 묻지 않은 모습은 완전한 어른의 것이었다. 허둥대고 눈물부터 나는 저와는 달랐다.

“전 이겸이 데려다주고, 내일 아침에 일찍 같이 올게요. 이겸이가 어르신 면회는 해야 하니까.”

“네. 여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묵례한 권태정이 울어서 눈가가 발개진 이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훌쩍이는 그 머리칼과 뺨을 계속 번갈아 만져 주었다.

“카페는?”

“사장님께 연락드렸더니 동생분을 보내 주셔서 왔어요….”

“그래도 거기 사장은 쓸 만하네. 카페 알바 운영 특이하게 해서 미친놈 아닌가 싶었는데 반성해야겠다.”

제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이겸은 그런 권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괜찮다는 듯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자꾸만 기대고 싶었다.

병원을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이겸은 권태정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권태정이 간병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직접 겪은 이야기가 하나로 섞인 내용이었다.

저녁을 드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속이 답답하다고 하셨고, 체기인가 싶어 등을 두드려 드리던 중 갑자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셨다고 했다.

119가 빨리 온 덕분에 응급처치를 해 큰일은 피했지만, 연세가 높으시기에 병원에서는 만일을 대비해 중환자실에 며칠 계시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중환자실 나오시면 1인실로 가실 거야. 거기가 간병인이랑 있기도 편하고, 너도 드나들기 편하니까.”

“…감사합니다. 저 혼자였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엄청 헤맸을 거예요.”

“나 멋있지.”

“…네.”

원래라면 소리 내서 대답까지는 안 했을 이겸이 소리 내어 대답하는 것에 놀란 권태정이 고개를 홱 돌려 조수석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긍정의 답이 나와 좋기는 한데 정말 놀라 심장이 막 요란하게 뛰었다.

“어르신 입원해 계신 중에도 야한 짓이나 생각하는 놈 만들지 마.”

“…그, 그런 적 없어요.”

“방금 그랬잖아.”

“그건… 정말 감사하기도 하고…. 다 해결해 주신 게 정말 멋있기도 해서….”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난 돌아서 그런 말 들으면 드디어 나랑 떡칠 마음이 들었구나. 그딴 식으로 생각해.”

노골적이고 질 낮은 표현에 귀가 빨개진 이겸이 괜히 허벅지 위에 놓인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혹시 병원비 이런 거 어떻게 주나 이런 생각은 안 해도 돼. 돈 받으려고 한 일 아니니까.”

“…그래도 저 때문에 안 쓰셔도 될 돈 쓰시는 거잖아요. 바로는 못 드리겠지만, 일해서 꼭 드릴게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그럼 나랑 더 오래 같이 있던가.”

“…….”

“시간당 십만 원 잊었어? 한 다섯 시간씩 더 오래 있으면 되겠네.”

이겸을 보고 싱긋 웃은 권태정이 다시 앞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라던 마음에서 절대가 깨진 뒤로는 너무나 쉽게 권태정이 마음에 들어왔다. 웃음 하나로도, 위로만으로도, 또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제가 실장님이랑 같이 있는 게 실장님께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전 아무것도 해 드리는 것도 없는데 정말 같이 있었다고 돈까지 주시니까 죄송하기도 하고,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도움 돼. 너만 줄 수 있는 도움이야. 나랑 같이 있으면 나도 다른 거 할 필요 없고 너랑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나도 편하고 좋아. 저번에 그 고양이 친구 피어싱 더럽게 한 새끼나 구대범 같은 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잖아. 피어싱 새끼는 내가 조져서 못 온다고 치고…. 구대범 그건 슬슬 기어 나올 때 됐는데. 내가 그때 준 돈 안 보냈어?”

권태정이 통장으로 넣어 주었던 돈을 떠올린 이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월급과 함께 조금만 더 같이 보내고 나머지 돈은 통장에 그대로 둔 상태였다.

“한 번에 보내면 또 저번처럼 오실 것 같아서…. 월급 때마다 조금씩만 같이 보내려고 넣어 놨어요.”

“잘했어. 천만 원 한 번에 넣었으면 또 어디서 났냐고 거품 물고 왔을걸. 아니 사채 주제에 씨발, 돈이 어디서 나서 갚든 정말 뭔 상관이냐고. 돈 주면 꼬리나 흔들면서 돈이나 물어 가면 그만이지.”

생각하니 짜증이 나 핸들을 손바닥으로 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다시 허벅지 위로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이 다 흔들릴 만큼 무서웠는데 그래도 권태정 덕분에 마음이 놓여 웃음까지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 자꾸 나 또라이 만들지 말라니까.”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웃었잖아.”

“…….”

“너 웃는 거 존나 예뻐.”

“…….”

“알아 둬. 그렇다고 웃지 말란 거 아니고 그냥 자주 웃고 또라이는 알아서 감당해.”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하던 이겸이 바지 위를 손가락으로 괜히 느릿하게 문질렀다. 권태정이 말하는 정도의 감당은 어쩐지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느새 다람동에 도착한 차는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골목 어귀에 멈췄다. 이겸은 차에서 내리는 권태정을 보며 그가 조수석으로 와 문을 열어 주기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대신 권태정은 이겸이 내리고 열린 문을 대신 닫아 주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면회래. 그리고 저녁에는 일곱 시였나, 여섯 시였나. 하루 두 번만 된다더라고. 아침에 막힐지도 모르니까 집에서 여섯 시 반쯤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늦으면 안 되잖아. 같이 갈 거니까 절대 혼자 가지 마.”

“…네. 감사합니다.”

이겸의 집 앞에 선 권태정은 간병인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던 저녁을 떠올렸다. 구급차가 골목으로 들어오지 못해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뛰어오고 응급처치를 하며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아마 그것까지 이겸이 봤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었다. 숨을 잠시 쉬지 않아 얼굴색이 변하던 것을 봤을 때는 저도 충격이었으니까.

“집에 혼자 있는 거 무섭지 않겠어?”

“아….”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닫힌 대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집에서 혼자 자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늘 할아버지가 계셨고, 잠시 입원하셨을 때도 같이 병원에서 자느라 혼자 집에서 잘 일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밤에 집에 있다는 게 이겸에게는 아주 낯선 일이었다.

“자고 갈까?”

“…….”

함께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기울어져 버린 상대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겸은 좁은 방 안과 낡은 바닥과 벽지, 아무리 쾌적하게 해 주어도 조금씩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 곰팡내 같은 것을 떠올렸다.

분식집에 가서도 지저분하다는 듯 앉는 것도 불편해하던 권태정이 이렇게 오래되고 낡은 집에서 잔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싫어? 아직 같이 자는 건 좀 그래?”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방도 좁고…. 이불도 그렇고…. 따뜻한 물도 세게 안 나오거든요. 바닥도 딱딱하고….”

“음, 방 좁은 건 이미 알고 있고, 이불은 내가 사 준 거잖아. 네 이불에서 같이 자면 되고, 음…. 따뜻한 물 세게 안 나오는 건 몰랐는데….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씻을게. 입고 잘 옷이 없다는 게 문제긴 한데.”

권태정이라고 물론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제집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특히나 바닥에서는 자 본 적이 없는 권태정이 여기서 자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름대로 아주 용감한 결단이었다.

“일단 그것만 말해 줘. 다른 거 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여기서 자고 갔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그냥 갔으면 좋겠는지. 내 기분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서.”

“…저는….”

타인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분만 생각하는 것. 늘 자신의 기분은 가장 뒤쪽에 있던 이겸에게는 참 낯선 말이었지만, 그래도 권태정의 말대로 해 보고 싶었다. 이겸은 지금 제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같이… 있고 싶어요.”

겨우 작게 소리 낸 이겸은 제 어깨너머로 대문을 똑똑 두드리는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자.”

그리고 제 얼굴 위로 뚝 떨어지는 시선과 웃음에 또다시 마음이 녹아 무너졌다. 이겸은 얼른 뒤돌아 조금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저를 따라 들어오는 권태정을 보다가 문을 닫고 잠갔다.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잠기는 문만 봐도 심장이 마구 떨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불을 켠 이겸은 아까의 긴박했던 순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어질러진 방 안을 보다가 할아버지의 흐트러진 이불을 잘 정리했다. 그리고 작은 밥상 같은 것들을 전부 부엌으로 내다 두었다. 분주하게 정리를 하고 나니 그래도 권태정이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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