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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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면회를 아침 일찍 마치고 나온 이겸은 눈물이 묻은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간병인이 그런 이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하루 만에 훨씬 더 작아지고 늙은 것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고비를 넘기시고, 일반 병실로 옮길 정도의 상태로 천천히 회복이 되고는 계시지만, 만약 간병인과 권태정이 없이 예전처럼 살고 있었더라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집에 혼자 계셨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와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보기라도 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너무 무서워져 몸서리가 쳐졌다.
“종일 여기 계시는 거예요? 좀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있을게요.”
“아니야. 뭐가 힘들어. 산책도 하고, 친구가 와서 점심도 병원 지하에서 같이 먹기로 했어. 계속 여기 앉아만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이겸 학생. 그리고 나 이거 봉사하는 거 아니잖아.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도 일하는 거니까 전혀 미안해하거나 그럴 거 없어. 알았지?”
저에게 미안함과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이겸은 그저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사셨어요.”
“내가 뭘 했다고. 그래도 혼자 계시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녁 면회는 6시라더라.”
“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아지셨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할아버지 이겸 학생 생각해서 빨리 회복하실 거야. 이렇게 착하고 예쁜 손주 두고 어디 못 가시지.”
다시 이겸의 등을 두드린 간병인이 가족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이겸도 옆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집에 도착한 권태정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실장님 : 도착하면 열 시 좀 넘을 것 같아]
[실장님 : 나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마지막 메시지에 작게 웃은 이겸이 가만히 화면 속 글자를 바라보다가 메시지를 적었다.
[기다릴게요]
* * *
씻고 나온 권태정은 머리를 말라고 대충 침대에 뻗었다. 이대로 한 이틀 아무 생각도 없이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던 권태정은 진동이 오는 소리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이겸 : 기다릴게요]
[연이겸 : 천천히 오셔도 되니까 운전 조심하세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권태정이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냥 좀 편하게 입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출근을 하는 평일이기 때문에 그래도 갖춰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또 이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야 하니 아무거나 입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아무거나 입는다고 해도 이 집에 있는 것들 중 ‘아무거나’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슈트와 셔츠를 골라 꺼내 침대로 와서 놓은 권태정이 퍼스널 쇼퍼 유지연에게 연락하며 서랍에서 속옷 몇 개와 입고 자도 불편하지 않은 티셔츠, 바지를 꺼내 마찬가지로 침대 옆에 던졌다.
“네, 권태정입니다. 오늘 세 시쯤 잠깐 들렀으면 하는데요. 네. 전에 운동화 샀던 친구가 입을 옷 좀 보고 싶은데요. 부탁 좀 드릴게요. 제일 작은 사이즈면 될 것 같은데…. 음, 뭐 사이즈야 가서 보면 되고 그때 얼굴이랑 기억나세요?”
이겸의 분위기를 기억한다는 유지연의 말을 가만히 듣던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고 단정한 이미지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네, 그 이미지에 맞게 편하게 입을 옷이면 좋겠어요. 너무 차려입은 느낌 안 나게. 활동적인 거로. 아르바이트도 다니고 하니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도착해서 연락드릴게요. 네.”
통화를 마친 권태정이 옷을 갈아입고, 아까 꺼낸 속옷과 홈웨어를 가방 하나에 담았다. 어제 같은 일이 언제 또 생길지 모르니 미리미리 차에 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또….”
뭔가 할 게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권태정은 억제제가 든 약통에서 약을 조금 덜어 보다 작은 약통에 담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도 밖에서 자게 될 때면 꼭 필요한 것이니 차에 놓아둘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열 개는 족히 될 차 키가 들어 있는 곳으로 간 권태정이 그중에 가장 내부가 크고 승차감이 좋은 차로 골라 키를 집어 들었다. 혹시 또 차에서 잘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는 뒷좌석이 편하고 큰 차를 주로 타고 다닐 생각이었다.
이제 모든 게 완벽했다. 권태정은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며 이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출발해]
[30분 정도 걸릴 거야]
* * *
도착했으니 1층으로만 내려오라는 권태정의 메시지에 이겸은 얼른 아래로 내려가 권태정을 찾았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불쑥 솟은 권태정이 보였다. 어디에 있든 키도 크고 잘생겨서 참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이겸은 얼른 권태정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응,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아직은 힘도 없으시고 계속 주무시기만 하세요. 그래도 어제보다 더 나아지셨다고 하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려구요.”
“좋아지셨다니 다행이다. 오후 면회는 몇 시야? 여섯 시? 일곱 시?”
“여섯 시요.”
“그럼 가서 점심 먹고 백화점 갔다가 집에 가서 좀 쉬고 다시 병원 가면 되겠다. 저녁은 면회하고 먹으면 되고.”
백화점을 간다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이겸은 어제 저에게 옷을 사 준다고 했던 권태정의 말을 떠올렸다. 제 티셔츠로 자위를 했다던 말이 머릿속이 맺히는 순간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배고프겠다. 아침도 못 먹었잖아. 가자.”
“네….”
간질간질한 손끝으로 권태정의 손가락이 닿았다. 자연스럽게 이겸의 손을 잡으려던 권태정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보고 이겸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잡지 말까?”
움츠렸던 손가락을 편 이겸은 아주 살짝 권태정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조금만 방향이 엇갈려도 쉽게 풀어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대담해졌네, 우리 자기.”
“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왜? 두 번이나 같이 잤는데. 그냥 잔 것도 아니고 아래까지….”
그대로 권태정이 더 말을 못 하도록 입을 손바닥으로 꾹 막은 이겸이 소리가 더 나지 않는 것을 가만히 본 뒤에야 손을 떼어 주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권태정은 내내 웃기만 했다.
“알았어. 그런 얘기는 둘만 있을 때 할게.”
“…그때도 안 하셔도 돼요….”
“그럼 우리 둘 얘기를 누구랑 해. 나 혼자 생각하라는 건 너무 잔인한데.”
큰 몸을 기울이기까지 해서 눈을 맞춘 권태정의 애교 부리는 듯한 말에 이겸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키도 크고 웃지 않으면 다소 냉정해 보이는 인상인데도 저런 나긋한 목소리가 참 잘 어울렸다.
“…그럼… 둘만 있을 때… 조금만….”
“응, 조금만.”
이겸의 허락에 웃은 권태정이 다시 이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하나 쥐여 주었다. 어린애처럼 그걸 잡고 따라오는 게 귀여워 주차장으로 가면서도 권태정은 또 내내 웃었다. 요즘은 정말 이겸 덕분에 매일 웃기만 하는 것 같았다.
“실장님,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어제 바닥에서 주무시고, 또 팔베개 아침까지 해 주셔서 팔도 아프셨을 텐데….”
“난 좋았는데. 그냥 아예 할아버지 집으로 오실 때까지 내가 그 집에 들어가 살까?”
“…하루도 아니고 매일 계시면 진짜 불편하실 거예요….”
“집에만 계속 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아님 뭐 토퍼라도 하나 살까.”
중얼대는 권태정을 보던 이겸이 먼저 조수석으로 오르며 뒷좌석에 놓인 것을 하얀 박스를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꼭 케이크를 담아 주는 박스와 모양이 비슷했다.
“진짜 토퍼 하나 사는 거 어때? 요즘에 꽤 푹신하고 좋아.”
“…그 매트리스 같은 거요?”
“응. 있으면 훨씬 편하게 잘 수 있을걸.”
운전석에 탄 권태정이 시동을 걸며 어떠냐는 듯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에 이겸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차피 두 달 정도 후면 집을 나가야 하는데 좋은 물건이 늘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이유였다.
“방도 좁고…. 나중에 가지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요.”
“그거야 사람 부르면 되지.”
“…이사 갈 곳도 아직 못 정했고, 거기는 지금 집보다 더 좁을 수도 있어서요.”
이겸이 철거 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권태정은 잠시 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토퍼 이야기를 끝냈다. 괜히 더 말을 얹어 이겸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차 어때? 의자가 커서 앞으로 너랑 만날 땐 이거 타고 다니려고.”
“편하고 좋아요.”
“뒷좌석도 넓거든. 뭐 차에서 자는 게 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넓으면 편할 것 같아서.”
“…또 차에서… 잘 일이 있을까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이겸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병원을 빠져나가며 웃음을 거두고 짐짓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네가 갑자기 막 꼴려서 나랑 뒹굴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럼 어쩌겠어. 차 세우고 저 뒤에서 같이 뒹굴어야지.”
“…제, 제가 왜….”
“뒹구는 게 뭔지는 알아?”
“…네.”
안다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보는 순간 권태정은 아랫배가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순진해 빠져서는 또 그걸 안다고 끄덕이고 있는 게 지나치게 귀여웠다.
“뭔데?”
“……같이 자는 거….”
“같이 어떻게 자는 건데?”
“…야, 야하게….”
“아, 씹. 괜히 그건 왜 물어봐서 씨발, 존나 꼴리네.”
이겸의 대답은 권태정을 순간적으로 난폭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장 차를 어디 갓길에 세우고 아직 야한 말이 묻어 있을 입 안을 엉망으로 헤집고 싶은 마음을 짓누른 권태정이 침음했다.
“상식적으로 이게 꼴릴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해서 그런가.”
“…….”
“꼴리는 것도 뭔지 알아?”
“……흥분하는 거….”
“씨발….”
이겸은 정말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말하는 것도, 솔직한 것도, 또 말을 하고 부끄러워 빨개진 귀 끝도 모두 지나칠 만큼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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