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56화 (56/174)

#56

퍼스널 쇼퍼와 편하게 쇼핑하는 것도 권태정이 돈으로 산 편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되도록 제가 정당히 돈으로 산 편의를 마음껏 누리고 살고 싶었다. 돈도 썼는데 굳이 피곤한 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저의 생각과는 달리 이겸이 약간 말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돈으로 다 해결하고 휘두를 거라는 말로 들었으면 기분이 조금 상했을 것 같아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이게 뭐 널 돈으로 휘두르겠다 이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네, 그런 의미 아닌 거 알아요.”

“알아?”

“네….”

“알아주면 다행이고.”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보니 아랫배가 또 울렁였다. 어제 이겸의 페로몬이 짙게 확 터진 후로 이겸만 보면 너무나도 쉽게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러트가 올 때가 아직 안 됐는데 여차하면 진짜 멋대로 와 버릴 것 같을 정도였다.

얼마 전보다 확실히 더 페로몬 향이 짙어진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복숭아 무스를 한 입 더 입에 넣었다. 저 미치게 좋은 향을 다른 평범한 알파는 맡지 못하고 저만 맡을 수 있다는 게 미치도록 좋았다.

“요즘 몸은 좀 어때? 억제제 먹고 뭐 불편한 데는 없어?”

“음, 불편한 건 없어요. 억제도 잘 되는데 머리 아프거나 울렁이지도 않고 너무 좋아요. 그런데 요즘 좀 전이랑 다르게…. 페로몬이 확 몸 밖으로 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날 때가 있어요.”

“어제 그랬지? 내 입에 쌀 때.”

“…….”

그걸 권태정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는 것에 더 놀란 이겸이 시선을 무스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느낀 것이 권태정에게도 느껴졌다니 너무 부끄러웠다.

“이제 거의 돌아온 것 같은데 조심해. 억제제만 잘 먹으면 뭐 일반 알파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드물기는 해도 나 같은 우성알파 만나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실장님한테는 그럼 제 페로몬 향이 계속 나는 거예요?”

“응. 나지. 존나 그냥 눈을 못 떼겠는 냄새. 그런데 뭐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나도 억제제 먹어서 대충 기분 좋게만 나. 어제처럼 갑자기 확 터지지만 않으면 뭐….”

이겸은 권태정에 제 페로몬을 표현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먹고 싶다느니 눈을 못 떼겠다느니 하는 그 말들이 전부 다 너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약 잘 먹고 몸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말해. 페로몬도 돌아온 마당에 이제 히트도 올 거 아냐. 올 것 같으면 미리 가서 호르몬 주사 맞으면 되거든. 그냥 며칠 좀 들뜨기는 하는데 그래도 훨씬 편해. 굳이 누굴 찾아서 뒹굴지 않아도 되니까.”

“네…. 이상해지면 말씀 드릴게요.”

사실 이겸은 지금도 제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요 며칠 권태정만 봐도 심장이 확 조이고, 품에서 나는 좋은 향기만 맡아도 심장이 요동을 쳤다. 또 집에 너무 쉽게 권태정을 들이기도 하고, 혼자 떠올리며 몸에 열이 들어가는 데다가 먼저 입을 맞추는 그런 부끄러운 일도 저지르게 됐다.

여기서 더 이상해질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라 이겸은 어느 정도 이상해졌을 때 권태정에게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히트 사이클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지금 이 정도로 권태정을 보고 배가 간지러운 느낌이 나는 것도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보다 더 정도가 심한 느낌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응, 꼭 말해. 꼭.”

다짐을 받듯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소리 내어 묻기에는 부끄러운 궁금증을 목 안쪽으로 넣은 이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운동화를 살 때 만난 권태정의 쇼핑 일을 봐 주는 유지연에게 꾸벅 인사한 이겸이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온 거지만 이겸은 처음 왔을 때랑 별반 다르지 않게 긴장한 채였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준비해 달라고 말씀을 해 주셔서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옷들로 골라 봤습니다. 사이즈는 스몰 사이즈나 미디엄이면 충분할 것 같아서 골라 두었는데 한 번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옷들은 편하게 입어 보셔도 됩니다.”

유지연의 안내를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아 쥐고 선 채 듣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먼저 티셔츠와 남방이 걸린 행거로 다가가 옷걸이를 하나씩 옆으로 옮겨 가며 옷들을 눈에 담았다. 전부 이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밝고 단정한 느낌의 옷들이라 그냥 볼 것도 없이 걸린 것들을 다 사면 될 것 같았다.

“뭐가 마음에 들어? 천천히 골라 봐.”

권태정의 말에 행거 쪽으로 몸을 돌린 이겸이 다소 어색하게 옷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손에 닿는 느낌도 부드럽고 좋고, 또 색도 다 예뻐서 뭘 골라야 할지 너무 어려웠다. 이겸은 한참을 보다가 도와 달라는 듯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줄 알고 내가 골라 놨지.”

싱긋 웃은 권태정이 연한 색의 티셔츠 몇 장을 꺼내고, 겉에 걸칠 남방도 몇 장 골라 한쪽으로 몰아 두었다. 그리고 거기 어울릴 바지까지 고르자 퍼스널 쇼퍼가 권태정이 고른 것들을 매칭해 이겸에게 내밀었다.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한 번 입어 보시겠어요?”

“…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퍼스널 쇼퍼의 안내를 받아 탈의실로 간 이겸은 옷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놓고, 제가 입고 있는 옷들을 벗었다. 그리고 또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권태정이 골라 준 옷을 입었다.

늘 입고 다니는 스타일인데도 확실히 제가 입고 왔던 옷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겸은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다가 어색하게 탈의실을 나섰다.

“아, 예쁘다. 잘 어울려. 옷 불편한 데는 없어? 사이즈는 어때. 위에는 맞는 것 같고, 바지는?”

여러 가지를 더 보고 있던 권태정이 이겸에게 다가가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허리가 조금… 큰 것 같아요.”

이겸의 말에 티셔츠를 살짝 들어 올린 권태정이 닫힌 버클 위로 손가락 한 마디를 넣어 앞으로 당겼다. 배에 권태정의 손가락이 스치는 것에 긴장한 이겸이 어깨를 움찔댔다. 권태정은 제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큼 허리가 큰 것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빼냈다.

“바지는 한 사이즈 작으면 좋겠는데.”

“비율이 너무 좋으시잖아요, 지금. 그래서 다리가 기시니까 기장은 이 사이즈 기장이 맞는데 허리가 크신 것 같아요. 기장은 너무 예쁘게 떨어지니까 허리 수선만 해서 입으시는 게 더 예쁠 것 같은데…. 어떠세요?”

평소 퍼스널 쇼퍼의 감각이 워낙 좋다는 걸 알고 있는 권태정은 이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어 본 옷 사이즈를 바탕으로 해서 몇 벌을 더 골라 계산을 부탁했다.

거기 있는 걸 다 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이겸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당히 티셔츠와 겉옷, 바지를 일곱 벌씩만 골랐다. 일주일은 7일이니 적어도 일주일 동안 매일 다르게 입을 옷은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이유에서였다.

“고객님, 치수 재는 것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치수를 재느라 퍼스널 쇼퍼에게 잡혀 어색하게 팔을 벌리기도 하고, 또 가만히 서 있기도 한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닌 것들도 이겸과 함께 있으면 자꾸 웃게 되곤 했다. 좋아해서 그런 건가. 이런 거 누구한테 물어보지. 기정이 형한테 물어볼까. 아, 누나가 더 잘 알려나. 확실한 것은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실장님.”

치수를 재자마자 쪼르르 와서 옆에 앉는 이겸의 뺨을 톡 건드린 권태정이 웃었다.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라 그런지 더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왜 그렇게 긴장했어.”

“…옷 너무 많이 사 주신 것 같아요. 전 하나만 사는 줄 알았는데….”

“어제 너 잘 때 또 해서 입고 자던 옷에도 내 거 다 묻었거든.”

“…….”

“최소 두 벌이고 앞으로도 또 그럴 수 있으니까 미리 사 주는 걸로 하자. 그럼 됐지?”

더 대꾸도 못 하고 몸을 돌려 바로 앉는 이겸의 목덜미를 손으로 쥔 권태정이 가볍게 주무르다가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이겸의 뺨을 조몰락거렸다. 손이 아니라 입을 대고 싶고, 혀로 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을 때쯤 쇼핑백을 든 퍼스널 쇼퍼가 다시 나타났다. 그제야 권태정은 손을 떼었다.

“바로 차에 실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바지는 수선 마치는 대로 실장님 댁으로 직접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네. 오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늘 찾아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든 연락 주시면 최대한 시간 맞춰서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고객님께서도 옷 예쁘게 입으시고, 입으시다가 수선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겸은 저에게 명함을 내미는 유지연에게 꾸벅 인사하며 공손히 명함을 받았다. 제가 돈을 낸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이런 곳에 올 일도 없을 텐데 명함을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친절한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라 조심히 받아 구겨지지 않게 잘 챙겼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인사하는 유지연에게 인사한 이겸은 문이 닫힌 후에야 긴장이 풀려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낯선 곳을 다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권태정과 다니는 모든 곳은 전부 다 친절하고, 늘 웃는 사람들뿐이라 어딜 가든 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직 면회 때까지 두 시간은 남았는데 잠깐 집에 들러서 쉬다 갈까? 여기서 집 바로거든. 병원도 집에서 별로 안 멀고. 아, 여기서 말하는 건 내 집. 어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은 일에도 제 의견을 묻고 허락을 구하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지도 않은 제 동의 하나에 권태정이 또 웃었다. 이겸은 그 얼굴을 마주하며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내일이… 권태정을 볼 수 있는 두 달이 아주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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