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70화 (70/174)

#70

“대충 설정은 다 했고…. 지금 쓰는 폰 좀 줄래? 번호랑 옮겨지나 봐 줄게.”

슬그머니 고개를 든 이겸이 발긋해진 얼굴로 제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스무 살짜리가 쓰기에는 지나치게 올드한 휴대폰을 받은 권태정은 폴더를 열어 이겸의 연락처로 들어갔다. 안에는 스무 개 정도 되는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간병인님 다음으로 보이는 강지훈 형이라는 이름을 본 권태정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고양이 탈을 쓰고 있던 놈 이름을 보니 자연스럽게 그 친구라는 병신이 같이 떠올랐다. 그 새끼 어디서 사람 구실이나 하고 있으려나.

그때 확 죽여야 했는데. 제 발목을 잡고 싹싹 빌다가 빌빌대며 기어서 도망가던 모습이 저절로 머리에 맺혀 아주 불쾌했다. 권태정은 이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다시 좋은 생각을 머릿속에 채우려 애썼다.

“음….”

그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자 방송국 강 피디님과 이 피디님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무심히 그 위를 보던 권태정은 조금 더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다. 그 뒤로는 사채업자, 세탁소 아주머니, 슈퍼 아저씨가 이어지다가 제 번호가 나왔다.

실장님. 그 세 글자에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였다. 권태정은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이겸이 저장한 그 이름을 보다가 마저 스크롤을 내렸다. 그 아래로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몇 개, 그리고 방송국 백윤정 작가님이라는 저장명이 보였다.

두 명의 피디와 한 명의 작가가 이겸에게 연락을 지속적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카페로 찾아왔던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워낙 예전 폰이라 바로 옮겨질 것 같진 않은데.”

“아…. 그럼 제가 따로 저장 다시 할게요. 저장된 것도 많지 않아서 금방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연락 안 하는 분들 전화번호도 많고 해서….”

“방송국 사람들 연락처가 세 개나 되네. 이 사람들이 다 연락하는 거야?”

“네….”

그냥 번호를 삭제하거나 차단해 버리고 모른 척을 할까 생각하던 권태정은 짧게 숨을 내쉬곤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뒤에서 유치하게 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겸에게 어느 정도 말할 걸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난 네가 방송 안 나갔으면 좋겠어.”

“…아….”

이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묻지 않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실장님께서는 철거가 무사히 되는 걸 바라시니까….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방송이 나가면 철거가 힘들어지는 거 맞죠?”

“응. 맞아. 솔직하게 말할게. 난 여기가 더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빨리 무너지면 좋겠어. 이제 주민들도 다 나갈 건데 무너지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철거촌에서 나가는 주민들 안에 저와 할아버지는 아직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번씩 확 다가오는 현실의 막막함은 늘 이겸의 입을 막곤 했다.

“걱정하지 마. 너랑 어르신은 내가 책임질 거니까.”

“…네?”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의 소리였다. 이겸은 ‘책임’을 말하는 권태정을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들은 그대로야. 내가 책임진다고. 여기 무너진다고 너까지 무너질 거 없잖아.”

“…….”

“깡패 도움받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세요?”

울 것처럼 흔들리는 눈망울이 애처롭고 예뻤다. 권태정은 시선을 내려 그 흔한 자기 사진 한 장이 없는 이겸의 사진첩을 보며 스크롤을 내렸다.

있는 사진이라고는 음료 레시피를 찍어 둔 것, 전화번호가 적힌 이벤트 회사 간판 따위를 찍어 둔 게 전부였다. 권태정은 휴대폰을 닫고 대답을 기다리는 이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자꾸 고백하게 하지 마.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

“그냥 네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해.”

손을 들어 뺨을 톡 건드리니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권태정은 제 손가락 위로 떨어진 이겸의 눈물에 입술을 대고 약하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눈물이 맛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음 안 받아도 되니까 도움은 받아.”

“…….”

“그 핑계로 얼굴 좀 계속 보게.”

권태정이 웃자 이겸은 더 울었다. 얼굴이 흠뻑 젖도록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우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이 몸을 기울였다. 따뜻한 팔을 잡아당기자 저보다 작은 몸이 쉽게 다가왔다.

도움을 무기 삼아 협박해 강제로 마음을 받으라고 해도 받아 줄 만큼 이겸의 마음은 약해진 상태였다. 권태정은 그걸 알면서도 뭔가 관계의 이름을 만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약해진 틈을 타서 비겁하게 파고드는 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겸이 두 손으로 직접 연 마음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싶었다. 저를 향해 달려 나오는 이겸을 마주하며.

“다른 사람 도움받지 마. 내가 다 해 줄 수 있으니까.”

“…….”

“구대범도 내가 막아. 그딴 놈 나한테 상대 안 돼. 아무 걱정도 할 거 없어. 빚도 바로 해결해 줄 수 있어.”

권태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겸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애처로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솔직히 동시에 들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생각이 맺혀 아랫배가 울렁였다.

“…지금도 너무 큰 도움 받고 있는데…. 빚은 말도 안 돼요. 그건 제 몫이니까 제가 일해서 갚을게요. 그리고 이미…. 큰돈도 보내 주셨잖아요.”

“아직 안 준 돈도 있는데.”

“이제…. 안 주셔도 돼요. 저번에 보내 주신 돈만 해도 정말 너무너무 큰돈이라….”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권태정의 말처럼 한 시간에 십만 원을 주기로 하고 같이 있기 시작한 게 맞지만, 이제 이겸은 권태정에게 그런 셈으로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게 돈이고, 십만 원 시급을 받을 일은 세상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는 권태정에게 돈을 받으며 만나는 건 싫었다.

“…안 받고 싶어요….”

같이 있는 시간이 돈으로 계산된다면 히트 사이클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붙어 있던 그 시간도 전부 돈으로 계산이 될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꽉 조이고 아파 이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권태정에게 마음이 가 버린 것을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권태정은 일단 이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저와 보내는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게 싫다는 듯 구는 이겸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어차피 빚이야 적당한 시기에 구대범에게 전부 갚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자까지 제대로 쳐서 준 다음 턱을 구둣발로 걷어차 얼굴을 뭉갤 생각을 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럼 이제 진짜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같이 있는 거네.”

울어서 발긋해진 눈가처럼 귀 끝이 달아오르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눈가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입 맞췄다.

“사실 난 그런지 좀 됐어.”

“…저도….”

“응?”

“……실장님 뵐 때… 돈 생각한 적 없어요…. 돈 주시니까 만나는 거라고…. 그런 생각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안 했어요.”

작게 울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크게 울렸다. 권태정은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믿어 달라는 듯 용기 내어 말하는 이겸의 입술을 급히 머금었다. 전과 달리 저를 향해 경계심 없이 벌어지는 입술 때문에 진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씨발, 언제 이렇게 길들여졌지.

“…으응….”

품에 안고 한참 혀를 문질러 주다가 쪽 빨며 입술을 떼자 이겸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더?”

겨우 작게 끄덕이는 게 이겸의 용기라는 것을 알기에 웃은 권태정이 다시 입술을 머금고 온몸이 녹아 버릴 만큼 부드럽게 한참이나 입 안을 혀로 만져 주었다.

그에 완전히 녹아내린 이겸은 권태정에게 완전히 기댄 채 눈도 뜨지 못하고 그 키스를 전부 받았다. 숨이 부족하고,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이어졌는데도 입술이 떨어질 때는 아쉬울 만큼 기분이 좋았다.

“하아….”

“하…. 이겸아.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이라는 말에 숨을 작게 헐떡이며 이겸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하도 빨아 살짝 더 통통해진 이겸의 입술을 손끝으로 건드린 권태정이 싱그럽게 웃었다.

“나 오늘 집에 갈 거거든.”

“아….”

집에 간다는 말에 이겸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권태정이 집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서운해할 일도, 아쉬워할 일도 아닌데 마음이 이상했다.

“나랑 같이 가 줘.”

“…네?”

“우리 집에 가 있자.”

“…저도요?”

“그럼 나 혼자 가? 너 여기 두고? 자기야. 이제 돈 안 주니까 나랑 오래 같이 있기 싫어?”

큰 몸을 구겨서 안기듯 치대는 권태정에게 밀린 이겸이 밀착되는 몸과 아침이라 더 짙게 배어 나오는 페로몬 향에 어쩔 줄을 몰라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맸다. 그런 이겸을 알면서도 권태정은 더 그 작은 몸으로 제 몸을 겹쳤다.

“생각해 보니까 크고 좋은 집 두고 여기서 둘이 이럴 필요 없을 것 같더라고. 뭐 여기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더 큰 집 두고 여기 있을 거 없잖아.”

“…….”

“같이 가자. 응? 며칠만이라도.”

이겸은 권태정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커서 이 집에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괜찮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아는 이유였다.

“…네. 갈게요. 같이.”

분명한 대답에 이겸의 품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든 권태정이 웃었다. 그 웃음에 이겸의 심장은 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권태정이 좋다는 생각 외에는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 * *

제가 사 준 옷과 신발 정도만 챙겨 집을 나온 권태정은 뒤도 보지 않고 철거촌을 나서 제집으로 향했다. 뭐 이대로 영원히 안녕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제집에서 이겸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더 쾌적한 곳으로 가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이겸이 같이 가자는 제 말을 흔쾌히 들어준 것이었다. 이제 이겸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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