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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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객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할아버지의 식사를 오랫동안 챙긴 세탁소 아주머니의 연락으로 온 다람동 주민 몇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오랫동안 한동네에 살았던 주민들이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보이고 이겸을 위로했다. 이제 겨우 스물이 된 이겸이 빚을 끌어안은 채 이제 정말 혼자 남았다는 게 다람동 어르신들에게는 더 슬픈 일인 것처럼 보였다.
이겸을 끌어안고 우는 세탁소 아주머니를 보며 권태정은 그래도 이겸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더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식사까지 하고 한참이나 있다가 조문객이 전부 빠져나가고 나자 빈소는 다시 적막해졌다. 이겸은 제단이 있는 곳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멍하니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뭐 좀 먹을래?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작은 포도 주스 병을 가지고 온 권태정이 뚜껑을 열어 이겸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괜찮다고, 마시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이겸은 저를 걱정하는 권태정을 생각해 내키지 않아도 주스를 받아 한 모금 넘겼다. 저와 같이 며칠째 뭔가 제대로 먹지 않고 있는 것은 권태정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쓰러져서 수액이라도 맞았다지만, 권태정은 그런 것도 없어 더 힘들 것이었다.
“…실장님 뭐라도 드세요. 그렇게 계속 안 드시면 큰일 나요.”
“음, 그럼 나랑 같이 밥 먹자. 몇 숟가락이라도. 응?”
옅은 미소를 보며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슬픔에만 잠겨 할아버지를 걱정하게 하지 않으려면 버틸 힘이 필요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겸은 권태정과 함께 접객실로 향했다. 식사 준비를 하면 될지 묻는 상조회사 직원을 보며 권태정은 맵지 않은 것으로 준비해 달라 말했다. 곧 상이 차려지고 하얀 밥과 북엇국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매운 건 너무 자극적일 것 같아서. 천천히 먹어.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네. 실장님도 드세요.”
“응.”
딱히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이겸을 먹게 하려면 저도 먹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권태정은 밥을 반 정도 국에 말았다. 그리고 두어 숟가락을 먹고 이겸을 살폈다.
다행히 이겸도 국에 말아 조금씩 밥을 먹고 있었다. 권태정은 살려는 의지가 보이는 이겸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장례식장에는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오래 머물면서 상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어릴 때 집안 어른께서 돌아가신 적은 있어도 그 이후 가족장을 치른 적이 없어 권태정에게도 지금 이 장소와 분위기는 꽤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도대체 왜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제가 철거촌 일개 주민의 장례식을 치러 주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누구도 감히 왜 그런 일까지 하냐고 묻진 않지만, 아까 장례식장에 온 주민들의 눈에서 충분히 그런 궁금증을 느낄 수 있었다.
“다 먹었어?”
“네….”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밥 반 공기와 국물 정도는 먹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제 말을 듣고 저를 위해 먹어 준 것이라는 걸 알기에 권태정은 뭔가를 더 먹으라고 이겸에게 권하지 않았다.
이겸이 다시 제단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본 권태정이 믹스커피를 두 잔 탔다. 평소 믹스커피를 마시지를 않아 당연히 탈 일도 없어 이 행동 자체가 무척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으나 그래도 이겸과 달착지근한 걸 한 잔씩 마시면 좋을 것 같아 믹스커피를 두 봉지씩 넣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적당히 부어 휘저었다.
다소 어색한 행동에 상조회사 직원이 제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권태정은 괜찮으니 이제 전부 퇴근하라고 전하고는 컵 두 개를 들고 빈소로 향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이 정도는 직접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거 마셔.”
이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영정 사진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권태정은 그 옆으로 앉아 종이컵을 내밀었다.
“뜨거워, 조심.”
조심히 받아 안에 든 커피를 본 이겸이 호…. 불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적게 들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달고 진했다.
“물 너무 조금 넣었나? 이런 건 진해야 맛있는 거 아냐?”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이겸의 옆으로 주저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한 것보다 꽤 진해서 나쁘지 않았다.
“…피곤하시죠.”
“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우리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는 거잖아. 당연히 피곤하지.”
“…할아버지 가시는 길 편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실장님. 이렇게 좋은 병원, 병실, 치료…. 장례식장까지 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인데…. 실장님 덕분에 할아버지 마지막에는 편히 계시다가 가실 수 있었어요.”
진심으로 다가오는 인사에 권태정은 괜히 커피만 홀짝였다. 이런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제가 한 일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널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너한테 소중한 분이니까.”
“…….”
“할아버지가 힘들면 너도 힘들 거 아니까. 그래서 기꺼운 마음으로 하긴 한 건데…. 인사까지 받긴 좀 부끄럽다. 돈만 있으면 다 하는 건데 뭐. 내가 직접 나서서 한 일도 별로 없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없으면 절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좋아해도…. 그 가족을 자기 일처럼 챙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컵을 쥔 손끝이 홧홧했다. 뜨거운 커피 때문이기도 하고, 이겸의 진심이 묻어서이기도 했다. 권태정은 모두가 퇴근하고 고요해진 빈소 안으로 퍼지는 이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 가정교육 잘 받았다니까.”
이겸의 어깨를 슬쩍 민 권태정이 커피를 다시 한 모금 호록 마셨다. 그런 권태정을 본 이겸이 작게 웃음 지었다. 권태정은 며칠 만에 보는 이겸의 웃음에 머리를 쓰다듬고, 짓물러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붉어진 이겸의 눈가에 입 맞췄다.
“아이고, 분위기 좋으신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크게 목소리가 울리는 것에 놀라 빈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본 이겸의 손에서 컵이 떨어지며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권태정은 아연한 이겸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구대범이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네. 빚만 오지게 지고 혼자 튄 우리 채무자님 조문할 수 있어서.”
권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단추를 잠그고 구대범에게 다가갔다.
“형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태정아. 나도 내가 빚지고 뒈진 노인네 조문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네.”
“형,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 못 배운 티 나요.”
“그랬어? 미안해서 어쩌나. 사채업자 새끼가 잘 배워서 뭐 해. 안 그래? 태정아, 나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좀 비킬래?”
“싫은데요.”
싱긋 웃으며 이겸의 막을 막고 선 권태정을 보고 헛웃음을 지은 구대범이 비키라며 권태정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권태정은 웃음이 싹 사라진 얼굴로 저에게 닿은 손을 잡아 그대로 팔을 꺾었다.
“어디에다 감히 손을 대.”
바닥으로 확 밀어 버린 권태정이 불쾌하다는 듯 손을 털었다. 그리고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겸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방에 들어가 있어.”
“…실장님은요?”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괜찮다고 다독인 권태정이 접객실 쪽으로 이겸을 가볍게 이끌었다. 그걸 본 구대범이 바닥에서 일어나 이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야, 너! 카페 갔더니 관뒀다더라? 누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관두래? 집에도 없던데, 씨팔. 번호도 바꿨더라? 장난해, 나랑? 확 그냥 씨팔!”
빈소 안으로 구대범이 악쓰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금방이라도 다가와 때릴 것처럼 손을 치켜드는 구대범을 보며 이겸은 그제야 제가 그동안 구대범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카페를 관두고, 다람동에서 나와 권태정의 집으로 가고, 또 휴대폰을 바꿀 때도 구대범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연락이 되지 않으면 화가 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죄송해요. 일이 좀 있어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생각을 못 해? 생각 못 하는 거 씨팔, 좋아하네. 야, 네까짓 게 일은 무슨 일? 이제 뭐 권태정 잡으니까 나도 우습고 막 그래? 그럴 거면 몸이나 제대로 팔아서 빚부터 갚아 달라고 했어야지. 재벌 아들 활용을 그렇게 못해서 되겠어? 어?”
“…재벌 아들이요?”
재벌 아들이라는 말에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구대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재벌 아들? 누가?
“이야, 연이겸. 모르는 척을 하네, 이제? 하긴 그 반반한 얼굴로 태성가 막내아들 꼬셨으면 말 다 했지. 그래, 그 정도 내숭은 떨어야지.”
“…태성가 막내아들이요?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네 옆에서 나 존나 야리는 권태정이지. 이야, 이겸아. 너 배우 해라. 연기 존나게 잘하는데.”
일을 벌이다 못해 아주 엿같이 벌인 구대범을 가만히 보던 권태정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권태정을 보고 움찔한 구대범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야. 떠들려면 뭘 좀 알고나 떠들어.”
“뭐? 야?”
“이겸이가 아니라 난데 어쩔래.”
“…뭐?”
“마음 얻으려고 내숭 떤 게 나라고, 이겸이가 아니라.”
짜증이 지나치게 나서 정말 눈깔이 확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구대범의 어깨를 밀며 점점 더 앞으로 다가갔다. 뒷걸음치던 구대범이 한쪽에 세워진 근조화환에 걸려 같이 엉망으로 넘어지자 그대로 시선만 뚝 떨어뜨려 깔아본 권태정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못 알아 처먹어? 내가 이겸이 좋아하는 거라고.”
“…너, 너… 진짜였어?”
“로열 캐피털 날려 줄까? 아니, 대국물산 날릴까?”
태성이라면, 아니 태성까지 갈 것도 없이 권태정 혼자의 힘으로도 로열 캐피털 하나쯤 날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을 구대범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연이겸이 권태정의 마음에 들려고 난리를 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절대 여기 와서 권태정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구대범은 화환과 나동그라진 채 후회했다.
“이겸이 빚 내가 갚고, 로열 캐피털까지 없애 줄 테니까 가서 닥치고 가만히 있어. 한 번만 더 이겸이한테 와서 못 배운 티 나는 말 찍찍해 대면 그땐 대국물산도 날릴 거니까 알아서 하고.”
“야, 태정아. 그게 아니라….”
“그리고 씨발, 맘에 안 드니까 패려고 바로 손부터 올라가네? 한두 번 패는 게 아닌가 봐?”
그동안 이겸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권태정의 눈동자에 살기 어린 이채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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