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85화 (85/174)

#85

짙게 풀어 그 향이 잔뜩 배게 한 뒤에야 권태정은 다시 그 옷을 이겸에게 주었다. 짙은 페로몬 때문인지 몸을 웅크리고 앓던 이겸은 옷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떨었다.

“…으응….”

페로몬을 갈무리하려던 권태정은 문득 이겸과 같이 있던 놈들을 떠올렸다. 베타인 것 같기는 했지만, 전에 그중 하나의 친구는 알파였고, 오늘처럼 술자리가 생기거나 할 때면 이겸이 알파와 한 자리에 마주하게 될 일도 분명 생길 것이었다. 우성알파는 극히 드물어도 일반 알파야 널리고 깔렸으니까.

게다가 며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보니 주문 외에도 이겸에게 뭔가 웃으며 묻는 새끼들을 몇 볼 수 있었다. 이겸이 억제제를 먹는다고 해도 오메가라는 것까지 내내 완벽히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겸은 워낙 예뻐서 오메가가 아니어도 누군가의 시선을 너무나 잘 끌었다.

제가 항상 곁에서 이겸을 지키면 좋겠지만, 24시간 잠시도 떨어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권태정은 갈무리하려던 페로몬을 조금 더 확 풀었다.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드라이한 와인향과 장미향이 뒤섞이며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이겸의 몸을 완전히 제 페로몬으로 뒤집어씌운 뒤에야 권태정은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정확하게 상황을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페로몬에 반응해 몸을 벌벌 떠는 이겸의 등을 쓰다듬은 권태정이 옆으로 몸을 뉘었다.

“이리 와.”

제가 여기 있는데 이겸이 제 옷 따위를 끌어안고 있는 건 싫었다. 놓지 않으려는 것을 잘 달래 옷을 뺏어 대충 위로 던진 권태정이 이겸의 머리 아래로 팔을 넣으며 몸을 당겼다.

옷을 달라는 듯 손을 움직이던 이겸이 익숙한 느낌에 권태정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품으로 파고들었다. 옷이 안겨 있던 자리에는 이제 단단하고 따뜻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권태정이 있었다.

“…실장님….”

“응.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이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천천히 마른 등을 쓰다듬어 준 권태정이 몸을 웅크리듯 이겸을 가득 품에 안았다.

“…….”

이겸을 안는 순간 권태정은 며칠 동안 집을 놔두고 차에서 밤을 지새운 것도, 또 이겸의 주위를 맴돌며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전부 다 괜찮아졌다.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과정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쉬울 게 없었다.

“잘 자, 이겸아.”

매일 밤, 굳게 닫힌 대문을 보고 앉아 생각하기만 했던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지금 제 품에 이겸이 있으니까. 정말 그거면 충분했다.

* * *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이겸은 머릿속을 스치는 약한 두통에 살짝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는 좀 아프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고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머리 아파.”

어제 형들과 치킨집에서 술을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잘 와서 자고 있는 걸 보니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취해서 옷도 갈아입지 못한 것을 본 이겸이 몸을 돌려 앉아 서랍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가물가물한 정신 안으로 권태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

이제는 습관이 된 것만 같았다. 특별히 뭔가 권태정을 떠올릴 물건이나 일이 있지 않아도 그 얼굴은 아무 때나 불쑥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괜찮아질 수 있다고 늘 가다듬는 마음을 무너뜨렸다. 이겸은 다시 와르르 무너져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제 마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

답답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이겸은 방 안에 가득 찬 익숙한 페로몬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인지한 순간 다시 권태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분명히 권태정의 페로몬 향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며칠이나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맡았던 페로몬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겸은 멍하니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권태정이…. 실장님이 여기 있었다고 생각하니 눈동자가 확 젖어 들었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맺히기도 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떡해…. 기억이 안 나. 무엇보다 슬픈 것은 권태정이 왔었다는 흔적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날마다 생각하는 것을 억누르려고 하면서도 집에만 오면 밤새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하면서 떠올린 그 얼굴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해 속상했다.

“…….”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이겸은 휴대폰을 들어 ‘실장님’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눌렀다. 까만 화면 위로 ‘실장님’이라는 글자가 크게 뜨고,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이겸아.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것에 잠시 말문이 막힌 이겸이 다시 넘치는 눈물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어제…. 집에 오셨었어요?”

-응. 술 많이 취해서 데려다주러.

“아….”

여기 정말 왔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심장이 멋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겸은 들뜬 마음 위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술 마시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너 뭐 하는지 내가 매일 보거든.

“…….”

-화났어?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네가 어디서 일하는지 또 누굴 만나는지, 안전은 한 건지 내가 알아야 마음이 놓이니까.

저를 매일 감시한다고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겸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저 궁금한 게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왜 뒤에서만 보시는 거예요?”

-…….

“…일부러 피하지는 않겠다고 말씀드린 거 거짓말 아니에요. 그리고 실장님이랑 약속한 시간도…. 아직 남았고….”

다른 이유보다도 저 역시 권태정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가장 큰 이유는 끝까지 소리 낼 수가 없었다. 이겸은 괜히 이불 끄트머리만 꾹꾹 접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짓눌렀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 할 것 같아서. 내 마음대로 하자면 시간이고 뭐고 종일 네 뒤 졸졸 쫓아다니면서 멋대로 굴고 싶은데 그럼 나한테 질릴까 봐.

“…….”

-어른스러운 척하는 중이야. 이제 그만할까?

입술을 감쳐물고 있던 이겸이 이불자락을 꼭 쥔 채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네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너무 작아서 권태정이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알았어. 이제 그만할게. 시간도 얼마 없는데.

“…….”

-오늘 시간 어때? 점심 같이 먹을까?

저의 그 작은 대답을 권태정이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통이 가신 머릿속에는 곧 권태정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카페 가기 전까지는 시간 괜찮아요. 오늘은 다른 아르바이트 없거든요.”

-다행이다. 그럼 지금이 아홉 시 반이니까…. 열한 시까지 갈게.

“…네.”

-이따 봐.

제가 끊지 않으면 전화가 끊기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듣고 있다가 전화를 먼저 끊은 이겸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반이 조금 넘었으니까 얼른 씻고,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 전에 방 청소를 먼저 하면 좋을 것 같아 이겸은 얼른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놓인 권태정의 옷들을 집어 들었다.

“…어….”

옷을 들어 가져오기만 했는데도 짙게 나는 페로몬 향에 멈칫한 이겸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까이해 숨을 들이마셨다.

“…….”

방 안에 퍼진 페로몬보다 더 짙은 페로몬 향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넘어 열이 살짝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권태정의 페로몬 향을 더 가까이하고 싶어 티셔츠 위로 입술과 코를 묻었다.

“…하아….”

권태정의 페로몬이 몸속 깊은 곳까지 퍼질 때마다 허벅지가 오므라들고 발끝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또 숨이 가빠지기도 했다. 이겸은 아랫배로 고이는 울렁임에 작게 헐떡였다.

“으응…. 아….”

아랫배에 고인 감각은 기어이 더 아래로 내려가 깊은 곳을 감쌌다. 성기를 만지고 싶은 느낌에 놀란 이겸이 겨우 옷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권태정이 제 몸 여기저기를 만져 주고, 또 입으로 머금었던 게 떠올랐다. 끌어안고 싶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겸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나 봐….”

조금 전까지 제가 어디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 떠올린 이겸이 잔뜩 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아오른 성기와 살짝 젖은 속옷의 느낌에 무너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아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혼자서 성기가 가라앉고, 울렁임이 조금은 가실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 * *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던 이겸은 제 옷의 대부분, 그러니까 권태정이 사 준 좋은 옷들이 거의 다 권태정의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짐을 가져다주시려나…. 이겸은 권태정을 떠올리며 전에 그가 사 준 연한 노란색 니트를 입었다.

준비할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있어 여유롭다고 생각했었는데 권태정의 옷을 안고 시간을 보내고, 또 화장실에서 몸을 가라앉히느라 또 한참을 보낸 덕분에 시간이 촉박했다. 이겸은 나가기 전 거울을 한 번 보고 문을 열었다.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조금 못나 보이는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겸은 진심으로 앞뒤 보지 않고 답답하다고 계속 술을 마신 것을 후회했다.

열한 시가 되기 십 분 전에 골목을 걸어 어귀로 나간 이겸은 벌써 와서 차에 기대어 선 권태정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그냥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긴장이 되고 어색했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

그런 이겸을 발견한 권태정이 웃음 지으며 이겸에게 다가왔다. 이겸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괜히 권태정의 셔츠 단추를 바라보았다.

“속은 어때? 머리는 안 아파?”

“아…. 속은 괜찮아요. 머리는 아침에 조금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

“내가 그건 못 봤거든.”

낮지만, 싱그러움이 뒤섞인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이겸은 저를 보고 미소 짓고 있는 권태정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맥주 한 잔이랑…. 소주랑 맥주 섞은 거 세 잔? 정도요.”

“섞은 걸 세 잔이나 마셨어? 큰 컵에?”

“오백 밀리 잔에 반도 안 되게 담아서요….”

“그래도 너무 많은데. 처음 마신 걸 거 아냐.”

“…네.”

“씨발, 그 새끼는 마시려면 지나 마시지. 아, 그냥 들어가서 중간에 데리고 나올걸.”

성질을 내는 권태정을 바라보던 이겸이 작게 웃었다. 평소에 제가 봐 온, 좋아한 권태정의 모습 그대로라 어쩐지 안도가 됐다. 물론 그렇다고 아직 모든 게 다 괜찮아진 건 아니지만.

“일단 타. 가면서 얘기하자.”

“…네.”

자연스럽게 이겸의 손을 잡아 차로 가던 권태정이 뭔가 생각난 듯 이겸을 돌아보았다.

“삐약 한 번만 해 봐.”

“…삐약?”

하라고 해서 했다기보다는 그게 뭔지, 왜 하라고 하는 건지 궁금해 되물은 것뿐인데 권태정은 상당히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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