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87화 (87/174)

#87

“…….”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네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래서 그때부터 생각해 봤어. 내가 너랑 뭘 하고 싶은 건지.”

평소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이겸의 마음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스며들었다. 조금도, 정말 아주 조금도 남지 않고 전부 권태정의 목소리를 흡수한 이겸의 마음은 그 안에서 일렁이는 분명한 감정과 마주했다. 너무나 분명하지만, 바보같이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만 있는 감정과.

“헷갈리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았어. 너무 분명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어.”

“…….”

“난 너랑 연애하고 싶어.”

연애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이겸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저를 보며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권태정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흔들림이 하나 없는 그 눈을 보며 이겸은 입술만 달싹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설렘 같기도 하고 떨림 같기도 한 미열을 머금은 숨이 흐트러졌다.

두근거림을 담은 고요 사이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권태정의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음식이 놓인 카트가 들어왔다. 이겸은 목까지 빨개진 채 입술을 감쳐물며 고개를 숙였다.

‘난 너랑 연애하고 싶어.’

만나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 말에 부끄럽거나 떨린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만날 상황도 아니고, 또 마음도 없어 거절할 때마다 늘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늘 긴장을 해야만 했다.

가끔 상대가 민망해 말을 바꾸며 욕을 하거나 화를 내도 저 같은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 폭언을 견디기도 했었다.

“…….”

분명히 그랬었는데 권태정이 하는 말은 달랐다. 그 말 하나만 믿고 이대로 몸을 기울여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저렇게 멋있고 다정한 사람과 연애하면 어떤 기분일까.

잠들기 전 내내 제 등을 쓸어 주던 손길과 저를 보고 고개를 기울여 웃던 얼굴 같은 것을 떠올린 이겸이 금세 열기가 오른 손끝으로 괜히 식탁 위를 문질렀다.

제 처지가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다면 이 말이 참 기쁘기만 할 텐데 저는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빛이 들지 않는 밑바닥에 있었다.

연애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그런 곳에. 사실 권태정의 말에 설레고 떨려 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이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음식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나가는 직원을 본 이겸이 저를 보고 있는 권태정과 다시 눈을 맞췄다.

“이겸이 너도 남은 한 달 동안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나랑 뭘 하고 싶은지.”

“…….”

“그래 줄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입술 안쪽 부드러운 점막을 꾹꾹 깨물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싱그럽게 웃는 권태정을 보니 마음이 아플 만큼 두근거리고 또 조여들었다.

이겸은 알고 있었다. 권태정의 말을 듣는 순간,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이미 저의 답은 나와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소리 낼 자격이,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서 이겸은 조금 속상했다.

“…….”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 * *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이겸은 자꾸만 넋이 나갔다. 이유는 당연히 권태정 때문이었다.

‘난 너랑 연애하고 싶어.’

연애 같은 것을 할 상황도 주제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권태정의 그 말은 내내 이겸의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었다. 조금도, 정말 조금도 떨어지지 않아 곤란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아, 어서 오세요.”

멍하니 카운터에 서 있던 이겸은 앞으로 사람의 형체가 보이는 것에 놀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입에 밴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얼마 전 저에게 명함을 주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저 오늘은 그린티 라테 제일 큰 사이즈로 주시고, 음…. 바스크 치즈 케이크도 하나 주세요.”

“네, 그린티 라테 큰 사이즈랑 바스크 치즈 케이크 한 조각 하시면…. 만천 원입니다.”

카드를 받아 계산한 이겸은 계산이 다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저를 보고 있는 남자와 다시 눈을 맞췄다. 남자는 뭔가 굉장히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인 있다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

“이렇게 알려 주실 줄은 몰랐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페로몬이요.”

이겸은 도대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애인 이야기는 왜 꺼내고, 제가 뭘 이렇게 알려 줬다는 건지, 또 페로몬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쪽한테 알파 냄새 나요. 몰랐어요? 애인이 묻혀 둔 거 아니에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던 이겸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자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권태정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남자가 한 이상한 말 같은 것은 금세 머리에서 지워지고 심장이 쿵쿵 요란히 뛰기 시작했다.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알파 같은데 그런 애인이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되지 왜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요.”

서운하다는 듯, 또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볼멘소리를 내는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선을 준 이겸이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권태정이 성큼 다가와 한 손으로 카운터를 짚은 채 삐딱하게 섰다.

“그런 애인 있는 거 알았으면 그냥 꺼지면 되지 왜 사람을 귀찮게 할까.”

우성알파의 위압감에 짓눌린 남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 놀란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아직도 안 꺼졌냐는 눈으로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남자는 대충 실례했다는 듯 묵례하곤 진동벨을 들고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갔다.

“다신 못 오게 조져 줄까?”

“…괜찮아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오해?”

이겸은 남자가 주문한 그린티 라테를 만들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권태정에게 설명했다. 애인이 있는데 말을 안 하고 명함을 받아 화가 난 것 같다는 말 뒤에 저에게서 알파 냄새가 난다는 이상한 이야기도 했다는 말이 덧붙었다.

권태정은 술에 취해 잠든 이겸의 온몸에 제 페로몬을 뒤집어씌웠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을 뒤집어씌운 효과가 확실해 다행이었다.

“어제 내가 너 데려다줬댔잖아.”

“…네.”

“물 주려고 잠깐 냉장고 연 사이에 보니까 네가 내 옷을 안고 자더라고.”

그린티 라테 위에 휘핑크림을 짜던 이겸이 놀란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눈은 동그래지고 귀와 뺨, 목은 새빨개지는 게 무척 귀여웠다.

“그래서 옷에 페로몬 묻히면서 너한테도 묻혔거든.”

“…아….”

“다른 새끼들이 너한테 치근대는 거 싫어서 그런 건데 효과 있어 다행이네.”

납작하지 않고 위가 동그란 돔리드를 씌운 이겸이 화끈대는 얼굴로 치즈 케이크까지 꺼내 트레이에 놓은 뒤 진동벨을 호출했다. 곧 다시 카운터 쪽으로 온 남자가 권태정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음료와 케이크가 든 트레이를 가지고 자리로 도망쳤다.

“화났어?”

“…네?”

“생각해 보니까 내 마음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미안해.”

불쌍한 척을 하자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권태정은 카운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잡아 달라는 듯 다가오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이겸이 살짝 그 손끝을 잡았다.

“하지 말라면 다음부터는 안 할게.”

권태정의 기다란 손끝을 만지작대던 이겸이 발긋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제가 권태정의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어쩐지 좋았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다는 것도 싫지 않았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술 때문에 제가 아무것도, 정말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화날 것 같은데 실장님이라서 괜찮아요.”

“…….”

“제 생각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다른 알파들이랑 문제 생길까 봐 걱정돼서….”

도대체 얼마나 착하면 저의 음험하고 질 낮은 수작을 저렇게 깨끗하게 해석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권태정은 조금도 꼬이지 않은 이겸의 말간 마음과 마주하며 웃음 지었다.

“응, 그것도 맞고.”

“…….”

“내 거라고 다른 새끼들한테 알리고 싶은 것도 맞고.”

“…….”

“아직 완전히 내 거 아니긴 하지만.”

싱그럽게 웃은 권태정이 잡힌 손을 돌려 이겸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단정히 깎인 깨끗한 손톱 위를 문지르다가 손가락 사이까지 만지니 이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끝나려면 한 시간쯤 남았지?”

“…네? 아…. 네.”

“기다릴게. 밖에서 몰래 보면서 기다리는 거 너무 속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좋다.”

나긋한 목소리와 시선에 이겸은 이제 숨을 쉬는 법도 잊은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손을 만지게 두고, 다가오게 했다가는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아 뒤로 살짝 물러난 이겸이 아쉽게도 스르륵 풀리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핫초코 만들어 드릴까요?”

“응. 네 것도 만들어서 같이 마시자. 계산은 이걸로 같이….”

지갑을 꺼내려는 권태정의 팔을 잡아 얼른 말린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겸의 마음을 알아차린 권태정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팔을 놓은 이겸이 두 잔이 나올 만큼의 우유를 스티머에 부었다.

“이겸아.”

“…네?”

우유같이 말간 애가 우유를 데우고 있는 걸 보니 너무 귀여워 그냥 자꾸 건드리고 싶었다. 괜히 이름을 불러 눈을 한 번 더 맞추고 싶기도 하고, 이대로 카운터를 뛰어넘어 들어가 파렴치한 짓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냥.”

“…….”

“예뻐서.”

이겸은 완전히 화르륵 달아오른 채 고개를 돌려 우유 거품이 나는 스티머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끝까지 열이 올랐다. 괜히 홧홧한 손끝을 앞치마 위로 문지른 이겸이 흘끗 권태정을 몰래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

아무래도 우유보다 제가 먼저 데워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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