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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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정은 차에서 잔 지 열흘째 되는 날, 차가 아무리 좋아도 차는 그냥 이동할 때나 쓰는 이동수단일 뿐이며 절대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빨간 컨테이너 안에 있는 소파에 누워 자는 게 몇십 배는 더 편할 것 같았다. 권태정은 시트를 뒤로 조금 젖히며 넥타이 매듭을 흔들어 느슨하게 풀었다.
피로가 누적이 되어 그런지 오늘따라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두통이 있기도 했다.
베타 경호원을 철거촌 입구마다 세우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직접 이 골목 어귀에서 이겸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켜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반대쪽 입구는 승합차 한 대를 구해다가 틀어막아 놔서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게 했으니 여기만 잘 감시하면 이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양쪽 입구를 밤새 돌아가며 마크하지 않아도 되어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했다.
<오늘의 마지막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서른두 살 회사원입니다. 저에게는 5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5년 내내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살면서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라디오도 열흘 동안 적막을 없애기 위해 하도 들었더니 이제 심야에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지 또 어떤 순서대로 진행이 되는지도 전부 파악이 될 정도였다. 권태정은 저와 같은 나이인 사람의 연애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제가 행복한 만큼 같이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친구가 며칠 전 갑자기 저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 물었지만, 자기가 저를 행복하게 해 줄 그릇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말만 반복하고….>
“지랄. 바람났네.”
씨발, 안 그래도 축축 처지는데 뭐 저딴 사연만 나오고 지랄이야. 욕을 내뱉은 권태정이 라디오를 끄고 눈을 감았다. 바깥 온도가 낮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몸에 한기가 돌았다.
감기 기운이 있는 건가 잠시 생각하던 권태정은 감고 있던 눈을 떠 고요한 골목 입구를 바라보았다.
컨디션이 안 좋으니 내일은 아침에 이겸이 아르바이트 가는 것만 보고 집에 가서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끝날 때쯤 데리러 가서 저녁에 맛있는 것을 먹이고….
이겸에게 뭘 먹이면 좋을지 생각하던 권태정이 으슬으슬한 느낌에 몸을 푹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매일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제대로 탈이 나려는 모양이었다.
아, 안 되는데. 이겸의 마음을 돌려 다시 저를 보게 만들어 제집으로 데려갈 때까지는 절대 지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이겸이 초록색 대문 안으로 저를 들어오게 하는 날까지라도 버텨야만 했다.
우성알파이기도 하고 또 평소에 워낙 운동을 많이 해 고작 이 정도로 지칠 체력이 아닌데 이상하게 도는 한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예민해졌다. 권태정은 인상을 쓰며 지끈대는 머리에 기어이 욕을 뱉었다.
하지만 권태정 머릿속에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 골목을 벗어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 * *
휴대폰 진동에 눈을 뜬 이겸은 화면에 뜬 강지훈의 이름을 보고 몸을 일으켜 앉아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어! 야, 너 아홉 시까지 나올 수 있어? 우리 동네 큰 슈퍼 창고 세일하는데 오늘 오기로 한 알바가 튀었대. 나 혼자 하기로 했는데 자리 하나 나서.
“아, 저 갈 수 있어요. 아홉 시까지 형 사시는 동네로 가면 돼요?”
-어어, 오면 전화해. 알려 줄게.
“네, 빨리 준비해서 갈게요.”
전화를 끊고 아직 일곱 시 반인 걸 확인한 이겸이 잠이 묻은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지훈이 사는 곳은 지하철을 타고 삼십 분 정도만 가면 되는 곳이라 제법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과 겹치면 지하철을 몇 대나 그냥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쫄쫄 나오는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린 뒤에는 권태정이 사 준 옷이 아니라 평소 제가 입던 티셔츠를 입고, 허름한 남방을 걸쳤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데 굳이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 조금이라도 옷이 상할 위험이 있는 곳에는 입고 싶지 않았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은 것을 확인한 이겸은 고등학교 다닐 때 책가방으로 쓰던 백팩 안에 혹시 땀이 많이 나면 갈아입을 여분의 티셔츠 한 장과 전에 오픈 행사 준비를 했더니 고맙다고 선물로 준 보조 배터리를 넣었다.
권태정이 사 준 새 휴대폰은 배터리가 아주 오래 가서 이제 저런 충전기가 필요 없지만, 혹시 몰라 챙긴 이겸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대문을 잠그고 골목을 나서며 이겸은 납작한 백팩을 앞으로 해 앞주머니에 열쇠를 넣었다. 십 분 정도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강지훈의 집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지하철역으로 가면….
“…어…?”
강지훈의 집 근처에 어떻게 가야 할지 떠올리며 골목을 나서던 이겸의 두 발이 무언가를 보고 멈추어 섰다. 여전히 가방을 앞으로 끌어안은 채 이겸은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까만 차, 너무나도 익숙한 권태정의 차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만나기로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여기 있는 건가 싶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다가간 이겸은 앞 유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안을 바라보았다. 운전석에는 조금 흐트러진 채 잠이 든 권태정이 있었다.
“…….”
깨어 있지 않고 잠든 권태정을 본 이겸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동시에 맺혔다. 아침 일찍 여기는 왜 오신 거지? 저번처럼 술을 드시고 오신 건가? 아니면 설마 여기서 주무신 건가?
멍하니 바라보던 이겸이 운전석으로 다가가 안이 잘 보이지 않는 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뜬 권태정이 창밖으로 보이는 이겸에 놀라 얼른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아…. 이겸아.”
놀란 권태정이 얼른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가 넘은 걸 보고 침음한 권태정은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차를 컨테이너 앞으로 뺐을 텐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새벽에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이겸에게 다 들킬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니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상 모른 채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묵직한 머리와 으슬으슬한 몸에 짜증이 치밀었다.
“…어젯밤부터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저 데려다주신 뒤부터?”
이겸은 어제 저를 만날 때와 똑같은 옷차림의 권태정을 보며 입 안에 고인 숨을 터뜨렸다. 권태정은 술을 마신 저를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 줄 때, 또 카페 일이 끝나고 집에 데려다줬을 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제 저를 데려다준 다음 집에 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와 옷, 그리고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권태정의 태도에 차에서 잤다는 쪽으로 더 확 무게가 실렸다. 이겸은 속상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네가 혼자 집에 있는 게 걱정돼서 그랬어.”
“…….”
“구대범 그 새끼도 나한테 깨져서 벼르고 있을 거고, 그 새끼 아니더라도 위험하잖아, 여기.”
“그래도 불편하게 왜 차에서….”
속상함이 묻은 목소리를 내던 이겸이 멈칫했다. 뭔가 어제가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이유였다.
“…제가 집에 여기 다시 온 지 열흘 정도 됐는데 설마 그때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제발 아니기를 바랐는데 난처하다는 듯 보는 권태정의 얼굴만 봐도 제가 생각한 게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겸은 난처함이 묻은 얼굴로 웃는 권태정을 보며 울먹였다.
“와, 우리 자기 눈치 진짜 빠르다.”
상황을 어떻게든 개선해 보고자 한 장난스러운 말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권태정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 같은 이겸을 보며 웃음을 거두고 침음했다.
평소라면 머리가 휙휙 돌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고 나갔을 텐데 컨디션이 여전히 좋지 않아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지를 않았다.
아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젯밤보다 훨씬 더 악화된 게 느껴졌다. 열도 나는 것 같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알람이 울렸을 텐데 들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권태정은 이겸이 나올 때까지 퍼질러 자다가 들켜 안 그래도 아직 마음 아플 애를 더 속상하게 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실장님, 이러시는 거 저 싫어요.”
“…….”
“어떻게 열흘이나 차에서….”
속상한 마음이 덩어리진 채 울컥울컥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이겸은 뺨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이고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아픈 것 같은 얼굴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울리려고 그런 거 아닌데… 미안해.”
사과를 받고 싶어 한 말이 아니라 걱정이 되어 나온 말이었다. 이러는 게 싫다고 한 것도 아파 보이는 권태정을 보며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었다.
“…….”
오늘따라 더 약해 보이는 모습에 심장이 따끔거렸다. 억제제를 안 먹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페로몬 향도 짙었다. 이런 순간에도 권태정의 페로몬에 반응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제가 싫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밤새 무작정 여기 계시면 제 마음도 불편하고, 또 실장님도 힘드실 거고….”
“알았어. 안 그럴게.”
“…….”
“이겸이 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싫어서 그런 거 아니라….”
“미안해.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자꾸 내 맘 편하자고 널 불편하게 하네. 평생 내 맘대로만 살아와서 그런가 봐.”
입술에 매달리는 웃음도 평소와 다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머리칼과 옷매무새, 감정까지 흐트러진 권태정을 보던 이겸은 아픈 마음을 손으로 꾹 눌렀다.
“아, 어제까진 잠도 잘 안 오고 밤새는 거 괜찮았는데 오늘 새벽에 갑자기 잠이 들어서 다 망했네.”
“…….”
“울지 마, 이제 안 그럴게. 정말이야. 네가 싫다면 안 해.”
더 울지 않으려고 눈물을 꾹 참는 이겸을 보던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이겸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감정이 지나치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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