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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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 뒤 조현준의 호출을 받은 권태정은 이겸과 함께 다시 원장실에 들어갔다. 조현준은 아까와 달리 조금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결과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현재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여러 수치들이 불안정한 상태인데요. 그래서 임신은 조금 더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 준비하시는 게 가장 베스트일 것 같습니다.”
임신을 나중에 해야 한다는 말보다도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말이 더 크게 들린 권태정은 당장이라도 조현준을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런 권태정을 보며 목을 가다듬은 조현준이 이겸의 결과가 나와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기 전에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전에 억제제 처방을 해 드릴 때 듣기로는 억제제 부작용을 오래 겪으셨다고요?”
“아…. 네. 3년 정도 겪었어요.”
“그때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억제제를 먹고 어느 날부턴가 페로몬이 나오지를 않았어요.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았고, 따로 페로몬 조절을 하지 않아도 알파들이 제가 오메가인 걸 전혀 모를 정도였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두드린 조현준이 몰두한 얼굴로 다시 이겸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알파 페로몬을 감지할 수는 있었나요?”
“아니요. 알파 페로몬도 안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실장님을 뵀을 때… 그때 처음으로 페로몬을 느꼈어요.”
“음, 이 친구, 그러니까 권태정 씨가 우성알파라 그랬을 거예요. 우성은 일반 알파에 비해서 페로몬 농도 자체가 무척 짙거든요. 그걸 시작으로 다시 오메가 사이클이 돌기 시작한 것 같아요.”
추가로 몇 가지 더 적은 조현준이 저에게 닿는 무시무시한 시선에 흘끗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진짜 권태정이 사랑에 빠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면.
“특별히 어디가 안 좋아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나쁜 상황은 아니에요. 그건 참 다행이죠. 그런데 지금 수치들을 봤을 때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거든요. 지금 상태로 임신을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몸이 버티기 힘들 거예요. 아직 정상화가 되지 않았으니까.”
조현준의 말에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안 좋은 부분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임신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속상했다.
“이번에는 사후 피임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드시고, 건강 회복부터 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수정 확률이 높은 사이클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니까 일단 수치를 정상화한 다음에 임신을 준비하시면 어떨까요?”
“네….”
작게 대답한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듯 제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이겸은 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
아까부터 왜 이렇게 두근대지. 이런 것도 여쭤보면 알려 주시려나. 조현준의 눈치를 살피던 이겸이 입술 근처까지 나온 말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꾹 삼켰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전혀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리고 연이겸 씨 같은 경우에는 특이 케이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똑같은 약을 복용해도 그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건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백 퍼센트 효과가 있을 거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백 퍼센트라는 건 사실 없으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긴장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다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심각해진 얼굴을 보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사후 피임약만 먹으면 돼? 수치들 정상으로 만들려면 따로 해야 할 일은 없고?”
“음, 페로몬이 때에 맞춰 발산이 되고, 또 억제가 되는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점점 수치는 정상화될 거야. 3년이나 그 과정이 없었는데 한두 달로 정상화가 되긴 어렵지. 여유를 가지고 한 일 년 정도는 지켜보는 게 좋아. 아, 스트레스 최대한 안 받으시는 게 좋아요.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권태정을 보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이겸에게 이야기를 전한 조현준이 바로 사후 피임약 처방전을 뽑아 이겸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은 이겸이 종이에 적힌 낯선 약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은 약이라 부작용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정말 혹시 모르니까 복통이 심하거나 구역감이 심할 땐 연락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태정이랑 같이 한번 밥이라도….”
쓸데없는 말을 하는 조현준을 보던 권태정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겸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조현준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고마워, 현준아. 다음에 보자. 우리 둘이.”
“어, 그래. 태정아. 잘 가.”
가식적인 권태정의 인사에 그대로 가식적인 인사를 돌려준 조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그에 놀란 이겸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권태정과 함께 원장실을 나섰다.
“크게 아픈 곳은 없다니 다행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음에 나 검진할 때 같이 와서 전체적으로 검사받아 보자.”
“…네.”
“속상해?”
“…조금요. 제가 정상이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죄송해요.”
“별소리를 다 해. 뭐가 죄송해. 몸이 회복되고 있으면 다행인 거지.”
이겸을 다독이며 차로 간 권태정이 조심스럽게 먼저 태우고 문까지 닫아 준 뒤에야 운전석으로 가 올랐다. 어쩐지 시무룩한 것 같은 얼굴을 보니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겸아.”
“…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네가 건강해야 나도 마음이 편하고, 또 앞으로 이것저것 같이 많이 하지. 또 그래야 나중에 진짜 너 닮은 애도 가지고. 미안해하지 마. 그럴 일 아니야. 응?”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속상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권태정의 말대로 제 몸을 먼저 생각할 때였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임신할 수 있는 사이클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니 너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내내 그 사이클을 함께 보낼 수 있을 테니까.
“…….”
자연스럽게 권태정과 보낸 러트 사이클을 떠올린 이겸이 살짝 틈이 있게 벌어져 있던 허벅지를 꽉 닫아 오므렸다.
숨도 쉴 수 없게 연달아 가 버렸던 것과 몸 안에서 부풀어 빠지지 않던 성기의 느낌…. 그리고 몸 안을 가득 채울 만큼 쏟아지던 정액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 여기저기가 홧홧했다.
그걸 주기적으로 같이 보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 이겸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카페 일하러 가는 날이지?”
“네….”
“그럼 집에 가서 약 먹고 좀 쉬다가 저녁 맛있게 먹고 가. 아침부터 돌아다녀서 피곤하겠다.”
“실장님이랑… 밖에 같이 다닐 때는 하나도 안 힘들고, 안 피곤해요. 처음 보는 곳도 데려가 주시고, 또 맛있는 것도 먹게 해 주시고…. 전 다 처음 해 보는 거라서… 다 좋아요.”
“그럼 다행이고. 앞으로는 더 좋은 데 많이 다니자.”
조수석으로 손을 뻗은 권태정이 이겸의 뺨을 매만졌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손길인데도 심장이 또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겸은 권태정 몰래 살짝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잘생기고 멋있지만,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여 얼굴을 눈에 담았을 뿐인데 또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오늘 진짜 왜 이러지. 이겸은 오늘따라 이상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괜히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발 마음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 * *
평소와 조금 다른 날들은 며칠이나 이어졌다. 이겸은 권태정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도 어쩔 줄을 모른 채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눌러야 했다.
권태정이 너무나 좋아서 그런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전과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 아예 몸과 마음이 권태정과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조금만 떨어져도 불안해지고, 안달이 날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권태정 역시 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째 권태정도 저와 함께 있을 때면 제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대거나 아예 몸을 끌어안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겸은 지금도 침대에서 저를 다리 사이에 앉혀 가슴에 등을 기대게 한 채로 TV를 보는 권태정의 품에서 애써 쿵쿵대는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물론 권태정이 스킨십을 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지만, 요 며칠은 그 정도가 전에 비해 무척 심해졌다. 싫지 않고 좋아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르긴 하지만,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가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권태정이 좋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겸은 제 배 위에 얹힌 권태정의 유려한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가락만 봐도 자꾸 이 손이 저를 만지고, 몸 안을 헤집던 게 생각나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제가 아무래도 정말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졸리면 잘까?”
“아…. 네.”
야한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킬까 봐 꼭꼭 숨긴 이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로 가서 눕느라 몸이 떨어진 순간 권태정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겸의 팔을 잡았다. 놀란 이겸이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미안, 놀랐지.”
“괜찮아요.”
“요즘 좀 이상해. 뭐랄까. 너랑 떨어져 있으면 괜히 불안하고, 큰일 날 것 같아.”
제가 느꼈던 변화를 그대로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이 가만히 팔을 벌렸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권태정이 얼른 이겸의 허리를 안으며 품으로 안겨들었다. 체격 차이가 크게 나서 반도 끌어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겸은 벅찰 만큼 가득 권태정이 제 품에 있는 게 좋았다.
“…이제 괜찮으세요?”
“응, 좋아.”
“…….”
“좋아, 이겸아.”
몸이 떨어지면 찾아드는 불안감조차 사랑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기에 권태정은 그 불안감조차 좋았다. 제가 이제 정말 이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장면이니까.
“내일 좀 살 게 있는데 같이 백화점 갈까?”
“네, 좋아요.”
“간 김에 너 집에서 입을 옷이랑 필요한 것도 더 사고….”
품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미소 지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권태정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천천히 허리를 쓸며 토닥여 주는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 저절로 눈이 감겼다.
곧 침실 안으로 조금도 떨어질 수 없게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울렸다.
잠이 묻은 눈을 뜬 이겸은 목이 마른 느낌에 조심스럽게 권태정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세워 앉았다. 흘러내려 간 이불을 잘 올려 권태정의 어깨 위까지 덮어 준 이겸은 침대 아래 놓인 슬리퍼를 신고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거실로 나가자마자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일단 부엌으로 가 물을 반 컵 마시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열고 본 바깥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을 조금 열자 거센 빗소리가 귓가로 달라붙었다. 이겸은 자연스럽게 권태정과 처음 키스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많이 왔었다.
“…….”
그날 컨테이너 안에 있던 권태정과 눈이 마주쳤던 것만 떠올려도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습한 공기 속에 마주한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했다.
“이겸아.”
거센 빗소리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드는 것에 놀란 이겸이 얼른 몸을 돌려 저에게 다가오는 권태정을 보았다. 걱정이 가득하고, 또 불안한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실장님….”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다가온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의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몸이 꽉 맞붙는 느낌에 이겸의 마음 안으로도 안도가 번졌다.
“왜 나와 있어.”
“아…. 물 마시려고 나왔는데 빗소리가 나서요.”
“물도 이제 옆에 두고 자야겠다. 없어서 놀랐어.”
어쩐지 허전한 느낌에 이겸을 안으려 팔을 뻗은 권태정은 따뜻함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에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인 줄 알았는데 정말 옆자리가 빈 것을 봤을 때는 심장이 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이겸을 안은 채 몸을 숙여 목덜미에 입술을 댄 권태정이 가볍게 몇 번 입 맞췄다. 그리고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이겸의 부드러운 허리를 쓰다듬었다.
“비가 많이 오네.”
고개를 들어 이겸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본 권태정이 요란히도 쏟아지는 비에 창을 닫았다.
“우리 처음으로 키스했던 날 생각나네.”
“…….”
“그날도 이렇게 비 많이 왔잖아.”
제가 생각한 것을 권태정도 똑같이, 정말 똑같이 생각한다는 게 설레어 손끝으로 열이 올랐다. 저와 같은 기억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권태정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겸은 너무나 좋았다.
살짝 몸이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선이 마주했다. 고개를 기울인 권태정이 가볍게 입술을 머금자 이겸이 웃음 지었다.
쪽, 쪽 한참이나 간지러운 소리가 나게 입 맞추던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의 몸을 안아 들었다.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에 놀란 이겸이 얼른 권태정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가서 자자.”
이겸의 뺨에 다시 한번 입 맞춘 권태정이 거센 빗소리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서 찾은 저의 온기를 품에 가득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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