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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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이 정도로 감정이 휙휙 변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요 며칠은 정말 감정 기복이 유독 심했다. 전이었다면 빚을 모두 해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기는 해도 울거나 바보처럼 굴어 권태정의 마음을 상하게 하진 않았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권태정의 가족을 만났을 때도 그렇고 또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그렇고 요즘 들어 별것 아닌 일에 심각해지기도 하고, 또 너무 쉽게 눈물이 나기도 해서 너무 이상했다.
“…….”
놀랍고 미안한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해 권태정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저의 잘못이었다.
들뜬 얼굴로 저에게 빚을 해결했다고 말하던 권태정의 모습과 제가 울자 달래며 걱정하던 얼굴, 페로몬까지 문제를 일으켜 놀라던 얼굴과 섭섭함이 묻은 웃음기 없는 얼굴이 계속 반복해 떠올랐다.
또 두려움이 확 느껴질 만큼 강하고, 위협적이던 페로몬과 저에게서 몸을 확 물리던 권태정의 모습도 계속해 머릿속을 괴롭혔다. 이겸은 몸을 앞으로 숙여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권태정이 이런 바보 같은 저에게 질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자꾸 번져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 안에 맺힌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불안함이 이겸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요동치며 연약한 마음을 할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감정의 기복을 마주해 본 적 없는 이겸은 제 마음을 어떻게 짓눌러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묵묵히, 그저 불안한 채로, 또 겁을 먹은 채로 권태정을 기다렸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멀게 느껴지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 그 가장 낮은 곳에서 아주 한참이나.
* * *
창가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몸을 깊게 파묻은 권태정이 서서히 갈무리되는 페로몬을 느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페로몬 컨트롤쯤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오늘의 이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은 권태정에게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화가 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그 외에도 감정적으로 동요가 강할 때 페로몬이 터져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감정이 뒤섞여 터진 것은 처음이었다.
“…….”
제 페로몬에 위협받던 이겸을 떠올리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조금 더 편해지고, 좋기 위해 한 일이었는데 왜 그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지 권태정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계속 이해가 될 때까지 이겸을 괴롭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해 섭섭한 마음도 있고, 다치지 않게 이겸의 마음 안에 들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여기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이겸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거니까.
애초에 저의 목적은 이겸을 짓누르는 그 빚을 깔끔히 정리해 주는 것이었고, 구대범에게 돈을 주고 밟음으로 목적 달성은 이미 끝났다. 그 달성을 이겸이 함께 기뻐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저와 이겸이 소모전을 할 필요는 없단 말이었다.
씨발, 섭섭하단 말은 왜 했어. 인상을 쓴 권태정이 눈을 감으며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이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
그냥 웃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제 페로몬이 이겸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2층으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역시 떨어져 있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러트를 기점으로 이겸과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같이 있고 싶어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겠는 현상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어 더 그랬다.
그냥 내려갈까. 대충 갈무리 된 것 같은데.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뗀 권태정이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등받이로 몸을 처박았다. 보고 싶다는 이유로 ‘대충’ 갈무리하고 내려갔다가 또 페로몬이 문제라도 일으키면 이번엔 진짜 이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페로몬 교란으로 불안정한 이겸에게 제 위협적인 페로몬이 뒤섞여 좋을 게 없었다.
“하….”
긴 숨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렀다. 권태정은 무감정하게 어둑해지는 창밖을 눈에 담았다.
같은 집에 있는데도 눈앞에 없고, 곁에 없어 이겸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게 가장 속상했다. 그리고 그 속상한 마음은 아주 한참이나 이어졌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동자 안에 어둠이 들어차고, 새벽이 흐를 때까지.
* * *
아침에 눈을 뜬 이겸은 제가 침대에 있다는 것에 놀라고, 또 옆에 권태정이 잠들어 있는 것에 안도했다.
어제 계단에 앉아 권태정을 기다렸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침대에 있는 걸 보니 권태정이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이불자락을 올려 입과 코를 가린 이겸이 눈만 내놓고 잠든 권태정을 몰래 바라보았다.
“…….”
자는 사이 마구 일렁이던 감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마음이 잔잔했다. 이겸은 혹시라도 권태정이 깰까 봐 이불 움직이는 소리도 최대한 내지 않으며 잠든 권태정의 얼굴을 정신없이 눈에 담았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너무나 좋아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게 너무나 미안했다.
아,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실장님 또 속상해하실 텐데….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권태정에게 감정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민하던 이겸이 손을 들어 흘러내린 이불을 어깨 위로 올려 주었다.
“음….”
이불을 덮어 주자마자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권태정을 보고 놀란 이겸이 얼른 눈을 감았다. 이불 안에서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
곧 따뜻함이 가까워지는 느낌과 함께 뺨과 머리칼에 권태정의 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손끝에서 나는 마른 장미향에 이겸이 이불을 더 꽉 쥐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원래의 페로몬 향으로 돌아와 정말 다행이었다.
사부작대는 소리와 함께 권태정이 몸을 일으키는 느낌이 났다. 이겸은 살짝 눈을 떠 침대를 벗어나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대충 의자에 놓은 권태정이 욕실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이겸은 완전히 눈을 떠 비어 있는 권태정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자는 척을 하지 말고 아침 인사라도 전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권태정이 깨려는 순간 자는 척 눈을 감게 된 걸까. 아무래도 어제 대화를 제대로 맺지 못한 것에서 오는 어색함과 거기서 오는 부끄러움 때문인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쉰 이겸이 몸을 일으켜 이불을 잘 펼쳐 침대 정리를 했다. 침실을 벗어난 이겸은 거실 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감정도 들쑥날쑥하더니 오늘은 또 평소보다 더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어제 감정 소모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몸이 안 좋은 건가?
어제 약한 에어컨 바람에 너무 추워 내내 떨었던 걸 떠올린 이겸이 창백한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일을 가지 않는 날이리 하루라도 쉬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를 위해 종일 쉰다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 잘 알지만, 제가 아프기라도 하면 권태정이 걱정할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큰마음을 먹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따뜻한 물로 가볍게 세수한 이겸은 조용한 부엌으로 가 커피 머신에 원두를 넣어 커피를 내렸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권태정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빵을 꺼내 오븐에 넣고 온도를 맞췄다. 딱히 입맛이 없었는데 고소한 버터 냄새를 맡으니 조금 식욕이 돌았다. 이겸은 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꺼내 식탁에 놓았다.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더 자라고 안 깨웠는데.”
커피와 데운 우유를 식탁에 놓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에 놀란 이겸이 고개를 돌려 저에게 다가오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가까이 온 권태정이 손에 들고 있던 티셔츠를 식탁 위로 올려두었다.
“나 주려고 내린 거야?”
“…네. 매일 커피 드시잖아요.”
“고마워. 매일 마시는 건데 우리 자기가 해 줘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향이 좋네.”
테이블 위에 놓았던 티셔츠를 입은 권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 앉았다. 권태정 옆 빈자리를 보던 이겸이 맞은편으로 가려고 하자 권태정이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겨 두드렸다. 이겸은 가만히 그 옆으로 앉아 따뜻하게 데운 우유 컵을 들어 호오 불었다.
“어제 계단에 앉아서 계속 나 기다린 거야?”
“아…. 네…. 올라가려다가 괜히 제가 가면… 실장님 불편하실까 봐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잠들었나 봐요.”
“거기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내려오는 건데.”
“…아니에요.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거잖아요.”
바삭한 크루아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권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이겸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제 생각을 해 봤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난 네 빚 해결하고, 구대범 조지면서 진짜 좋았는데 넌 왜 별로 안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네가 맘 놓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난 계속 변명을 하고, 넌 계속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는 건지 상황이 이해가 잘 안 가.”
“…….”
“서운하기도 하고, 좀 속상하기도 해. 그동안 내가 돈 쓰면 좋아하는 사람들만 봐 와서 그런가. 나도 거기에 익숙해졌나 봐. 그래서 내가 해결해 주면 처음에는 놀라도 당연히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나도 좀 당황했던 것 같아.”
덤덤히 흐르는 목소리를 듣던 이겸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불안과 긴장에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권태정이 저에게 질려 버린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페로몬 컨트롤이 순간 잘 안 됐어. 어제 많이 놀랐지. 나도 그런 적은 처음이라 놀랐는데 이겸이 넌 더 그랬을 거야.”
“…전 괜찮아요. 실장님은 괜찮으셨어요?”
“나야 뭐 그냥 좀 가라앉히니까 괜찮아졌어.”
저 때문에 그런 거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이겸은 제가 자꾸만 죄송하다는 말을 해서 속상하다는 권태정의 말을 떠올리곤 입 안에 고인 말을 소리 내지 않고 삼켰다.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닌데 그냥 우리 이걸로 더 감정 소모하지 말자. 너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이해할 거고, 나도 네가 나한테 왜 미안해하는지는 이해하니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네….”
이겸의 대답과 함께 잠시 어색함이 맴돌았다. 미지근해진 우유를 겨우 한 모금 마신 이겸이 어색함을 없애려 제 몫의 크루아상을 들어 뾰족한 끝부분을 조금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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