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15화 (115/174)

#115

휴대폰을 든 이겸은 최근 통화목록에 있는 ‘실장님’이라는 이름을 보며 손을 올렸지만, 화면을 누르지는 못했다. 어떻게 알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소식을 들은 권태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너무나 무서워 쉽게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

곤란해 하시면 어쩌지…. 내가 못되게 굴어서 실망하셨는데 아이까지 가졌다고 하면…. 권태정이 원치 않는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겸은 휴대폰을 다시 내려두었다.

“어떡해….”

이제 스물이 된, 그리고 그 어떤 가족도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이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일이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게 너무 무서워 자꾸만 몸이 덜덜 떨렸다. 이겸은 확 끼치는 한기에 이불을 당겨 덮고,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애를 가지는데 그걸 싫어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이불 안으로 퍼지는 온기보다 따뜻한 권태정의 목소리가 마음 안에서 울렸다. 그가 한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마구 흔들리는 것에 이겸은 속눈썹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사실을 알리는 게 너무 무섭지만, 그래도 권태정이 보고 싶었다. 저의 유일한 권태정이.

“…….”

다시 상 위에 놓인 테스트기를 물끄러미 보던 이겸이 아직은 너무나 납작하기만 한 배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 이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

어쩌지.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같은 생각만 반복하던 이겸이 너무 과도하게 몰입해 아픈 머리를 다시 무릎 위로 파묻었다. 걱정과 뒤섞인 두려움이 온몸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감정 기복이 심해져 정상적인 사고가 잘 되지 않았다. 이겸은 지끈대는 머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불을 덮었는데도 한기는 자꾸만 이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겸은 그 순간에도 권태정을 떠올렸다. 단단한 두 팔이 저를 꽉 안아 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빠르게 흔들리던 머릿속이 멍하니 흐트러졌다.

* * *

회사로 복귀할 준비를 종일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본가로 퇴근한 권태정은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곧 이 식탁, 저의 옆자리에 이겸까지 있게 될 거라 생각하니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 엄마. 저 말씀드릴 거 있어요.”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온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다 모였을 때 이겸에 대해 아예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권태정은 디저트를 먹다가 놀라 저를 보는 누나와 형을 보고 싱긋 웃고는 제 다음 말을 기다리는 부모님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저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 있어요.”

“진지하게?”

“네. 전 결혼하고 싶어요.”

바로 결혼 이야기까지 한 권태정이 놀라 가만히 저를 보기만 하는 부모님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말들을 침착하게 이었다. 이겸을 처음으로 알리는 시간인 만큼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말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착하고 예쁘고 바른 사람이에요. 그런데…. 좀 어려요.”

어리다는 말에 권유정과 권기정이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얼른 차로 목을 축였다. 그런 권유정과 권기정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본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정이랑 기정이는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

“아, 우리 아빠 눈치 빠르신 건 진짜 아무도 못 따라간다니까. 맞아요. 누나랑 형은 얼마 전에 먼저 만나서 식사 같이했어요.”

“아니, 그러고도 우리한테는 한마디를 안 한 거야?”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제 일이잖아요. 제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래, 뭐…. 어리다고? 얼마나 어린데.”

“…열두 살?”

슬쩍 뱉은 말에 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열두 살 어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지금 열두 살이 어리면 몇 살인지 계산한 엄마와 아빠의 눈이 커지는 걸 본 권태정이 혼나지 않도록 최대한 활짝 아주 예쁘게 웃었다. 제 웃는 얼굴을 보고 부모님의 마음이 곧바로 스르르 풀어질 수 있도록.

“태정아, 그럼 네가 만난다는 사람이 지금… 스무 살이라는 거야?”

“응, 엄마. 어리긴 한데 속도 깊고, 생각도 깊고…. 나보다 나은 점이 많아. 진짜 좋은 사람이야.”

웃는 얼굴에 화를 내진 못하고 한숨을 쉬는 아빠를 슬쩍 보다가 권유정과 권기정에게 눈치를 주자 두 사람이 열심히 이겸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희가 먼저 만나 봤잖아요? 정말 속도 깊고,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저희도 너무 어리다고 해서 걱정 많이 하고 만났거든요. 그런데 정말 너무 좋았어요. 일단 한번 만나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태정이가 누구 소개하고 싶어 하는 거 처음이잖아요.”

“네, 아버지. 일단 만나 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권유정과 권기정의 활약 덕분에 다행히 분위기가 크게 이상해지지는 않았다. 권태정은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집으로 한번 데리고 와. 최대한 빨리. 유정이랑 기정이까지 이렇게 칭찬하는 거 보니 꽤 괜찮은 친구 같은데 일단 만나 보고 얘기하자.”

“그래, 태정아. 오기 이틀 전에 미리 얘기 꼭 해 주고. 그래야 음식 미리 준비하니까. 누가 우리 막내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지 엄마도 너무 궁금하고 기대돼.”

계속 웃기만 하는 게 좋았는지 토닥여 주려고 손을 뻗는 엄마를 향해 커다란 몸을 기울여 얼굴을 대 준 권태정이 제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쓰다듬는 손길에 씩 웃었다.

그런 권태정을 보며 어른이 된 다음은 물론이고 어려서도 이렇게까지 부모님께 애교를 부려 본 적이 없는 권유정과 권기정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모님께 일단 이겸의 존재를 알리는 것까지 성공한 권태정은 집을 나서기 전 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도 식사 전에 두어 번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아 혹시 자나 싶어 편히 쉬도록 더 전화를 걸지 않았었다.

“…아직 자나.”

두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겸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고개를 갸웃 기울인 권태정이 뭔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얼른 본가를 나서 집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도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이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권태정은 초조한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대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현관에서부터 권태정은 이겸이 집에 없다는 걸 눈치챘다. 신발이 없기도 하지만, 이겸이 없는 집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포근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가 없이 텅 빈 느낌이 났다. 권태정은 최대한 감정을 죽이고 침실과 욕실, 각종 방과 2층까지 전부 뒤지며 이겸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하.”

집에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이겸을 찾을 차례였다. 이럴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불안함을 표출하며 날뛰는 건 시간 낭비였다.

권태정은 앉지도 못한 채 거실을 서성이다가 이겸의 옛 휴대폰에서 강지훈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대여섯 번 정도 연결음이 울렸을 때 들리는 목소리에 이겸이 어디 있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짓눌렀다.

-여보세요?

“권태정인데. 뭐 좀 하나 묻자.”

-네? 누구요?

“권태정이라고.”

-권태정? 네? 권태정이요? 어,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여러 번 말한 뒤에야 제가 누군지 인식한 강지훈에게 치솟는 짜증을 짓누른 권태정이 최대한 평소와 다름이 없는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낮에 이겸이 만났지.”

-네….

“지금도 같이 있어?”

-아니요. 이겸이 아까 같이 점심 먹다가 먼저 갔어요.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진 것도 아니고 먹다가 먼저 갔다는 말에 권태정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먹다가?”

-네…. 어디가 많이 아픈지 얼굴도 안 좋고, 밥도 못 먹고…. 냄새 맡으니까 토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먼저 간다고 갔어요. 급해 보이던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네…. 그건 잘….

“알았어. 끊어.”

혹시 아파 어디 길에서 쓰러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어디 병원 응급실에 있느라 전화를 받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권태정이 모든 병원 응급실에 연락을 해 보려 다시 전화를 든 순간 진동이 울렸다. 백 비서였다. 권태정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진우야.”

-태정아, 너 다람동이야?

“아니, 집.”

-그럼 이겸 씨 혼자 있는 거야?

“잠깐. 이겸이? 그게 무슨 말이야.”

-다람동 쪽에 둔 가드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까 낮에 이겸 씨가 집에 혼자 들어가서 아직도 안 나온다고 해서. 너도 같이 있는데 못 본 건가 했지.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서둘러 현관을 나선 권태정이 곧바로 내려가 아까 아무렇게나 세우고 들어온 차에 올라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끊기지 않은 전화에 대고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갈 건데 빨리 가도 삼십 분 이상은 걸려. 가드한테 아무도 못 들어가게 주위 제대로 지키라고 좀 전해 줘.”

-안 그래도 말해 놨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너 이겸 씨가 거기 있는 거 몰랐던 거야?

“어. 오늘 회사 갔었잖아. 갔다가 집에 들러서 저녁 먹고 나왔는데 연락이 안 돼서 찾던 중이었어. 고맙다, 알려 줘서.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

통화를 마친 권태정이 한산한 도로로 들어서며 속도를 높였다. 쓰러져 병원에 있는 게 아닌 건 다행이지만, 거기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과 전화를 내내 받지 않는 게 걱정되고 불안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내일 일찍 가서 짐을 챙겨 오기로 했는데 왜 말도 안 하고 거길 혼자 간 걸까. 메시지라도 남겨 놨으면 진작 거기로 가서 같이 집에 왔을 텐데. 권태정은 이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굳이 이겸이 소리 내지 않아도 제가 먼저 다 이해해 안아 주고 싶었다. 조금도 불안하지 않도록.

“하….”

얼른 가서 두 눈에 이겸을 가득 담아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조금 더 속도를 높이며 제가 얼른 안아 줘야 할, 모든 우울과 불안을 흡수해야 할 이겸을 향해 밤을 헤쳤다.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은 어렴풋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 * *

오랜만에 온 골목 어귀의 가로등은 이제 아예 빛을 잃고 꺼져 있었다. 꺼질 듯 말 듯하면서도 끝내 제 차를 비추던 가로등이 나간 게 아쉬워 올려다보던 권태정이 서둘러 이겸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닫힌 초록색 대문을 밀었다.

“…문 또 안 잠갔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권태정은 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누구도 저와 이겸의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방문 앞에 놓인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놓인 것만 봐도 이겸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