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20화 (120/174)

#120

향긋한 입욕제 향이 가득한 욕실로 들어간 이겸은 제 옷을 벗겨 주는 권태정을 보며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벗는 것도 아니고 셀 수 없을 만큼 벗은 것을 많이 보고, 또 내내 벗고 같이 있던 적도 있는데 여전히 권태정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참 부끄러웠다.

“실장님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어요….”

“같이 들어가고 싶어?”

“네….”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낸 권태정이 뺨에 깊게 입술을 눌렀다. 혹시 제가 같이 안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눈동자가 너무 예뻐 숨이 다 턱 막혔다.

“같이 들어갈 거야. 우리 자기 아무데도 혼자 안 보내, 이제. 거실 나갈 때도 나랑 같이 가.”

집착이 가득한 권태정의 말에 미소 지은 이겸이 따뜻한 물 안으로 들어가 권태정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이겸은 따뜻한 물과 단단한 권태정의 팔이 몸을 감싸는 게 좋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댄 채 몸에서 힘을 풀었다.

“춥진 않아?”

“네…. 하나도 안 춥고, 따뜻해요.”

“다행이다. 아, 어제도 그렇게 무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힘들었지.”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이겸이 고개를 살짝 돌려 저에게 내려오는 권태정의 얼굴과 마주했다. 시선이 뒤엉키자마자 초점이 흐트러졌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끝이 가볍게 문질리다가 이내 깊게 섞여들었다. 이겸은 물 밖으로 손을 꺼내 권태정의 뺨과 귓가를 매만졌다.

“하아….”

“하….”

“…기분이 너무 좋아요.”

“나도. 나도 너무 좋아. 우리 이겸이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듣고, 애기도 생겼고, 또 각인도 되고. 좋은 일이 너무 많네.”

이겸의 납작한 배 위를 손으로 덮은 권태정이 촉촉해진 이겸의 귓가와 뺨에 쪽,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이 안에 우리 애기가 있단 거잖아.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이겸이 닮았으면 좋겠다. 진짜 예쁘겠지? 생각만 해도 귀여워서 미치겠어.”

들뜬 것 같은 권태정의 목소리를 듣던 이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권태정이 기대하고 좋아한다는 게 너무 좋아 덩달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이겸은 제 배 위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완전히 몸을 깊게 기대며 권태정의 목덜미에 머리칼을 비볐다.

“이제 우리 각인도 했으니까 영원히 못 떨어져. 이겸이 너 없으면 나 못 살아. 그러니까 나 계속 사랑해 줘.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안 되겠다는 듯 몸을 돌려 권태정의 목을 끌어안았다. 드디어 완전히 맞물리는 몸이 좋아 웃은 권태정이 적극적인 이겸의 뺨과 귓가, 목덜미 여기저기에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각인하면… 음, 저는 이제 실장님 없으면 안 되고, 실장님은 제가 없으면 안 되는 거 맞아요?”

“응, 맞아. 나는 우리 이겸이 아니면 안 되고, 자기는 나 아니면 안 되고. 어떡해. 너무 좋은데.”

권태정의 좋다는 말에 웃은 이겸이 안고 있던 팔을 스르륵 풀어 몸을 살짝 떼고 시선을 마주했다. 평생 권태정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서 심장이 다 저릿했다.

“평생 실장님만 사랑할 거예요….”

“나도 우리 이겸이만 사랑할 거야. 우리 자기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어. 나도 없고, 세상도 없어. 이겸이 네가 내 사랑이고, 답이고, 또 빛이야. 이겸이 너만 향해 갈 거야.”

사랑으로 몸 안이 가득 차는 느낌에 미소 지은 이겸이 권태정의 얼굴을 젖은 두 손으로 가만히 쥔 채 다정한 말이 흐르는 입술을 머금었다. 촉, 초옥, 연약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권태정의 입술이 웃는 모양으로 길쭉해졌다.

그 모양이 좋아 따라 웃은 이겸이 다시 눈을 맞추다가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마주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뒤섞이는 뜨거움과 함께 눈을 감았다.

젖은 머리칼을 미지근한 바람으로 말려 주는데 자꾸만 이겸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권태정은 보송하게 마른 머리칼을 만져 확인한 뒤 몸을 앞으로 기울여 꾸벅꾸벅 조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임신을 해서 잠이 많아진 것도 모르고 그냥 자꾸 조는 게 귀엽다고만 생각한 게 미안해 마음이 아팠다. 권태정은 그대로 이겸의 몸을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움직임에 눈을 뜬 이겸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권태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장니임….”

“응, 실장님. 여기.”

다가가 품에 안기듯 얼굴을 비비자 그제야 이겸이 웃었다. 권태정은 얼른 자라는 듯 토닥토닥 가슴 위를 두드려 주었다.

“우리 같이 낮잠 자자. 푹 자고 일어나서 저녁 또 맛있게 먹고.”

“네에….”

말끝이 흐릿해지는 게 귀여워 보송한 뺨에 입 맞춘 권태정이 확 끼치는 따뜻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소중한 3개월이 끝나고 다시 찾아온 다시는 끝나지 않을 이겸을 품에 가득 안은 채.

* * *

이겸은 괜찮다고 했지만, 권태정은 2주 동안 이겸을 애지중지 보호했다. 제가 이겸과 같이 카페에 가서 사장을 만나 이겸의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같이 말하며 힘을 실어 주었고, 일을 관두고 집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이겸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달려 나가 물을 가지고 와 먹여 주었고, 씻을 때도 욕실에서 미끄러질까 싶어 늘 팔을 걷어붙이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씻겨 주었다.

그 덕분인지 혈색이 돌지 않고 창백하던 이겸의 얼굴에 보기 좋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권태정은 병원 주차장에 내려 올라가는 동안에도 이겸의 허리를 팔로 감싼 채 단단히 부축했다.

물론 조현준이 있는 원장실에 들어갈 때도 혹시라도 이겸이 다칠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보호하며 들어갔다. 반갑게 이겸을 올려다보고 인사를 건네던 조현준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이미지를 위해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뻐근한 눈두덩을 손으로 꾹 눌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저번에 뵀을 때보다 얼굴 좋아지셨네요. 2주 동안 힘든 건 없으셨어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어제부터 음식 냄새 맡는 게 너무 힘들어졌어요.”

“입덧 증상이에요. 입덧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드세요. 드시면 확실히 좀 나아지실 거예요.”

“네….”

“그럼 초음파실로 가실까요?”

천천히 일어나라면서 과잉보호하는 권태정을 보고 웃어 버린 조현준이 원장실 쪽으로 이어진 초음파실로 들어가 이겸을 눕히고 옆으로 앉았다.

“2주 동안 얼마나 컸는지 볼까요? 혹시 태명 지으셨어요?”

“…태명이요?”

“네. 요즘은 배 속에 있는 애기한테 이름 지어 주는 분들이 많아요. 음, 튼튼이, 복덩이, 럭키…. 아니면 뭐 두 분의 추억이 담긴 그런 이름 같은?”

“아…. 아직 안 정했어요.”

“어휴, 보호자가 그것도 안 하고 2주 동안 뭐 했대요?”

옆에 서 있는 권태정을 놀리듯 말한 조현준이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미안하다는 듯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겸의 아직은 납작한 배 위로 젤을 바르고 초음파 스캐너를 댔다.

“어, 여기 이게 아기집인데 저번보다 커진 거 보이세요?”

“아…. 네. 정말 저번보다 커졌어요….”

“그리고 이 안에 반짝반짝하는 거 보이시죠. 그 반짝반짝하는 게 아기예요. 0.5cm정도 되네요.”

“…와…. 전에는 안 보였는데….”

“네, 2주 동안 벌써 이만큼 큰 거예요. 심장 소리 들려 드릴게요.”

화면 속에 보이는 작은 반짝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겸이 초음파실 안으로 작게 울리는 콩닥콩닥 소리에 얼른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도 그 소리에 귀를 더 기울이며 이겸을 바라보았다.

“아기 심장 소리예요. 아직 너무 작아서 소리도 작은데 다음에 오시면 아기도 더 커지고, 그만큼 더 힘찬 심장 소리 들을 수 있으실 거예요. 잘 쉬시고, 또 잘 드시고, 몸 무조건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면을 보다가 권태정을 다시 바라보았다. 권태정 역시 콩닥콩닥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내려 이겸의 뺨에 제 얼굴을 부드럽게 비볐다.

“어떡해, 이겸아. 애기가 너 닮아서 심장 소리도 벌써 귀여워.”

“소리가 너무너무 작아요…. 애기도 너무너무 작고….”

“다음에 오면 더 커질 거야. 매번 같이 와서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이겸이 옆에서 들리는 달그락대는 소리에 여기가 초음파실이며, 조현준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 분 더 하셔도 되는데.”

“야, 실실 웃지 마.”

“보호자 분. 그렇게 험한 말씀 사용하시면 안 되는데. 아기를 위해 바르고 고운 말만 사용해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 좋은 척 웃은 조현준이 이겸에게 다시 원장실로 가자며 손짓했다. 이겸은 제 배에 묻은 젤을 닦아 주는 권태정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원장실로 향했다.

“초음파 사진은 가실 때 드릴 거고, 영상도 보내 드릴 거니까 편하게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입덧 앞으로 더 심해지실 텐데 도움 되시도록 약 처방해 드릴게요. 2주 후에 또 오시면 됩니다. 그 안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 있으시면, 걱정되는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네….”

“지금 6주 차인데 그 주수에 맞게 아기 잘 크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음, 네. 뭐 궁금한 거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조현준의 말에 잠시 머뭇대던 이겸이 권태정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조현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간단한 외출 같은 건 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무리만 안 하시면 괜찮아요. 음, 대신 사람마다 무리가 되는 정도가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연이겸 씨한테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활동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활동도 활동인데 그만큼 스트레스 안 받는 것도 중요해요. 그 부분만 신경 써 주시면 별문제 없이 아기 건강히 클 거니까 마음 편히 가지세요.”

“네….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한 이겸이 다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자꾸 뭔가 말을 듣거나, 새로운 걸 보면 저와도 나누고 싶은 얼굴로 보는 이겸이 귀여워 무너지는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뭘. 난 아직도 솔직히 좀 멍해. 권태정이 제일 먼저 애 아빠될 거라고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접한 네 상상력을 욕해. 다음에 보자.”

조현준에게서 시선을 거두자마자 다정하게 표정이 바뀐 권태정이 이겸의 몸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유히 원장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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