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태정이 녀석이 속 썩이는 건 없고? 어리다고 함부로 대한다거나.”
“아빠, 진짜 나 너무 서운해.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거 받들어 진짜 잘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걸 묻고 그러세요.”
“잘 나가다가도 한 번씩 삐끗하니까.”
“아, 억울해. 이겸아, 내가 속 썩이고 막 너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고 그래?”
억울하다는 듯 가까이 고개를 대고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권태정을 보며 당황하지 않고 웃은 이겸이 얼른 저를 보는 회장님과 눈을 맞췄다.
“실장님께서 너무너무 잘해 주세요…. 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시는 것도 없고, 제가 이렇게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정말 잘해 주기만 하세요.”
“그럼 다행이고. 저 녀석이 막내라 오냐오냐 키웠더니 아주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거든.”
저에 대해 좋게 말해서 이겸이 더 반할 수밖에 없도록 해도 모자랄 판에 저를 디스하는 아버지를 보던 권태정이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권태정을 보며 권유정과 권기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 우리 막내 기 좀 살려 주세요. 잘 보이고 싶을 텐데.”
“내가 뭐 없는 말 했어? 그리고 어차피 저 녀석이랑 지내다 보면 결국 다 알게 될 거 아니냐.”
“태정이가 이겸 씨한테 정말 잘해요. 저희가 전에 저녁 같이 먹을 때 봤는데 진짜 사랑꾼이에요. 누가 더 사랑꾼인가 대결하면 아버지가 지실 수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듯 혀를 차는 회장님의 반응에 다이닝룸 안으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이겸은 구김이 하나 없이 웃는 권태정의 가족들을 보며 그들을 따라 웃음 지었다. 편할 수가 없는 자리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라는 게 마음으로 확 와서 달라붙었다.
“이겸아, 속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정말 다 맛있고 좋아요.”
걱정이 되는지 작게 묻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밥을 한 입 먹고, 맑은국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다행이라는 듯 등을 살살 쓸어 오는 손길도, 화기애애하고 밝은 분위기도, 또 제가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있다는 것도 모두 좋기만 해서 이겸은 그들과 함께 웃고 또 웃었다. 아주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 권태정을 따라 거실로 가 앉은 이겸은 곧 앞으로 놓이는 따뜻한 차와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이 케이크도 이겸이가 직접 데코 다 골라서 주문한 거예요. 그러니까 맛있게 드셔 주세요.”
“어머, 주문까지 한 거야? 어쩐지 여기 가서 이렇게 예쁜 케이크를 본 적이 없는데 이겸이가 직접 주문한 거구나. 너무 고마워.”
이겸은 제 이름을 부르는 권태정의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그런지 아까부터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 주실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정아, 휴대폰 있으면 케이크 사진 한 장만 찍어 줄래? 너무 예뻐서. 엄마 폰은 방에 있나 봐.”
“네, 제가 찍을게요.”
자르기 전 사진까지 찍는 것을 보니 심장이 더 쿵쿵댔다. 이겸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다가 제 몫의 케이크를 받았다.
“그래, 스물이면 이제 막 성인이 됐다는 건데….”
케이크를 한 입 먹었을 때 권태정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케이크 접시를 든 채 조금 긴장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꿈도 많을 나이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나? 태정이 저 녀석 성격에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밀어붙였을 텐데 저 녀석한테 떠밀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네만. 실제로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듣기도 했고.”
저의 현재 형편이나 가족에 대해 여쭈실 거라고 생각하던 이겸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솔직히…. 실장님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결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나이가 아니기도 하고, 또… 제 형편이 좋지 않아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가끔 떨리기도 하지만, 차분히 울리는 이겸의 목소리에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권태정은 용기를 내어 너무나 잘해 주고 있는 이겸의 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렇지만…. 실장님을 뵙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또 행복한 건지 알 수 있었고…. 또…. 계속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떨리는 마음을 짓누른 이겸이 웅크리고 싶고, 자꾸 고개를 숙이고 싶은 생각을 지우며 권태정의 부모님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사랑하는 사람, 권태정을 위해 이 정도 용기는 저도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사랑하니까,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장님께서 적극적으로 끌어 주신 덕분에… 저도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제 마음을 말할 수 있었어요. 제가 실장님을 먼저 좋아했는데도 용기가 없어서…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거든요.”
“어, 아닌데. 이겸아. 내가 먼저 좋아했어. 난 진짜 너 보자마자 예뻤는데.”
권태정의 말에 조용한 거실에 여러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회장은 혀를 찼고, 어머니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권유정과 권기정은 꼭 막내의 연애 로맨스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쿠션을 안고 팡팡 두들겨 댔다.
“아니다. 사진 봤을 때부터….”
“권태정.”
“…알았어요. 조용히 있을게요.”
결국, 아버지한테 한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권태정은 입을 다시 닫았다. 이겸은 다시 저에게 닿은 시선에 가만히 웃음 지었다.
“실장님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또 결혼이라는 말이 여전히 실감이 잘 나지는 않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실장님과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습니다.”
어떡해…. 말씀드렸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를 보는 권태정의 아버지 눈치를 살핀 이겸이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조금 힘을 주어 꾹 눌렀다.
“태정이한테 대략 듣기는 했네만, 그래. 다람동에서 만났다고?”
“아빠, 그건….”
이겸에게 혹시라도 상처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부모님이 물으실까 싶어 사전에 부모님이 놀라실 수 있는 것들, 또 이겸이 들으면 답을 하기가 곤란할 것들을 어제 미리 전화로 전부 말한 권태정은 기어이 철거촌 이야기를 꺼내시는 아버지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실장님.”
안절부절못하는 권태정과 달리 이겸은 오히려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저의 형편이나 가족에 대해서 여쭈어보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세울 것도 없고,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기에 있는 그대로를 보이고 싶었다.
“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안쓰러워 울상이 된 권태정의 어머니가 얼른 이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가만히 등을 쓸어 주었다. 권태정이 위로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이겸은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힘든 시간 보냈구나.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
“…실장님께서 그때도 같이… 있어 주셔서 너무 힘들지 않게 시간 보낼 수 있었어요.”
이겸의 말에 잘했다는 듯 손을 뻗어 권태정의 등도 두드린 어머니가 이겸의 앞에 놓인 케이크 접시를 들어 먹으라며 포크를 쥐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고 싶은데.”
“…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우리 태정이 사랑하나?”
가장 또렷하고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겸은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저를 바라보는 권태정의 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이런 마음은 처음이에요.”
아, 키스하고 싶다. 권태정은 제 아버지에게 저를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이겸의 옆모습을 보며 침음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싶을 만큼 행복해 진짜 손끝이 다 저릿저릿했다. 아, 진짜 우리 이겸이 어떡하지.
“어떤 마음인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저는… 소심하고, 용기도 없고,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실장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실장님의 마음을 잔뜩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용기라는 것도 내 보게 되고,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차분히 쏟아지는 이겸의 고백에 이제 권태정은 아무 말도,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저와 가족들에게 닿는 이겸의 진중하고, 단단한 말들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실장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저한테는 참 많이 행복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꼭….”
“…….”
“실장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난 지금도 너무 행복해, 이겸아.”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은 권태정이 참지 못하고 제 옆에 앉은 이겸을 꽉 끌어안은 채 뺨에 깊게 입을 맞췄다. 막내아들의 돌발행동에 한숨을 쉰 회장이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형편이나 가족 관계 같은 것도 결혼을 결정할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이지만, 솔직히 우리는 태정이가 사랑한다면, 정말 후회가 없는 결정이라면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이네.”
“…….”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태정이 녀석이 혼자 너무 앞서가며 어린 친구를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컸는데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어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어 보여서 마음이 놓여.”
“…….”
“하지만 역시 아직 너무 어리니 일단은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일이 년이라도 더 만나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권태정은 이제 제가 나설 때가 되었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겸이 아직 어려서 걱정이 된 아버지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거나 막막하지는 않았다.
“저…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케이크를 먹던 권유정과 권기정이 불안한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아빠도 아니고 아버지라 부를 땐 뭔가 혼날 짓을 했거나 폭탄을 터뜨리는 일이 많다는 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이겸이 생각하면 좀 더 연애하고 결혼해도 좋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저희가 결혼이 좀 급하게 됐어요.”
“…왜?”
“애기 가졌어요. 이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