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1화 (131/174)

#131

빨리 이겸에게 가고픈 마음을 운전할 때는 잘 눌렀는데 주차장에 도착한 뒤부터는 누르기가 힘들었다. 권태정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천천히 바뀌는 숫자를 보며 초조해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를 때도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숫자를 눌러 댔다.

운 좋게 틀리지 않고 한 번에 열렸으니 망정이지 만약 다시 눌러야 했다면 잠금장치를 부숴 버렸을지도 몰랐다.

“이겸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겸의 이름을 부른 권태정은 혹시나 해서 얼른 신발을 벗고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안 나와도 돼, 안 나와도 돼. 내가 들어갈게.”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침대에서 반쯤 내려온 이겸이 보였다. 얼른 침대로 다가간 권태정은 다시 이겸의 다리를 잡아 침대 위로 올리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오셨어요.”

“우리 자기도 나 헤매고 다닐 거 알았구나.”

몸을 숙여 이겸의 뺨과 입가에 쪽, 쪽 입 맞춘 권태정이 그대로 제 얼굴을 잡아 입술을 꾹 누르는 이겸을 꼭 끌어안았다.

“아…. 진짜 예뻐서 어떡해.”

한동안 욕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더니 이제 이겸이 너무 예뻐도 욕이 먼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 생각한 권태정이 이겸을 안고 페로몬을 적당히 풀었다.

그게 좋았는지 이겸이 더 깊게 안겨들며 뺨을 제 어깨에 비비적댔다. 귓가와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내내 입 맞춘 권태정이 살짝 몸을 떼며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문질렀다.

“아, 떡볶이 가져올게.”

“나가서 먹을게요. 침대에만 있으니까 계속 더 졸린 것 같아요.”

“그럴래? 그럼 거실 가서 먹자.”

권태정은 계속 이불 안에 있어서 그런지 따끈따끈한 이겸을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혹시라도 충격이 갈까 싶어 정말 조심조심 소파에 앉힌 다음에야 부엌으로 간 권태정은 형이 준 떡볶이를 꺼내 그릇에 담았다. 본가와 집 거리가 꽤 가까워 아직도 떡볶이는 먹기 좋을 만큼 뜨거웠다.

“맛있는 냄새 나요.”

“이건 냄새 맡아도 괜찮아?”

“네, 먹고 싶어서 그런지 이 냄새는 괜찮아요.”

“다행이다.”

물과 우유, 그리고 주스까지 따라 전부 가져온 권태정이 이겸의 앞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포크로 떡볶이를 하나 들어 이겸에게 주었다.

“먹어 봐.”

떡볶이를 호오 분 이겸이 기다란 떡 한쪽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냄새를 맡는 건 괜찮았는데 혹시 맛을 보면 또 헛구역질이 나진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적당히 매콤하고 달콤해 너무너무나 맛있다는 생각만 밀려들었다.

“너무 맛있어요….”

“정말? 아…. 입에 맞아서 다행이다. 천천히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네에, 감사해요…. 실장님. 멀리 가서 사 오신 거예요?”

“아, 사실 형이 만들어 줬어.”

“…정말요?”

“응. 내가 인터넷에 나오는 근처 떡볶이 집에 다 전화해 봤는데 레시피가 정해져 있어서 제일 순한 맛도 매울 수 있다는 거야. 어쩌지 하다가 형이랑 누나가 전에 떡볶이 먹었다고 하던 게 생각나서 전화했더니 만들어 줬어.”

이겸은 권기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곤하실 텐데 이 밤에 직접 이걸 만들어 주셨다니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했다.

“내가 고맙다고 다 했으니까 우리 이겸이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네…. 진짜 맛있어요. 실장님도 같이 드세요. 저녁 안 드셨잖아요.”

떡볶이를 하나 들어 권태정에게 내민 이겸은 군소리 없이 받아먹는 권태정이 귀여워 웃음 지었다.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좋아?”

“…네. 그리고 실장님이 귀여워서요….”

“자기야, 나 귀여워?”

큰 몸을 구기며 이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비비적대자 이겸이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실 안으로 가득 울리는 웃음소리가 좋아 권태정은 그대로 이겸에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 계속 귀여워해 줘.”

다정히 내내 제 얼굴을 쓰다듬는 이겸의 손을 잡아 입 맞춘 권태정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몸을 떼었다. 정말 맛있는지 계속 멈추지 않고 포크를 움직이는 이겸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평소라면 한두 개 맛보는 걸로 더 안 먹어도 된다고 했을 권태정도 이겸이 주는 것을 꽤 여러 개 받아먹었다. 이겸을 사랑하면서 입맛도 닮아 가는 건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떡볶이가 맛있었다.

“다 먹었어?”

“네, 이제 배불러요.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것 같아요….”

“우리 삐약이도 맛있었나 보다.”

이겸의 뺨에 뽀뽀하고, 그대로 몸을 내려 배에도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한 권태정이 먹고 나니 또 졸려져서 눈을 무겁게 깜빡이는 이겸을 보며 웃었다.

“재우면 좋겠는데 먹고 바로 자면 체할 수도 있으니까 한 시간만 참자.”

“실장님, 산책하러 가고 싶어요….”

“산책?”

“네…. 나가서 좀 걸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그럼 나가서 좀 걷자. 음, 아까 와서 옷 안 갈아입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나가면 되겠다. 가자.”

“아…. 전 잠깐 방에 갔다가 올게요.”

권태정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방으로 가는 이겸을 보다가 궁금해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부모님 댁에서 올 때 씻고 원래 이겸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혀 왔으니 굳이 외출복으로 바꿔 입지 않아도 되는데 왜 갈아입으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옷 불편해서?”

“그,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소, 속옷….”

“속옷? 아….”

그제야 권태정은 이겸이 속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미친. 잊을 걸 잊어야지.

“입혀 줄게.”

“…네? 아, 아니에요. 저, 저 혼자 입을 수 있어요.”

“왜, 나 속옷 잘 입히는 거 알잖아. 벗기는 것도 잘하고.”

“어, 얼른 입고 나갈게요….”

빨개진 채 권태정을 침실 바깥으로 민 이겸이 문을 닫았다. 덩치로 보나 힘으로 보나 밀리기가 어려운 권태정은 이겸에게 기꺼이 밀려 나가 닫힌 방문 옆으로 기대선 채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진짜 고마워]

[이겸이랑 너무 맛있게 먹었어]

[형 :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다]

[형 : 다음에 또 해 줄게]

[형 :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아, 진짜 우리 형 너무 착해. 휴대폰을 보고 씩 웃은 권태정이 여전히 부끄러운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잘 입었나 보자.”

슬쩍 몸을 붙이고 이겸의 허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듯 내려가 속옷 밴드 안까지 손가락을 넣자 이겸이 몸을 움찔댔다. 권태정은 이대로 손가락을 빼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서른둘답게 산책을 위해 손가락을 빼냈다.

“진짜 혼자 잘 입었네. 입는 건 혼자 입게 봐줬는데 벗기는 건 내가 할 거야.”

음란한 느낌이 확 나도록 귀에 속삭인 권태정이 불긋해진 귀 끝에 입 맞추곤 한쪽 팔로 이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근처에 공원 있는데 거기 갈까?”

“네, 좋아요.”

“걷다가 힘들면 말해, 알았지? 절대 무리하면 안 된댔잖아.”

“네에, 꼭 말씀드릴게요.”

“가자.”

오늘따라 열리는 문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까. 같은 생각을 동시에 한 두 사람이 같은 걸음을 옮겨 문을 나섰다.

날이 더워 그런지 공원에는 밤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겸은 권태정과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심 걸었다. 외출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부러 나와 걷는 것은 꽤 오랜만이라 얼굴에 달라붙는 여름밤의 열기를 머금은 공기도 무척 기꺼웠다.

“아, 산책 오랜만이다.”

“나오니까 너무 좋아요.”

“좋으면 자주 나오자. 컨디션 좋을 때.”

“네, 좋아요.”

이겸은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들어와 맞물린 권태정의 손가락을 느끼며 손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맞물린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더워도 영원히 놓고 싶지 않았다.

“음, 이겸아. 낮에 엄마가 제안한 거 말이야.”

“아, 네….”

“이겸이 너는 들어가 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그 얘기 더 듣고 싶어서. 엄마 말씀이라 어려워서 들어야 할 것 같은 거면 안 그래도 돼.”

“그런 거 아니에요. 전 정말… 그래도 좋을 것 같아서 드린 말씀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다 좋은 분들이고 우리 이겸이도 좋은 사람이라 트러블이 생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가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고, 그 과정에서 이겸이 네가 힘들까 봐 그게 걱정이야.”

권태정이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이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참 좋은 분들이지만, 아직은 조금 어색할 때도 있고, 어렵기도 하기에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아예 들어가진 말고 일단은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 자주 보다 보면 더 가까워질 거고, 그땐 내가 출근할 때 데려다주고 그냥 뭐 거기서 같이 며칠 있다가 와도 되니까. 그리고 솔직히 우리 둘이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차분하게 닿아 오는 말을 듣고 나니 권태정의 말대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친해지기도 전에 들어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충분히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전 어디든 실장님만 계시면 다 좋아요. 그리고…. 들어가서 살지 않아도 자주자주 뵐 수 있으니까….”

“응, 이겸이가 가고 싶으면 언제든 갈 수 있어.”

이겸은 제 손을 단단히 쥔 권태정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꼬옥 마주 쥐며 권태정의 어깨에 머리를 가볍게 기대었다. 여름밤의 짙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머님, 아버님 뵙고 온 뒤로 계속 저한테 따뜻하게 대해 주신 게 생각이 났어요. 전 정말 너무너무 좋았거든요.”

“…….”

“가족들이랑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그런 게 어릴 때 참 많이 부러웠어요.”

“…….”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게 참 당연해 보이는데 전 아니니까…. 할아버지께서도 편찮으신 뒤로는 거의 말씀도 못 하시고 누워만 계셔서 꼭 혼자인 것 같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랑 같이 지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좋았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엄마가 집에 와 있는 게 어떤지 물었을 때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했구나. 그래서…. 그래서 그랬구나. 권태정은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일부러 더 가볍고, 즐겁게 보이도록 흔들었다. 이겸이 웃을 수 있도록, 이렇게 흔들어도 이 손이 절대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이겸이 알 수 있도록.

“이제 저한테도…. 부모님이 생긴 거잖아요. 그건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닌데…. 실장님 덕분에 부모님도 생기고, 가족도 생기고…. 너무너무 좋아요.”

홀가분하게 웃는 이겸을 보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권태정은 길게 숨을 내쉬며 일부러 씩 웃음 지었다. 다음에 센터에 가면 조현준에게 제가 왜 이러는 건지 꼭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부러웠다고 했잖아.”

“네….”

“너 아직도 어려. 이겸아.”

“…….”

“하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할 거야.”

“…….”

“그리고 이제 진짜 혼자 아니야. 나도 있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또 누나랑 형도 있어. 아, 삐약이도 있고.”

권태정이 소리 내는 삐약이라는 말이 귀여워 웃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겸은 이 여름밤이 참 좋았다. 권태정과 함께인 사랑 가득한 이 순간이.

“실장님….”

“응.”

“…그래도 전… 실장님이 제일 좋아요.”

“정말?”

“네…. 전 정말 실장님만 계시면 돼요.”

“나도. 나도 우리 이겸이만 있으면 돼.”

고개를 기울여 사람들이 보건 말건 이겸과 쪽, 쪽 입 맞춘 권태정이 후덥지근한 밤바람과 마주하며 싱긋 웃음 지었다. 이겸 역시 웃음 지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에서 기인한 따뜻함이 손과 얼굴, 그리고 마음을 온통 물들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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