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다시 회사로 완전히 복귀해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권태정의 걱정은 깊어졌다. 이겸과 낮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이겸도 이겸이지만, 제가 이겸과 떨어져 있는 게 싫어 솔직히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돌아가기 위해 별짓을 다 했었는데 돌아갈 수 있게 된 지금은 가고 싶지 않아 머리를 굴리고 있다니….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겸과의 미래를 위해서 아쉬움을 잠시 누른 채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게 맞다는 걸 권태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을 안 하고도 평생 이겸을 행복하게 해 줄 만큼의 재산이 있지만, 이겸과 삐약이에게 빈둥빈둥 노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저는 이제 진짜 책임져야 할 저만의 가족이 생긴 사람이니까.
“…….”
새삼 이겸이 제 아이를 가졌다는 걸 떠올린 권태정이 마구 벅차오르는 마음을 꽉 손으로 누른 채 옆에서 잠든 이겸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결혼 준비를 해서 얼른 식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미 결혼한 거나 다름이 없고, 결혼식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확실하게 제대로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제 제가 이겸의 것이라는 걸.
아, 얼마나 행복할까. 제가 이겸의 영원이 된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문서로 남기는 순간 진짜 너무 좋아 기절할지도 몰랐다. 권태정은 생각만으로도 치솟는 흥분을 누르지 못한 채 휴대폰으로 결혼식을 검색해 보았다.
기왕 하는 거 아주 제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날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제일 크고 비싼 호텔 홀을 빌려 식장 전체를 이겸과 어울리는 예쁜 꽃으로 장식하고, 아주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이겸을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이겸은 그렇게 축하받아야 할 사람이니까. 아주 예쁜 곳에서 그 무엇보다 예쁠 이겸을 보고 싶었다.
“으음…. 실장님….”
“어, 우리 이겸이 깼어? 어디 보자. 누구 애인이 이렇게 예뻐.”
아직 잠이 잔뜩 묻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겸의 얼굴 위로 고개를 기울여 내린 권태정이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리고 마음을 삽시간에 녹일 만큼 예쁘게 사르르 웃는 이겸을 보며 생각했다. 이겸과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이겸아, 이제 우리 결혼 준비 해야 하는데 우리 자기는 어떤 결혼식 하고 싶어?”
결혼이라는 말에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켜 앉은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것 말고는 한 번도 진지하게 결혼이나 결혼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머릿속에 바로 맺히는 게 없었다.
“전 실장님이 좋으신 쪽으로 하고 싶어요. 제가 그런 걸 잘 모르기도 하고….”
“난 엄청 크게 해도 좋을 것 같아. 우리 호텔 웨딩홀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거든. 그랜드볼룸 홀이랑 그리너리 가든 두 개 있는데 그랜드볼룸은 실내고, 그리너리 가든은 야외 결혼식 할 수 있는 데야. 둘 중에는 뭐가 더 좋을 것 같아?”
“여름에는 너무 더우니까… 안에서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아, 그렇지. 가을에 야외에서 하는 것도 예쁠 것 같은데 가을까지 못 기다려. 난 당장 내일 결혼하고 싶어, 이겸아.”
당장 내일 결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어쩐지 권태정이라면 정말 그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정말 결혼이 너무 하고 싶은 것처럼 저를 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추며 그 잘생긴 얼굴을 살살 매만졌다.
그 얼굴을 보니 결혼식이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권태정이 원한다면 뭐든 하고 싶다는 마음만 남아 이겸을 두드렸다.
“아니다. 하루도 더 못 기다리겠어. 그냥 오늘 할까?”
애가 닳아 죽겠다는 얼굴을 한 권태정을 볼 때마다 이겸은 그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져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구는 것도 제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묻는 것도, 그리고 깊게 숨을 내쉬며 결국 저를 끌어안는 것도 모두 좋기만 했다.
“전 지금 여기서 해도 좋아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평생 딱 한 번 하는 결혼을 대충하고 싶진 않거든. 우리 자기 진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축하도 많이 받고, 어딜 봐도 예뻐서 우리 이겸이가 평생 절대 잊지 못할, 그런 날 만들어 줄 거야.”
제가 혹시 아플까 봐 세게 힘을 주어 안지도 못하는 권태정에게 안긴 채 목덜미에 얼굴을 비빈 이겸이 눈을 감았다. 권태정은 알까.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말 넘치게 행복하다는 것을.
저의 행복을 다 이루어 주고도 더 행복하게 해 주려는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 이겸은 괜찮다는 말 대신 가만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게 뭐든 권태정이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도록.
“어떤 모습이든…. 실장님과 함께이기만 하면 분명 행복할 거예요.”
“지금도 행복해?”
“네, 행복해요. 실장님이랑 같이 있으면… 매 순간, 순간 계속 더, 더 많이 행복해져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아…. 어떡해. 이겸아. 진짜 너무 예쁘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실장님.”
사랑한다는 말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권태정을 보고 놀란 이겸이 얼른 커다란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런 이겸을 품에 가둔 권태정이 귓가와 목덜미 여기저기에 입 맞췄다.
“요즘 좀 이상해.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겸이 널 보기만 해도 자꾸 눈물 날 것 같아. 너무 좋아서 그런가….”
“저도 실장님 생각하면 그럴 때 많아요…. 자다가 일어나서 실장님 주무시고 계신 거 봐도 눈물 날 것 같고, 실장님이 저 보고 웃어 주시기만 해도 그래요.”
“사랑해서 그런가 봐. 사랑하면 이런 거구나. 몰랐네. 다들 눈물 나서 출근 어떻게 하지? 낮에 우리 이겸이 못 볼 거라고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데.”
기분 좋은 페로몬 향이 폴폴 나는 권태정의 품으로 얼굴을 비빈 이겸이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저도 정말 권태정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지 낮 동안 못 본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알았지? 회사도 회산데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자기니까.”
“네…. 그럴게요.”
“응, 예쁘다. 뽀뽀.”
“…뽀뽀.”
살짝 몸을 떼어 눈을 마주하고 입술을 내밀어 쪽, 쪽 몇 번 마주친 뒤에야 다시 따뜻한 몸이 틈도 하나 없이 맞붙었다. 권태정은 이겸에게서 나는 달착지근하고 포근한 페로몬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웃음 지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성대한 결혼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어디가 아파서 가는 게 아닌데도 센터에 갈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이겸은 초음파로 전보다 조금 더 커진 삐약이를 보다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실장님, 삐약이 더 커졌어요.”
“그러게. 우리 이겸이 예뻐서 삐약이도 잘 크나 봐.”
도대체 예쁜 거랑 애기가 잘 크는 게 무슨 상관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권태정을 질린다는 듯 바라보던 조현준이 저에게 닿는 온기 하나 없는 시선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시 웃음을 장착했다.
“자, 우리 삐약이 아무 문제 없이 너무 잘 크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심장 소리도 저번보다 더 우렁차졌네요.”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을 들은 뒤에야 이겸은 안도하며 초음파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입덧 때문에 골고루 잘 먹지도 못해서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니라니 정말 너무나 다행이었다.
“호르몬 검사한 것도 보니 이제 크게 걱정할 일 없을 것 같아요. 안정도 많이 됐고, 우리 삐약이도 잘 자리 잡았으니까 이제 적당히 산책하시거나 외부 활동 같은 거 하셔도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중요한 안내 하나 더 드릴 건데요. 특히 보호자분 잘 들어 주세요.”
자기 애인을 볼 때는 아주 세상도 녹일 것 같은 눈으로 보다가 저는 삐딱하게 바라보는 권태정을 보며 자애로운 의사처럼 웃은 조현준이 입을 열었다.
“이제 부부관계를 가지셔도 되는데요. 너무 자주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실 때도 너무 장시간 하시거나 너무 많은 체위 변경도 피하시는 게 좋아요.”
웃는 얼굴과 달리 무슨 안내 방송처럼 말하는 조현준을 보며 이겸은 어쩐지 부끄러워 괜히 시선을 피하고, 권태정은 끝까지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우리 삐약이가 작아서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습니다만, 점점 크면 티가 나겠죠? 참고로 오메가셔서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베타만큼 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안에서 우리 삐약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건 똑같기 때문에 시간 지날수록 배는 절대 압박하시면 안 됩니다.”
고개를 숙인 채 겨우 작게 대답만 하는 이겸의 등을 쓸며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서로의 페로몬이 결합하는 게 아이한테 아주 큰 안정을 주고, 또 우리 아빠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는 행위이기도 하니까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편히 하셔도 된다는 것까지 말씀드릴게요. 아, 콘돔 꼭 쓰셔야 합니다.”
“네, 선생님.”
싱긋 웃으며 대꾸한 권태정이 부끄러워 아직도 고개를 못 드는 이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나도 요즘 전에 별로 안 좋아하던 게 맛있고, 좋아하던 건 좀 역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수가 있어?”
“흔하진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긴 해. 각인을 한 상태고, 또 페로몬으로 교감까지 깊게 되니까 이겸 씨의 그 감정을 태정이 네가 그대로 같이 느껴서 입덧도 같이 하고, 감정 기복도 따라 커지고 그럴 수 있어.”
“어, 맞아. 요즘 자꾸 울컥해. 내가 눈물이 없는 편인데 요즘은 이겸이만 봐도 울컥할 때가 많거든.”
“쉽게 말해서 이겸 씨랑 네가 동기화가 된 거지. 이겸 씨가 안정되면 너도 따라 안정될 거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즐겨. 자, 더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편히 말씀하세요.”
궁금한 것을 모두 해소한 권태정이 이겸을 바라보았다. 더 물을 게 없어 이제 없다고 대답한 이겸이 공손히 인사하고 권태정과 함께 원장실을 나섰다.
“저 때문에 실장님도 잘 못 드시고 어떡해요….”
“그게 왜 이겸이 너 때문이야. 우리가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지. 난 너무 좋아. 그리고 고작 이런 정도밖에 못 나눠줘서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실장님 그러시면 저 속상해요….”
“취소, 취소. 무조건 취소.”
없던 말로 하자며 손까지 휘휘 젓는 권태정을 보며 소리 내어 웃은 이겸이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겸아, 우리 호텔 가 볼래?”
“호텔이요?”
“응. 결혼식장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지금 가면 볼 수 있어요?”
“응, 연락해 봤더니 오늘 뭐 점검하느라 오늘 하루 예식 없다고 하더라고. 점검은 두 시면 끝난다니까 점심 먹고 가 보자.”
결혼식장 이야기를 하며 들뜬 권태정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진짜 감정이 동기화 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잔뜩 기분이 좋아 보이는 권태정을 보는 순간 저도 이렇게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
지금 제가 머금고 있는 이 사랑이, 설렘이 부디 권태정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겸이 활짝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