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8화 (138/174)

#138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오랜 시간 인맥을 쌓아 온 권태정의 어머니는 어렵지 않게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를 만나 권태정과 이겸의 예복을 부탁했다. 평소 권태정의 가족을 무척 좋게 생각하던 디자이너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권태정은 퇴근 후 짬을 내어 이겸과 함께 디자이너의 작업실에 방문해 치수를 재고, 그의 유명한 예복들 중 가장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디자인을 골랐다. 그리고 제 것보다도 더 공을 들여 이겸이 입을 밝은색의 예복을 아주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샘플로 있는 여러 예복을 열 벌도 더 입어 본 다음에야 이겸의 예복도 결정되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거울을 봤을 때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디자이너의 감탄과 엄마의 웃음이 흘렀다. 권태정은 이겸과 함께 서로 몸을 기댄 채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언제든 꺼내 이 순간을 함께 마주할 수 있도록.

컨디션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또 조심해서 외출을 하는 것도 괜찮다지만, 몇 시간 동안 옷을 갈아입고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 고단했는지 이겸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권태정은 에어컨 바람을 너무 춥지 않게 맞춘 다음 이겸의 배 위로 얇은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이겸이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차를 몰았다.

“…….”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운 권태정은 곤히 잠든 이겸을 깨우기가 어려워 조금 더 차에서 재우기로 했다. 자는 얼굴까지 이렇게 예뻐서 어떡하나 싶어 가만히 그 말간 얼굴을 눈에 담는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이겸이 깰까 싶어 얼른 휴대폰을 확인한 권태정이 화면에 뜬 백 비서의 이름을 보고 조용히 차에서 내려 전화를 받았다.

“응, 진우야.”

-어, 태정아. 기자들 사이에 결혼 소식이 벌써 도는 모양이야. 네가 이겸 씨랑 여기저기 다니는 걸 보고 눈치챈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결혼 준비하는 걸 본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보도 자료는 다 준비됐지?”

-응. 당장 내일 아침이라도 바로 낼 수 있게 준비 다 해 놨어.

“이겸이랑 얘기해 보고 두 시간 안에 연락 다시 줄게.

전화를 끊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이겸이 내리려는 것을 본 권태정이 얼른 조수석으로 움직여 문을 더 활짝 열고 이겸의 손을 잡아 내리는 것을 도왔다.

“실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음, 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 그래도 이겸이 네 동의도 필요한 일이라…. 일단 올라가자. 집에 가서 얘기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권태정의 얼굴을 본지라 이겸은 집으로 올라가는 내내 긴장해 마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겸의 마음을 아는 권태정은 얼른 그 걱정을 덜어 주려 이겸을 앉히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우리 결혼하는 거 말이야.”

“네….”

“아마 우리가 공개를 하든 안 하든 기사가 나갈 거야. 아빠가 대기업 총수니 그런 관심이 가족들한테까지 다 몰리기도 하고, 또 내가 사고 친 것도 있잖아. 보복운전 걔가 결혼한다는데 누구랑 하는지 궁금하겠지.”

“아….”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작은 회사도 아니고, 태성그룹은 세상에 대해 뭔가 제대로 잘 알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도 당연히 알 만큼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대기업이었다. 그런 대기업 가족들의 일이 자주 기사에 오르내린다는 건 이겸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이겸이 널 지키고 싶어. 괜한 일로 네가 상처받는 일 절대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어떻게 알리는 게 좋을지 회사하고도 의논을 해 봤는데 아무 말도 안 해서 찌라시 돌게 하는 것보다는 회사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해서 보도 자료를 먼저 돌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단 의견이 나왔어.”

“아…. 그럼 결혼 발표? 그런 걸 먼저 하는 거예요?”

“응, 맞아. 그런데 자세히 누구랑 하는지는 말 안 하고, 그냥 내가 비공개 결혼식을 할 예정이고, 상대는 일반인이니까 사생활 보호해 달라는 식으로 발표할 생각이야.”

권태정의 말에는 어려운 게 하나도 없었다. 이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권태정의 말을 따르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말하기 싫어서 숨기는 거 아닌 거 알지? 난 사실 진짜 다 말하고 싶어. 이겸이 네가 내 거라고, 내가 이겸이 거라고 온 세상에 다 알리면 좋겠는데, 괜히 나 때문에 네가 불편해지면 안 되니까.”

“저 그런 생각 안 해요…. 실장님 마음 다 알아요.”

“고마워. 우리 이겸이만 내 마음 알아 주면 돼.”

이겸을 따뜻하게 품에 안은 권태정이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렸다. 이겸도 내내 그걸로 고민했을 권태정의 등을 안고 천천히 쓸어 주었다.

“사생활 보호해 달라고 해도 누군가는 밖으로 말을 할 거야.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어떤 관계로 시작했는지 지껄일 거고, 거기에 소설을 써 대기도 하겠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 거야. 이겸이 네가 알기 전에, 상처받기 전에 다 없앨 거니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우린 예정대로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가고, 삐약이도 만나자.”

전이라면 이 모든 것이 벅차고 무섭게 다가왔을지도 몰랐다. 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알게 되고, 소문을 낸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하지만 권태정의 품 안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단단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 무엇도 두렵지가 않았다. 이겸은 가만히 권태정의 어깨에 입술을 누른 채 눈을 감았다.

조금도 떨리지 않고, 또 조금도 무섭지 않은 밤이었다.

* * *

[단독] 태성그룹 3남 권태정 씨, 8월 첫 주, 일반인과 비공개 결혼 발표.

[1보] 태성 3남 권태정 일반인과 결혼 발표…. 보복운전 아니라 이번에는 속도위반?

[단독] ‘공포의 보복운전’ 태성家 삼남 권태정 씨, 일반인과 8월 비공개 결혼! 재벌가 입성 일반인은 누구? 태성 측 “절대 비밀.”

권태정은 자극적으로 난 다양한 기사 제목을 보며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씨발, 진짜 욕을 안 하고 살라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네. 보복운전 아니라 이번에는 속도위반?”

자극적인 제목에 짜증이 나기는 하는데 무엇보다도 열이 받는 건 전부 맞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보복운전을 한 것도 사실이고 결혼 전에 이겸이 삐약이를 가진 것도 맞으니 속도위반이라는 표현에 태클을 걸 수도 없었다.

“자극적이고 추측이 담긴 제목 자제해 달라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라인을 줘도 이따위로 군다 이거지. 그래, 기사 나가고 반응은 어때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백 비서를 흘끗 본 권태정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말해 보세요.”

“…다음엔 또 무슨 교통 법규를 어길지 궁금하다는 반응들이 우스갯소리처럼 퍼지고 있고, 또 일각에서는 우성알파 재벌가가 재벌이 아니라 일반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에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부정적인 의견보다는 유쾌하고, 또 좋은 반응이 더 많은 편입니다.”

“지금 보복운전에 속도위반 했다고 다음엔 또 뭘 어길지 궁금하다는 거예요?”

“…네.”

“하…. 그래, 씨발. 재밌다고 치고. 신상 깔려는 것들은 없어요?”

권태정의 반응에 흠흠 목을 가다듬은 백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넘겨 익명으로 올라온 댓글을 보여 주었다.

“실장님과 어려 보이는 남자가 같이 다니는 걸 봤다는 글도 올라오기는 합니다만, 아직은 연이겸 씨 신상이 돌아다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분명히 누군가는 올릴 거예요. 최대한 조치해 주세요. 뭐 완전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 해 봐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발표하고 나니 속 시원하지 않으세요?”

백 비서의 말에 줄줄이 제 기사가 뜬 휴대폰을 대충 내려놓은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좋았다. 제가 이겸과 결혼한다는 걸 그래도 세상에 어느 정도 알린 거니까.

“좋아요. 완전히 알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 진우야, 진짜 넌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좋은지.”

“좋아 보여. 여태까지 본 중에 요즘이 제일 행복해 보여서 좋다. 결혼 진짜 축하해.”

“고마워.”

“어, 또 전화 오는데?”

권태정은 화면에 뜬 구대진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아마 기사를 보고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굳이 구대진의 축하, 또는 저주를 받고픈 마음이 없어 전화를 끊자 이번에는 다른 사교계 인맥이 줄줄이 전화를 걸어왔다. 갑자기 결혼한다고 발표한 게 모두에게 화제가 되긴 한 모양이었다.

“아, 며칠 전화 꺼 놔야겠다. 내가 결혼한다는데 왜 난리야. 초대도 못 받는 것들이.”

혀를 찬 권태정이 한 번 더 울리는 휴대폰을 흘끗 보다가 싱긋 웃으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 화면에는 ‘우리 자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응, 이겸아. 자기야. 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네에, 실장님. 지금 바쁘세요?

“아니, 안 바빠. 왜, 지금 집에 갈까?”

정말 집에 갈 듯 일어나 선 권태정이 수화기 안에서 만류하는 목소리에 웃으며 다시 소파로 앉았다.

-아버님께서 오늘 저녁 사 주신다고 하셔서요. 이따 차도 보내 주신대요. 실장님께서도 연락받으셨어요?

“그래? 아직 나한텐 연락 안 왔는데. 결혼 발표 기념으로 우리 자기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으신가 봐. 기사 말고 내가 데리러 갈게. 나랑 가는 게 더 좋지?”

-네에….

“아빠한테 연락해 보고 이따 끝나자마자 갈게. 기사 같은 건 보지 말고 재밌는 것만 보면서 하루 잘 보내고 있어. 알았지? 점심도 맛있게 먹고.”

-…네. 어….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잠시 기다리던 권태정이 수화기 너머로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이겸아. 할 말 편히 해도 돼.”

-…자, 자기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어?”

-그, 그럼 바쁘실 텐데…. 끊을게요….

“…….”

전화 끊기는 소리에도 멍하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던 권태정이 무슨 일이냐는 듯 보는 백진우와 눈을 맞췄다.

“태정아, 무슨 일이야? 연이겸 씨한테 무슨 일 있대?”

“……자기래.”

“어?”

“나한테…. 자기래. 자기도 점심 맛있게 먹으래….”

“…….”

“…씨발. 나 집에 갔다 올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말 당장이라도 실장실을 나설 것처럼 움직이는 권태정을 막아선 백진우가 오전에 있는 중요한 회의와 미팅건,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줄줄이 읊었다.

“아, 왜. 곧 점심시간이잖아.”

“점심 미팅 있으시잖아요.”

“…아.”

“어떤 심정이신지는 알겠는데 진정하세요. 실장님.”

“아니, 너 몰라. 알면 지금 나한테 진정하란 말 못 하지. 이게 지금 진정이 될 일이 아닌데.”

회사 따위에 가로막혀 이겸에게 갈 수 없음에 한탄한 권태정이 걸음을 돌려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괜히 애꿎은 서류만 툭 건드렸다.

‘…자, 자기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호칭 이야기를 하고 며칠이 지나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어 아직 저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장 새로운 호칭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겸에게 그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이겸이 준비가 되면, 용기가 생기면 알아서 소리 내 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겸이 저를 실장님보다 가까워 보이는 자기라고 부르는 걸 듣고 나니 비로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체감이 되었다.

“…….”

아, 진짜 이겸이 저렇게 예뻐서 어떡하지. 침음한 권태정이 정신을 차리려 서류를 손에 들었다. 눈에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이겸에게 달려갈 수 있을 테니까.

“실장님, 전화 받으세요.”

꼭 필요한 서류 추리는 것을 돕던 백 비서가 책상 위에서 드르륵 진동과 함께 움직이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권태정은 화면에 적힌 ‘아빠’라는 이름을 보며 설핏 웃곤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새로운 막내에게 먼저 연락하고, 그다음에 저에게 연락할 만큼 이겸을 아끼게 된 아빠에게 아주 큰 감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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