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점심도 거른 채 백화점에 간 권태정은 퍼스널 쇼퍼가 미리 준비해 둔 반지들을 천천히 하나씩 눈에 담았다. 일상에서 늘 착용해도 될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웨딩 밴드를 보고 싶다는 말에 퍼스널 쇼퍼는 권태정이 좋아할 법한 스타일의 반지들을 각 명품 매장에서 모아 준비해 두었다.
“다이아몬드가 있는 모델을 말씀해 주셔서 과하지 않게 들어간 것들로만 준비를 해 봤습니다.”
이겸의 하얗고 깨끗한 손을 상상하며 반지를 보던 권태정은 가운데에 놓인 반지를 가리켰다. 이겸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플래티넘 바디에 다이아몬드로 중앙 장식이 된 웨딩 밴드입니다. 깔끔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이아몬드가 일자로 장식이 되어 있어 일상에서 매일 착용하시기에도 너무 좋은 디자인의 제품입니다.”
“예쁘네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손가락이 희고 예쁘거든요. 아시죠? 전에 같이 몇 번 왔는데.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아…. 기억합니다. 너무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음, 그러고 보니 저랑 애인을 둘 다 아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시네요.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 결혼식 오시겠어요? 저희가 둘 다 같이 아는 분들만 초대를 하고 있거든요.”
“초대해 주시면 저야 너무 영광이죠.”
싱긋 웃은 권태정이 혹시 몰라 몇 장씩 가지고 다니는 청첩장을 꺼내 퍼스널 쇼퍼 유지연에게 내밀었다. 아주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는 예쁜 청첩장을 눈에 담은 유지연이 웃으며 감사를 표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 너무나 영광입니다, 실장님. 꼭 참석할게요.”
“같이 아는 분들만 초대를 하다 보니 소수의 하객 분들만 모시고 식 치를 예정이거든요. 참석해 주시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권태정은 친절한 웃음을 유지한 채 인사를 마치고 조금 전 제가 골랐던 반지를 유지연 쪽으로 밀었다.
“반지는 이걸로 할게요. 사이즈는 잘 때 손 대 보니까 제 새끼손가락이랑 이겸이 약지가 비슷해 보이던데 그 정도 정보로도 맞출 수 있을까요?”
“아, 그럼 실장님 손가락 둘레부터 측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유지연이 손가락 둘레를 재는 동안 권태정은 어떻게 반지를 줘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주 제대로 돈을 써서 온 하늘을 다 빛으로 물들여 줄 수도 있고, 여기저기 광고 송출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저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을 보이는 거니까. 매일, 매 순간 보이고 또 보여도 늘 모자랐다. 권태정은 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이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검색해 보니 두 분 사이즈 바로 준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준비해 올 테니 다과 즐기시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자리를 비우는 퍼스널 쇼퍼를 흘끗 본 권태정이 따뜻한 차와 핑거 푸드가 이것저것 놓인 테이블로 가 앉았다. 평소라면 차를 몇 모금 마시는 것 외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무려 3단으로 된 디저트 플레이트 위에는 갖가지 디저트들이 놓여 있었다. 마카롱과 마들렌, 휘낭시에와 작은 샌드위치까지 놓인 것을 보던 권태정은 작은 마들렌 하나를 들어 베어 물었다. 확 끼치는 바닐라 향이 오늘따라 꽤 기꺼웠다.
아, 이거 이겸이가 좋아하겠다. 제가 먹을 수 있다는 건 곧 이겸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권태정은 백화점 지하에 있는 유명한 베이커리를 떠올리며 남은 마들렌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혀로 퍼지는 단맛에 자꾸 이겸이 떠올랐다.
‘실장님…. 흐읏, 자기야…. 빨리이….’
‘빨리 하면 힘드니까 천천히 하는 건데 싫어?’
‘빨리…. 빨리 해 주세요….’
제가 애를 태우며 느릿하게 움직이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빨리 해 달라고 애원하던 달착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뺨과 눈물을 핥았을 때 혀끝에 맴돌던 단맛도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평소에도 달지만, 섹스할 때 복숭아 향 페로몬에 잔뜩 절여진 이겸은 정말 어딜 맛봐도 달았다.
섹스하다 반지 끼워 주는 것도 꽤 감동적이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던 권태정은 조금 전까지 제가 ‘진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야경이 아주 예쁘고, 전체적으로 아주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으니 일단은 거기서 맛있게, 또 행복하게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좋은 타이밍을 봐서 이겸에게 말하고 싶었다. 반지를 너무 늦게 줘서 미안하다고, 지금처럼 영원히 저의 모든 곳에 갇혀 달라고.
“…….”
반지를 진작 줬어야 하는데 그동안 이겸이 사라질까 무서워 말만 앞섰던 것 같아 미안했다. 철거촌에서 보낸 마지막 그날에도 혹시 이겸이 저와 함께해 주지 않을까 두려워 결혼해 달라는 말부터 소리 내 버렸고, 식장 구경을 하러 갔을 때도 당장 또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 했던 프러포즈가 떠올랐다.
물론 그 모든 순간이 다 진심이었지만, 기왕 할 거면 반지도 미리 준비하고, 더 멋있게 기억에 남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도 있었다. 이겸이 두 순간을 다 좋아해 줬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 하여튼 우리 이겸이는 너무 착해. 어떻게 그렇게 예쁜 애를 만났지…. 이겸을 처음 만난 날부터 떠올리던 권태정은 결국, 그 예쁜 애가 저를 사랑해 어쩔 줄 모르겠는 얼굴을 하고, 저를 보며 웃기만 하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머릿속에, 또 마음 안에 이겸이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져 너무나 행복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샘플도 함께 가지고 왔는데 실장님 바로 착용해 보시겠어요?”
“네.”
이겸을 떠올리며 좋아했을 뿐인데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이겸에게 보이는 웃음을 거두고 대외적인 미소만 남긴 채 유지연이 준비해 온 제 사이즈의 반지를 약지에 끼워 보았다. 아주 편안하게 맞아 마음에 들었다.
“정말 딱 정확하게 맞으세요. 그리고 이건 실장님 새끼손가락 사이즈에 맞춘 반지입니다. 이것도 착용해 보시겠어요?”
이겸의 반지 사이즈를 들어 새끼손가락에 넣자 그 역시 사이즈를 대고 맞춘 것처럼 아주 정확하게 자리를 잡았다. 권태정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이즈면 될 것 같아요.”
“이대로 새 상품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아, 포장까진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꺼낼 거라.”
“아, 그럼 가지고 가실 수 있게 작은 쇼핑백에만 넣어 드려도 될까요?”
“네.”
짙은 푸른색의 반지 케이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느릿하게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닷새 후에 결혼식을 하는 걸로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도 반지를 주며 하는 프러포즈는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긴장이 됐다.
“…….”
무슨 말을 해야 멋있지…. 그런 것도 좀 찾아봐야 하나. 아, 아침에 보니까 다 틀에 박힌 말만 있고, 와닿는 말이 없던데.
“반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두 분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꼭 참석할게요.”
“저야말로 흔쾌히 참석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결혼식 날 뵙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깍듯한 인사를 나누고 주차장까지 혼자 내려오는 동안 권태정은 쿵쿵 세게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 갑자기 이렇게 떨려도 되나 싶을 만큼 심장이 아주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
그 기분 좋은 떨림을 애써 누르려 하지 않은 채 권태정은 반지 케이스와 같은 색의 푸른 종이봉투를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멋있는 순간, 또 감동적인 순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그저 이겸이 이 반지를 받고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 이겸이 보고 싶다. 우리 애기.
기대어 선 뒤쪽으로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권태정이 긴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더 지나 이 도시에 근사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부디 이겸이 제 손에 들린 반지를 보고 활짝 웃어 주기를 바라며.
* * *
퇴근 삼십 분 전, 권태정에게 간단히 보고할 것이 있어 방에 들른 백 비서는 만년필로 뭔가를 진지하게 써 내려 가는 권태정을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본 중에 가장 진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뭔가를 쓰는 것에 몰두해 있었다.
“실장님, 뭐 하세요?”
“결혼식 날 이겸이한테 읽어 줄 편지 써. 내가 필요 없는 단계를 식에서 다 뺐더니 잘못하면 예식이 이십 분 만에 끝나겠더라고. 입장, 혼인 서약, 성혼 선언. 부모님께 인사. 끝.”
“아, 맞아. 다 뺐지. 주례도 없고, 축가도 없고.”
“웨딩 플래너한테 물어보니까 편지 써서 서프라이즈로 읽어 주는 건 어떻냐고 해서 써 보는 중이야. 아, 근데 이거 어렵다. 약간 의식의 흐름대로 써지는데.”
만년필촉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안으로 울렸다. 백 비서는 보고하려던 서류를 그냥 가만히 책상 위로 올려 두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건이 아니니 지금은 제 친구의 사랑이 가득한 이 진지한 순간을 지켜 주고 싶었다.
“결혼 닷새 남은 기분이 어때?”
“음…. 좋아. 너무 좋은데 시간이 천천히 가서 미치겠어. 이겸이랑 있을 땐 하루가 일 분처럼 가는데 출근해서 그런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국내로 한 일주일 가려고. 외국 갈까 생각도 했는데…. 비행기 장시간 타는 건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건 삐약이 낳고 가고, 이번엔 국내로 가서 푹 쉬다 오기로 했어.”
편지를 적으며 대답하던 권태정이 집중이 안 된다는 듯 백 비서에게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그런 권태정을 보고 웃은 백 비서가 알았다며 뒤로 걸음을 물렀다.
“곧 퇴근 시간인 건 알고 쓰세요, 실장님.”
“어? 그래?”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권태정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알려 줘서 땡큐. 너도 얼른 퇴근해. 특별히 빨리 보내 줄게.”
“나도 땡큐. 편지 내용 기대할게. 내일 보자.”
“응. 가.”
간단히 인사한 권태정이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만년필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주 오랜만에 문장들을 손으로 써서 그런지 조금 어색한 느낌도 들고, 잘 쓴 건가 감이 안 잡히지만 그래도 제 마음을 담았다는 게 좋아 후회는 없었다.
권태정은 집중해 조금 더 문장을 쓰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올려 이겸의 이름이 쓰인 첫 줄을 바라보았다. 반쯤 적었으니 남은 반은 결혼식 전날까지 조금씩 더 채우고, 전체적으로 다듬으면 될 것 같았다.
“…….”
의사 표명을 하기 위해 딱딱하게 문장을 써 본 적은 많지만, 이렇게 손으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이 종이가 뭐라고.
아무래도 제가 이 종이 위에 마음을 아주 많이 묻힌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깊게 숨을 마셨다가 뱉으며 종이를 두 번 접어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어쩐지 계속 떨리는 마음에 다시 심호흡한 권태정이 가방을 열어 봉투를 구겨지지 않게 잘 넣었다. 그리고 가방 안 한편에 잘 들어 있는 반지 케이스를 눈에 담으며 간절히 빌었다. 드디어 찾아온 이 저녁이 저의 진심을 잘 실어 이겸에게 전해 주기를.
* * *
이겸은 부드러운 감자 퓌레를 고기와 함께 입에 넣었다. 요즘은 고기가 자꾸 먹고 싶어 거의 매일 먹는데도 질리지 않고 너무나 맛있었다. 체하지 않도록 천천히 먹으며 물까지 마신 이겸이 얼굴에 닿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
아까부터 권태정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계속 저를 보고 있다가 막상 제가 눈을 맞추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웃기만 했다.
“실장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어? 어…. 있긴 한데 저녁 먹고 천천히 할게.”
“혹시 뭐… 안 좋은 일이에요? 사채업자 아저씨가 또 연락하셨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안 좋은 쪽 일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구대범 그거 때문에 지금 대국 난리 났대. 얼마 전에 아빠가 대국 완전 뒤집어엎었잖아.”
권태정의 아버지와 누나가 대국물산 구 회장을 만나 대국과 엮인 모든 커넥션을 끊고 싶다고 말한 뒤로 구대범은 완전히 대국의 역적이 되었다고 했다. 태성그룹과의 협력 관계와 구대범과의 가족 관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를 택할 구 회장은 아주 만족스러울 만큼 구대범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태정은 구대진을 통해 구대범이 털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꽤 만족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 새끼가 이겸에게 한 폭언과 폭력이 사라지지는 않기에 용서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거 앞으로 이 나라에 발도 못 붙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네…. 전 혹시나 해서요. 안 좋은 일 아니면 뭐든 괜찮아요. 실장님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편할 때? 편해질 때가 있을까…. 이렇게 떨리는데.”
혼자 중얼거린 권태정은 이겸이 앉지 않은 옆쪽 의자에 놓인 제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 안 어디에 반지가 있는지 너무나 정확히 떠올라 그런지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꼭 당장 주지 않으면 반지가 녹아 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
아까 보자마자 줄걸. 기분 좋게 주고 식사를 천천히 할걸…. 아니, 디저트 위에 반지 올려 달라 그럴 걸 그랬나. 아냐, 그랬다가 장식인 줄 알고 치워 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너무 구닥다리야. 요즘 누가 그렇게 하냐. 야, 권태정. 좀 머리를 더 써.
자기 자신에게 요란히 채찍질하던 권태정이 아주 맛있게 스테이크를 먹는 이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사랑한다고 말한 게 몇 번이고, 또 결혼하자고 진지하게 말한 게 몇 번인데 반지 하나가 손가락에 없다는 게 확실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얼른 저 예쁜 손가락에 제가 고른 반지를 끼워 주고 싶었다.
“실장님, 안 드세요?”
“어? 어, 먹어.”
평소와는 다르게 버벅거리는 게 이상한지 자꾸 바라보는 이겸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너무 긴장해 그런지 솔직히 무슨 맛인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