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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2화 (2/127)

2화

“젠장.”

프리 서버에 발을 들인 벌을 받는 건가. 아니면 프렉탈에 들어가고 싶은 무의식이 과몰입해서 이런 환시를 보여주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게임 안에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길게 한숨을 내뱉다가 손을 쥐었다 피며 믿기지 않는 실체의 존재감을 느꼈다. 이상해. 내 의지로 움직여지지만 내 몸이 아닌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흔히 웹 소설 주인공이 말하는 영혼이 씐 빙의 느낌보다는 인형 옷을 입은 느낌에 가까웠다. 이것이 자아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껍데기인 게 느껴진다고 할까.

‘정신 차리자 유자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원하던 게임을 할 수 있게 됐어.’

이게 꿈이든 생시든 일단 나가서 확인해 보자. 무의식이든 꿈이든 환시든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게 우선이니까. 차가운 금속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대체 출구가 어디야?’

체감상 한 시간 정도 헤맨 것 같은데 내부가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RPG의 마왕 성은 왜 늘 이 모양이야? 마계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없나?

‘물론 이게 정말 게임이라면 레벨 디자이너가 게임적 허용으로 작업한 거겠지만….’

이러다가는 제 앞마당에서 미아가 된 최초의 마왕이 되겠다 싶어서 누구든 찾아 길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누군가 속삭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인님이 안 일어나신 지 너무 오래됐어.”

“그냥 오래 주무시는 거겠지. 종종 그러시잖아.”

“아니야! 평소랑 다른 느낌이라고.”

“어떤 느낌인데?”

“주인님이 주무시니까 용사도 나타나고 있지 않잖아. 세계가 완전히 멈춰버렸어.”

“참나,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악역이 있어야 선한 역이 생기는 거야. 너 몇 살이냐? 다 아는 걸 대단한 거 발견한 것처럼 말하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용히 다가가자 푸른색 불꽃이 일렁이는 랜턴 앞에서 박쥐처럼 생긴 마물 둘이 날개를 접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기.”

“어!”

화들짝 놀란 박쥐 두 마리가 안 그래도 동그랗고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고갤 돌렸다.

“주,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일어나셨군요! 저, 저는 그럼 이만….”

다른 박쥐에게 면박을 주던 녀석은 황급히 날개를 퍼덕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 하며, 부르기만 했는데도 어찌할 줄 모르는 걸 보니 이 껍데기가 마왕이 맞긴 하나 보다.

“미안한데, 여기 출구 어딨는지 알아?”

“예? 출구….”

박쥐는 날개에 붙은 작은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우물쭈물했다.

“그… 성에는 출입구가 없는데요….”

“엥?”

“아무래도 적이 왕래하기 쉽지 않게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마왕 성에 대문이 떡하니 있으면 그거대로 웃길 것 같다. 용사님들 어서 옵쇼 같은 느낌 아닌가?

“아, 그럼….”

“주인님께선 보통 포탈로 왕래하시죠.”

“그렇구나.”

이제 막, 이 몸에 들어왔는데 포탈 쓰는 법을 알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보통 이런 빙의물, 특히나 게임 빙의라면 상태창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 모르니 찾아봐야겠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자 박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살폈다.

“…주인님…?”

“아? 응?”

“괜찮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알려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 이름이?”

“페로입니다. 주인님의 전령이에요!”

마왕이라 전령 같은 것도 있구나.

“주인님, 또… 잠들기 전의 기억이 흐릿해지신 걸까요?”

“아… 응. 아무것도 기억 안 나.”

패치로 인해 마왕의 데이터가 주기적으로 교체되면서 리셋된 걸까? 아니면 나처럼 빙의된 사람이 또 있었나? 뭐가 됐든 원래의 마왕도 자주 기억을 잃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페로. 필요한 게 생기면 너한테 물어봐도 될까?”

“물론이죠. 주인님!”

페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못 볼 걸 본 마냥 잽싸게 자리를 뜬 박쥐에 비해 붙임성 있는 스타일 같다.

“필요하실 땐 직접 부르지 않고 생각만 하셔도 저는 들을 수 있으니까요.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달려갈게요!”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들리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부르실 때만 들리더라고요. 전 주인님의 일부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군. 혹여나 사토*레 처럼 속마음이 줄줄이 읽히고 있는 줄 알고 순간 식겁했다.

“하여튼 고마워. 나가는 방법은… 포탈이라고 했지?”

“네, 주인님은 전능하시니 금방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마왕은 이렇게 과하게 칭송받으면서 사는 건가?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그냥 고개나 멋쩍게 주억거리며 뒤로 돌아 멈추지 않고 쭉 걸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머릿속으로 상태창을 떠올렸다. 그러자 바로 파란색 창이 여러 개가 눈앞에 소릴 내며 펼쳐졌다. 이게 진짜 돼?

“어디 보자….”

[캐릭터 정보]

공개 이름: 없음

히든 이름: 아크리스

직업: 마왕

성별: 남

나이: ???

거주지: 게헤나(마왕성)

[전투 스탯]

공격력: 97342

방어력: 95368

회피: 80

…더보기

[소셜 스탯]

✖ LOCK

‘소셜 스탯이 잠겨 있네.’

알리엔토 사가의 전투 요소는 다른 게임과 별다를 바 없지만, 소셜 시스템이 굉장히 돋보이는 게임이었다. 게임 기조가 솔로 플레이 어드밴처이기 때문에 유저들을 자신의 채널로 초대할 수 있다지만, 일반 MMO RPG처럼 사람이 북적이는 느낌은 적었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 소셜 시스템으로 넣은 게 ‘NPC 공략’ 이었고, 이 소셜 스탯이 있는 NPC는 모두 공략이 가능하다.

NPC 공략이란 게 단순 유사 연애 느낌만 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결혼까지 가능했고, 결혼한 NPC를 사이드킥처럼 데리고 다닐 수 있어 의외의 호평을 얻었었다. 마왕이라 소셜 스탯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있긴 하지만 잠겨 있어 열 수는 있는지 궁금했다. 상태창에 손을 뻗어 누르거나 밀어 올려봤지만 ‘LOCK’이라고 적혀있는 글자만 들썩거릴 뿐이었다. 마왕은 공략형 NPC가 아니게 설정되어 있나? 어차피 쓸 일은 없을 테니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아 맞다… 이럴 게 아니라, 포탈. 포~탈이~ 어디 있나?”

자연스럽게 음을 섞어 혼잣말을 중얼댔다. 스탯창을 옆으로 넘기는 제스처를 취하자 스탯창이 밀리면서 스킬 창이 나왔다.

[캐릭터 스킬]

오르쿠스 | 각성기 | 쿨타임: 250초

케르베로스 | 일반 | 쿨타임 120초

공간이동 | 일반 | 쿨타임 30초

꼴에 마왕이라고 스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스크롤을 한참 내리는데 제일 아래쪽에 포탈 스킬로 유추되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스킬 제스처 등록하기] 버튼이 떴고 간단하게 검지를 이용해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으로 등록했다. 이거 진짜 되는 거 맞나?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지만 어색해서 괜스레 헛기침이 나왔다.

상태창을 끄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높은 디지털 음을 내며 사라졌다. 다른 것보다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지.’

망설이긴 했지만,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자 손짓에 맞춰 허공에 푸른색 선이 그려졌고, 블랙홀 같은 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 드러났다. 웅웅대는 소리라던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 같은 게 묘하게 들어가기 거북스러운 느낌이었다.

‘안 들어가면… 별수 있겠어.’

눈을 질끈 감고 포탈 안으로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 포탈의 내부는 진공 공간처럼 고요했다. 정말 포탈이라면 어디로 향하게 되려나? 이왕이면 게임의 처음부터 쭉 경험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긴장감인지 설렘인지 모를 떨림을 만끽했다.

…쏴아아─

바람에 풀잎이 나부끼는 소리와 머리가 뻥 뚫릴 정도로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끝에 닿자 눈이 번뜩 뜨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시야가 돌아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숲이다!’

심지어 생김새를 보아하니 프롤로그 지역인 '프린치피움' 같다. 생각을 데이터로 읽고 이동시켜준 걸까. 현실에서 출퇴근길 지옥철을 몇 년째 겪다 보니 이과는 포탈 개발 안 하고 뭐 하냐고 불만 섞인 농을 친구들과 주고받았었는데, 막상 사용해 보니 정말 편리했다.

“자… 그럼 뭐부터 해볼까?”

막상 원하는 상황에 놓이니 백지가 되어 무작정 발을 옮겨 걸었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느낌이 생생했다. 뺨에 닿는 시원한 바람도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연못 앞에 멈춰서 다시금 내 모습을 비춰봤다. 백발의 뾰족 귀를 한 남자가 표면에 반사되어 나타났다. 햇볕 아래에서 보니 피부가 훨씬 더 창백해 보였다.

‘키는 179 정도 되려나? 나쁘지 않네.’

그보다 의상이 과하게 눈에 띄어서 누가 봐도 정찰 나온 마왕이었다. 이대로 나돌아다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NPC 손에 죽어서 계획이 수포가 될 것이다.

“이 상태로 마을 상점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고, 갈아입어야겠는데.”

아무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통나무 형식의 빈집이 나왔다. 초보자들이 도끼나 나무 활을 주워 초반 아이템 파밍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스팟이기에 숲에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입을만한 것을 찾았다. 체인이 주렁주렁 걸린 견갑과 코트를 벗어 두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천 망토를 둘렀다. 이 정도만 갈아입어도 적당해 보였다.

“망토에 가려져서 안은 잘 안 보이니까 괜찮겠지 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활과 화살 통을 주워 어깨에 걸었다. 마왕의 스킬을 보니 딱히 무기가 없어도 손짓만으로 다 처리가 가능했던 것 같지만, 적당히 평범해 보이려면 나무 활이 최고지. 기본 정비를 마치고 정말로 모험에 나섰다.

…그렇게 체감상 몇 시간이 지났을까?

‘와… 진짜 뭐 해야 할지 모르겠어.’

슬라임 같은 잡몹도 두들겨 패 보고 채집도 해봤는데 마왕 스탯이 넘사벽이라서 그런지 잡몹은 한 방에 죽어버리질 않나, 퀘스트는 진행되지도 않고 자잘한 버그들은 이미 고쳐져 버린 것인지 특별히 큰 이슈가 없었다.

"설마 이렇게 아무 소득 없이 갇혀 버리는 거 아니지? 프렉탈 놈들아!"

그건 절대 안 된다. 현실로 돌아가 할 일이 있다. 막막한 마음에 높은 언덕에 올라 숲을 내려다보았다. 페로가 말한 세계가 멈춰버렸다는 게 이런 것인지 이 세계는 정말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이 게임의 주인공인 '용사'가 나타나야만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또로롱.

맑은 시스템 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뭐지?’

아까 열어봤던 상태창과 달리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 알림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활자가 도르륵 움직이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시스템]

용사 출현! 리헤로스 님이

서버에 접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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