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르르….”
“자, 자리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리헤로스는 앞 좌석에서 마차를 몰고 마차 뒤 칸엔 나, 새끼 루푸스니스 그리고 더벅머리의 남자가 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골골대던 루푸스니스는 HP포션을 먹이니 총 HP 500에서 300 정도 회복되었다. ‘골절’ 상태 이상 때문에 HP의 2/3 이상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기력은 회복한 모양인지 더벅머리 남자에게 입질하고 있다. 사실 아직은 새끼라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음에도 남자는 겁이 많은지 점점 구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멈출 것 같은데.”
“네에….”
“그러고 보니 넌 이름이 뭐야?”
“전 리키입니다. 엘프… 님은 성함이?”
“아크리스.”
무기로 활을 사용하는 데에다가 뾰족한 귀를 보고 엘프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편협한 사고를 가진 인간 같으니라고.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알리엔토 설정상 마족이랑 엘프는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같은 종에서 파생된 거나 다름없다던데, 마왕의 핏줄 안에도 엘프 하나쯤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니 앞으로도 누가 물어보거든 대충 엘프인 걸로 쳐야겠다.
이름을 주고받고 나니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리헤로스가 뒤로 돌아앉아 마차 뒤 칸에 대고 말했다.
“해도 질 것 같고, 근처에서 야영하는 게 좋겠어.”
“그러자. 다 내려.”
리헤로스가 몸을 굽혀 뒤 칸으로 들어왔다.
“루미 이리 와.”
“왕!”
루푸스니스 새끼는 기다렸다는 듯이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리헤로스에게 다가간다. 단순해서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다친 다리가 눌리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루푸스니스를 안아 드는 모습이 꽤 낯설었다. 능숙하다고 할까…아니 그보다 뭐? 루미?
“그 사이에 이름까지 지어준 거야?”
“응, 언제까지 새끼 루푸스니스라고 부를 순 없잖아.”
손가락으로 새끼 루푸스니스… 루미의 정수리를 살살 긁어주자 녀석은 기분 좋은 듯이 그릉그릉 댄다. 그렇게 둘만의 세계에 푹 빠진 상태로 내렸다. 그 모습을 어안이 벙벙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리키가 여전히 내리지 않고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뭘 봐? 너도 안아주랴?”
“아니요… 줄이 짧으니까 아크리스 님이 먼저 내리셔야… 그리고 아크리스 님은 오히려 제가 업어드려야 할 것 같은걸요.”
“….”
어이가 없다. 누가 누굴 업어? 던전에서 멱살잡이 한 번 당했다고 이런 취급인가. 내가 누군지 아냐며 소리칠 수도 없어 답답했다. 리키가 따라 내리든 말든 줄을 잡은 채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뒤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야영할 자리를 찾아 짐을 내려놓았다. 리헤로스와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와서 불을 피웠고, 루미는 리키가 도망가지 않도록 밧줄을 깔고 누웠다. 루푸스니스의 새끼답게 영리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지도를 펴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정하고, 전리품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처럼 피치 못할 야영을 제외하고는 풀벌레와 부대끼는 대신 제대로 된 여관에서 몸을 뉠 수 있다는 사실이 흐뭇해져 왔다.
‘얼른 폭신한 침대에 눕고 싶다.’
일반 NPC들은 수면 모드로 돌입하면 HP가 조금씩 차오르는 게 보인다. UI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낯빛으로 알 수 있다고 할까, 이런 걸 인지할 수 있는 게 현실과 괴리감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엔 이 몸에 들어온 뒤로 잠이 오지 않았는데 깨어있을 때도 HP가 금방 회복되었고 자지 않는다고 해서 컨디션이 낮아지는 일이 없었다. 잠들고 싶다는 행위를 시도해 본 결과, 특별히 꿈을 꾸지도 않고 전원이 차단된 느낌이어서 묘한 미시감 때문에 현실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현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 온전한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깨어있기로 했다.
‘그래도 역시 밤에 혼자 깨어있는 건 심심한데.’
이 세계에 휴대용 게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하늘의 별을 세며 밤을 꼬박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리헤로스는 내가 눈을 붙였으면 했지만, 한사코 마다했다. 하루는 교대로 보초를 서자고 해서 그가 밤을 새운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난 다음 날 피곤한 게 여실히 드러나서 그냥 자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게임 데이터가 아니라 정말 사람 같다.
‘혹시 정말로… 이곳이 게임 속이 아니라 실제 세계인 거 아닐까.’
잠을 못 자니 자꾸만 괴이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간다.
‘…인님….’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지만, 워낙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여서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해졌을 때 비로소 명확히 들렸다.
‘주인님?’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봤기에 머릿속을 맴도는 건지 의아했는데 뒤늦게 눈치챘다. 페로의 목소리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종일 연락이 없으셔서 확인차 왔어요.’
‘왔다는 건… 근처라는 거야?’
‘네!’
머릿속에 우렁우렁 울리는 대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막으려도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서 소용이 없었다. 지끈 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일방적인 볼륨으로 대화할 게 아니라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알았어. 그쪽으로 갈게.’
리헤로스와 그 옆에 루미, 그리고 악몽이라도 꾸는지 끙끙대는 리키가 확실하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야영지를 떠났다.
‘대충 이쯤에 있지 않으려나.’
페로는 내 몸의 일부라고 했던가, 그래서 대충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두리번거리자 위쪽에서 주인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나뭇가지 위에서 페로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파닥거리고 있었다.
“주인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갑작스럽네. 말투가 왜 그래?”
“그게… 조금 공적으로 이야기를 드릴 게 있어서요….”
“공적인… 이야기? 어떤?”
“마군단이 마왕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
‘맞다. 나 마왕이지.’
마왕에 따르는 지위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마왕이 군단을 통솔하지는 않고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아래에 있는 녀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나 보다. 첫날에 성을 둘러볼 생각은커녕 빠져나올 궁리만 했으니 마왕의 집무는 알 턱이 없었다.
“그건, 하아… 그렇지 않아도 곧 돌아가려고 했어.”
“정말요?”
한층 밝아진 목소리의 페로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헤 웃었다. 첫날 내가 깨어나자마자 보였던 웃음과 같았다. 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잘 됐네요! 그럼 바로 돌아가실….”
─부스럭
기척이 난 방향을 휙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 없이도 나돌아다닐 인물은 없을 것이고 짐승이나 몬스터 둘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그림자 형태를 보아하니 사람이었다.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어둠 속 피사체를 잡아보았다.
“리… 헤로스?”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인물이었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도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어리둥절한 모양새였다. 보름달에 걸린 구름이 별의 궤도를 따라 흘러가자 나뭇잎 사이사이에 달빛이 들어섰다. 달이 놓아준 길을 따라 걸어오는 리헤로스는 밤이란 시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눈이 이상해졌나? 아니면… 주인공 버프?
“아크리스?”
“어… 어, 나야.”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혹시 우리가 나눈 얘길 들었을지도 모른다. 부디 아니길 바랐다.
“누구랑 있어? 말소리 같은 게 들리길래.”
“그럴 리가. 비둘기 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런가….”
‘못 들었나 본데, 페로는 잘 숨었겠지?’
다행히도 나뭇가지 위쪽은 어두워서 보이진 않은 듯했다. 리헤로스는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날 속였냐며 저 검으로 망설임 없이 베어버리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며칠간 지켜봐 온 바로 리헤로스의 검술 실력은 알리엔토에서 제일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완력이 센 것보다 저 체구에 구사하지 못할 날렵함, 빛이 번쩍이는 것 같은 움직임을 가진 게 특징이었다.
‘먼 미래이지만, 이런 괴물이랑 싸워야 한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네.’
“이 주변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마물?”
“그건 잘 모르겠지만, 뭔가 우릴 지켜보는 것 같았어. 그런데 너까지 없어져서….”
설마 페로의 기척을 느낀 건가. 주위를 둘러보는 척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페로는 리헤로스가 가진 힘이 느껴지는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서 다른 곳으로 유인해서 페로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겠다.
“그래? 혹시 모르니 주변 정찰해 봐야겠네.”
“응, 위험할 수 있으니까 같이 가자.”
위험이랑 가장 거리가 먼 두 사람의 2인 1조 정찰이라니. 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리헤로스가 없어야 스킬을 마음껏 쓸 수 있어서 혼자인 쪽이 가장 안전하다. 아까 리키한테 무시당한 영향인지 제 맘도 몰라주는 게 괜히 심통 났다.
“내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어.”
“아….”
리헤로스는 어쩐지 어색하게 웃기만 한다. 지체할 수 없어 서둘러 자리를 뜨자 곧바로 뒤를 따라온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보폭이 일정하지 않고 종종 느릿해지기도 했다. 얼른 멀어져야 페로가 도망칠 텐데, 답답한 마음이 들자 뒤돌아 리헤로스에게 말을 던졌다.
“뭐해?”
“…그때, 네가 잘못될까 봐 정말 두려웠어.”
“아….”
아직도 시궁의 주방 일을 생각하고 있던 건가? 그도 그럴 것이 시답잖은 심부름꾼 모험가에서 국가 공인 용사의 타이틀을 달고 처음 입성한 정식 던전인데 적잖이 충격적인 설정과 비주얼, 동료의 부상까지도 갓 발걸음을 뗀 아기 용사에겐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용사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아직 부족하지 않을까?”
“음….”
메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는 애초부터 용사로 기획되어 태어났으니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하기야, 생각해 보면 용사가 이런 걱정으로부터 시작하며 주변 인물을 지키기 위해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용사 다운’ 각성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용사 곁의 조력자가 힘을 북돋아 주고 위로를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조력자가 비록 마왕이긴 하지만.
“리헤로스 내가 생각하기론… 헉?!”
-쿵!
-푸드드득
수풀 쪽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 날아올랐다. 멀리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그냥 야생의 멧비둘기였다. 그보다 무언가 튀어나와서 놀랐다기보다는 기척에 바로 몸을 아끼지 않고 던진 리헤로스 때문에 놀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 쪽으로 밀쳐져 등을 세게 부딪혔는데 튕겨 나오지도 못하게 벽치기 당한 꼴이라 나무와 그의 가슴 사이에 압사당하는 중이었다. 오전에 부딪혔던 위치와 같은 곳이어서 쓰읍 숨을 긁어 마시며 등허리를 문질렀다.
“너 뭐 하는….”
경계하느라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지 집중한 그의 미간이 깊어지기만 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아무 말도 없이 주변 파악만 하는 그를 멍하니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허당 같은 면모에 가려졌지만, 가히 미남이라 칭할만한 외모였다. 푸른 달빛 아래의 리헤로스는 음영 덕분에 얼굴의 윤곽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결점 없는 피부가 빛을 발했다. 아치형 눈썹에 길게 뻗은 아몬드 형 눈매는 쌍꺼풀 라인이 있어서 너무 날카롭지도 않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눈매가 담고 있는 눈동자의 홍채는 투명하다 못해 맑디맑아 아쿠아마린을 빼닮았다. 입술은 또 너무 도톰하지도, 얇지도 않았고 늘 입매가 미소를 머금은 듯이 살짝 올라가 있어서 호감형 외모에 한몫한 것 같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더라도 한 점 굴욕 없는 모습이 완벽하기 그지없다.
‘게임 캐릭터가 좋긴 좋네.’
머지않아 얼굴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민망해져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마침내 시선을 마주했다. 붉게 달아오른 날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아크리스…”
“어… 응?”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 보였다. 어쩐지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거부하기 힘든 호소력 짙은 눈빛이었다.
“우리 야영지로 돌아가야겠어.”
“뭐?”
“느낌이 안 좋아.”
그의 얼굴에 정신 팔려있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숲의 공기가 이상해졌다. 어수선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리헤로스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곧장 야영지 방향으로 달렸다. 그제야 그가 말한 ‘느낌’을 이해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 비릿한 피비린내까지 느껴지는 잔상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괜한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야영지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마른 가지를 가지런히 모아 피워놓은 모닥불이 정신없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전리품을 담은 가방은 찢겨 절반 정도 도난당한 듯 보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앞에서 자고 있어야 할 리키와 루미가 사라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