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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2화 (12/127)

12화

“너… 엿들은 거야?”

“….”

“똑바로 말해.”

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안의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엿들은 건 아니야. 네가 누구랑 있었다는 건 대충 알겠어.”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대화 내용을 확실히 들은 것은 아니고 외부의 인물과 밀담을 나누는 것만 파악했나 보다.

‘그럼 잡아떼는 수밖에.’

“내가 누구랑 있었는지 대충 안다?”

“…크리스.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

“하아….”

“밤에 사람들을 피해서 몰래 이야길 나눌 정도면 심각한 이야기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그게 왜 궁금해?”

“…내가 미덥지 않은 거 아는데, 너도 나만큼 믿어주면 안 될까? 우린….”

“….”

“우린 친구잖아.”

친구라는 단어가 가슴에 쿡 박히더니 얹힌 것처럼 울렁거렸다. 친구라, 너는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정신 차리고 말을 가로챘다.

“웃긴다. 너.”

“뭐…?”

“내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야? 나 감시해? 친구라며. 그리고 내 고민을 말해주면, 네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네가 모든 걸 알아야 할 권리는 없어. 안다고 한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지금까지의 내 모습은 과민반응 그 자체라 티 날 것 같아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앉아있던 리헤로스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팔을 붙잡았다.

“크리스…!”

“이거 놔.”

“….”

“우리 관계는 내일로 끝일 것 같다.”

리헤로스는 놀란 얼굴로 그대로 멈췄다. 그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기에 그만큼 나도 놀랐다. 리헤로스의 손은 맥이 빠진 듯 스르륵 흘러내려서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혼란스러워 테라스를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그냥 발뺌이 아니라 싸움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싸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날이 선 말들이 녹아있는 차가운 공기를 피해 포근한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아봤지만, 불가능했다.

‘하아아… X발….’

내가 그를 ‘그’와 닮았다는 감상을 종종 하지만,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뿌리치고 도망친 모습이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과 닮아가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모질게 몰아붙이거나 비밀에 부친 건 그를 위한 거라고, 어떤 일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마음속에 청군과 홍군을 만들어서 번갈아 가며 변호해댔다. 친구라는 단어까지 가슴속에 맴돌아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끼익

얼마 지나지 않고서야 리헤로스가 방을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한 시간가량 불규칙적으로 버스럭거리는 시트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 뒤척거리다가 잠든듯했다.

‘불편해.’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고 고독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하아아….’

묵묵히 숲속을 걷기만 하는 금발의 남자.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대할 줄 알았는데 그도 노골적으로 피했다. 그의 건조한 반응은 밤새 했던 위안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다. 차라리 욕하고 치고받으며 싸우고 싶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끝난 대화였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말을 던져보았다.

“얘기 조….”

─턱

앞서가는 어깨를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발끝에 걸린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해 앞으로 기우뚱했다. 마왕 몸이 툭하면 비틀대고, 왜 이리 종잇장 같냐고. 사람이든 마족이든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 마법 같은 거에 의존하면 안 돼. 뭐라도 잡으려 손을 허우적댔는데 리헤로스의 반사 신경 덕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훅 들어와 단단히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탱커도 아닌데 어그로는 성공적이었다.’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려 했던 계획에서는 벗어났어도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어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에 띄게 수척한 리헤로스의 얼굴이 뚱- 보였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일이야? 그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는 바람에 원래 하려던 말을 잊었다. 천천히 내 팔을 놓아주더니 다시 앞장서 걸었다.

‘미치겠네.’

죄인이 된 듯 시선을 땅으로 처박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발뒤꿈치를 따르기만 했다. 그 와중에 불현듯 드는 생각.

‘<분리 불안 리헤로스 독립시키기> 자동 클리어네.’

싱숭생숭했다. 예상은 했다만 묘하게 서운하달까. 이렇게 오락가락한 저 자신도 어쩌란 건지 몰라 손을 들어 뺨을 짝짝 두어 번 쳤다. 마지막 목적지로 향하는 갈림길 앞에 리헤로스가 멈춰 섰다.

“크리스.”

“어?”

“…어제.”

먼저 리헤로스 쪽에서 서두를 뗐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 계속 피해왔지만, 그도 답답한 것이 있을 것이라. 그의 눈 밑은 나무 그늘이 드리워 한층 더 우울해 보였다. 이런 사소한 징조는 관계의 배드 엔딩으로 향하는 고속 열차였다. 그래, 욕해. 내가 너무 했다고 말해.

“…미안했어.”

“…?”

“네가 모든 얘기를 나한테 해야 할 이윤 없는 건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

“억지 부리면서… 네 마음 하나 살피지 못해놓고 모든 기회를 운명으로 머물게 만들겠다고 다짐한 게 부끄럽네.”

“……….”

삐진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내 얼굴을 못 본 거였어? 사고 치고 난 후 주인의 눈치를 보는 반려견처럼 눈동자만 슬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하거나 웃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런 색다른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인사가 사과가 될 줄 몰랐지만, 꼭 하고 싶었어.”

“…….”

아니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냐고, 나한테 화내도 모자란 상황에서 먼저 사과를 한다니. 얼떨떨해 넋을 놓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더 시무룩해져서는 그냥 반려견도 아니고 기죽은 강아지가 겹치어 보였다. 긴장됐던 마음이 눅눅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네가….”

“응.”

네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더 미안해.

“네가……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미쳤냐 유자현!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속마음이랑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내 진심은 이게 아닌데 괜히 센척해서는 가까스로 풀어졌던 분위기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쯤 되니 리헤로스가 침을 뱉어도 얼굴로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과… 받아주는 거야?”

조심스레 묻는 리헤로스의 모습에 그를 탓하고 모질게 몰아붙였던 양심에 재판이 열렸다.

─유죄. 그것도 무기징역이다.

“…당연하지. 남자답게 받아줄게.”

“고마워.”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다시 햇살이라는 이름의 미소가 번져갔다. 말라붙은 화분에 물과 비료를 준 것처럼 생기가 넘쳐났다. 게임 속 데이터 쪼가리라고 해도 그와 이런 정서적 교류를 하는 건 정말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지경으로 착한 사람이 존재하진 않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럼… 여기서 작별인가?”

“크음….”

이 갈림길에서 리헤로스가 가야 하는 길은 프린치피움의 마지막 필드 보스 ‘비스크라’가 있는 곳이다. 비스크라의 기획 의도는 ‘대륙으로 나서기 위한 자격을 시험하라.’이였기 때문에 난도가 꽤 높았다.

‘그 던전까지는 동행하고 그 뒤는 온전히 리헤로스에게 맡겨야겠다.’

속죄라는 명목. 게다가 이제 막 화해도 했는데 급히 헤어지는 것도 애매하지 않나. 프롤로그 지역인 프린치피움 퀘스트까지 도와주는 사이드 킥 NPC 같은 느낌으로 이번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목적지임을 못 박았다.

“같이 가자. 진짜 마지막 목적지야.”

“응. 알았어.”

짧게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빙글빙글 떠나지 않았다. 그것보단 수 분의 시간이 느껴질 정도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이상했다.

“왜?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야, 아무것도”

그 말에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장서 걸었다. 기우겠지. 그 묘한 시선이 신경 쓰여서 괜히 얼굴을 툭툭 털어냈다. 여기에 오기까지 보였던 그의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었는데 이 대화가 끝나자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나도 그만큼 후련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를 분리하는 게 목적이라 한들 던전이 끝나면 웃으며 끝내는 게 내 속도 편하겠지, 싶었다.

‘그래, 마지막에는 즐겁게 작별하자.’

비록 종국엔 나를 찢어발길 상대인 걸 알면서도 그러길 바랐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지 오래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역이 보였다. 공주님에게로 향하는 험난한 관문처럼 굵직한 가시덤불이 제멋대로 자라있었다. 그것을 베어 나가는 리헤로스는 1틱에 -3 정도의 대미지를 입고 자가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나는 아무 생채기 없이 길을 빠져나왔다.

“저쪽인가 봐.”

“응 그러네.”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였다. 그 높이가 어마어마해서 빛이 바닥까지 얼마 닿지 못해 어둑했다. 희미한 빛에 의존해서 골짜기를 따라 걷는데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안개?”

“습하긴 한데, 안개는 좀 이상하네.”

자연적인 안개는 아니고 어떤 존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뿌연 안갯속으로 들어서 자 마왕 성에서 느낄 수 있었던 퀴퀴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리엔토 사가를 서비스 종료로 몰고 간 장본인.

─띵

[던전] 비명(非命)의 골짜기 : 비스크라

[시스템]

권장 인원: 제한 없음

이 던전은 수십 명의 파티를 꾸려서 도전한들 전멸하기 일쑤여서 이걸 깨라고 만든 거냐는 원성이 자자했다. 프렉탈에서 올린 마지막 공지에 따르면 ‘고지능의 AI 알고리즘이 유저들의 행동을 빠르게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모든 퀘스트를 적응하며 전투 알고리즘을 학습한 용사 리헤로스와 비스크라 AI 중 어떤 시스템이 우세일지 흥미진진했다. 여태껏 그가 고전하거나 죽을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기에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인기척에 안갯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형체가 움직였다. 움직이는 대로 안개가 바람에 날아가듯이 걷혀 그 형상을 눈에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스스스스스

똬리를 튼 검푸른 몸통이 꿀렁꿀렁 움직였다. 파도처럼 흐르는 비늘만이 이 물체가 움직이고 있단 걸 말해주지만,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게 같은 장면이 눈앞에 반복 재생되는 것 같다. 구불구불한 몸통을 주위에 두른 채 얼굴을 드러낸 비스크라는 마치 천년 묵은 이무기처럼 근엄한 모습이었다. 리헤로스를 마주하면서도 벌레 보는 듯 시큰둥했다. 그러다가 놈의 시선이 내 쪽에서 멈춰 섰다.

“으으음.”

제 눈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느리게 기울이더니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인 양 낮게 침음을 흘린다. 비스크라의 눈꺼풀로 보이는 두 겹의 막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선홍빛의 눈이 번들거렸다.

“오지 말아야 할 존재가 왔군.”

“그게 무슨 소리지!”

비스크라는 나의 정체를 알아챘나 보다. 나도 느껴졌다. 놈이 마왕의 피조물이라는 것.

“흐후후, 우매한 인간은 알 것 없다.”

“그럼 입을 열게 해주지.”

리헤로스의 검이 날카롭게 울리며 검집에서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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