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의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콧등에 올려둔 안경을 검지로 올리자 렌즈가 하얗게 빛에 반사된다.
“절대 안정이 필요하겠어요. 회복 속도가 더딘 걸 보니 그동안 잠을 많이 못 잤다던가, 과로했죠?”
“….”
리헤로스는 힘든 내색하지 않아서 멀쩡한 줄─게다가 게임 캐릭터니까─알았다. 잠은…… 몇 번이나 나 때문에 깼던 날을 생각하니 면목이 없어졌다. 심지어 밤새워 구출 작업을 했다던가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지 않았던가. 대답을 기다리던 의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무리하지 않게 보호자께서 잘 관리해 주세요.”
“예? 보호자….”
“하루치지만 식사 후 약도 잘 챙겨주시고요. 그래야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네….”
“꼭 챙기셔야 해요.”
그녀의 단호함에 압도되어 ‘네’ 봇이 되었다. 하루분의 약병을 탁자에 올려두고선 떠나는 뒷모습을 배웅했다. 얌전히 병상에 누워있는 리헤로스를 바라보았다.
“…하아아.”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손을 잡아 가지런히 정리해 주려 했다. 그보다 비명의 골짜기에 같이 가지 않았더라면 던전 클리어는커녕 죽어서 처음부터 시작했을 거 아닌가. 그랬으면 엔딩까지 몇십 년이 지나도 엔딩은 불사하고 용사가 아장아장 걸음마 떼고 있을 때 마군의 몸집은 점점 불어나 이 세계가 마왕의 손에 넘어가는 엔딩으로 끝날 게 뻔했다. 그럼 궁극적인 목표인 ‘현실로 돌아가기’는 완전히 도루묵 되는 거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엔딩으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자.’
알고 보니 동행자가 마왕이었다- 하는 반전 요소도 자극적이고 좋잖아? 눈앞에서 죽어가던 리헤로스의 모습이 꽤 충격이었는지 오히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구 솟았다. 리헤로스를 어떤 식으로 키워줘야 할까. 지금까지 정석적인 방식으로도 충분히 잘 컸긴 하지만 앞으로 어떤 버그가 있을지 모르니 능력치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맞다. 책.”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냈다. 읽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형문자가 적힌 거친 표면의 양장본은 수많은 손을 거친 모양인지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빛바래있었다.
이 의문의 책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비명의 골짜기를 나오기 직전으로 돌아간다.
…
“리헤로스, 조금만 참아.”
정신을 잃은 그의 팔을 내 어깨에 걸어서는 부축했다. 마왕의 신체에서 가장 부족한 균형 감각 때문에 비틀거렸지만, 자세를 바로잡고 열어둔 푸른 원형의 포탈로 옮기려 했었다.
─짤그랑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고갤 돌리니 어두운 공간 안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맞다. 보상 상자! 하마터면 그냥 나갈 뻔했네.’
사소한 돌발 퀘스트에도 해독초 아이템을 보상으로 집어넣은 악랄한 프렉탈놈들 성향상 메인 퀘스트 용 던전인 이곳에도 필수 아이템을 당연히 넣어두었겠지 싶었다. 한마디로 말해 안 가져가면 뭐 되는 거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리헤로스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끈적였던 독구덩이들은 말라붙어 갓 구운 브라우니 표면처럼 변했다.
─철커덕
힘을 주어 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벌어져 보상의 주인을 반겼다. 예상했다시피 각종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먼지 쌓인 양장으로 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 환경과 어울리지 않은 낡은 책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시선이 쏠렸다.
“이게 뭐지?”
펼쳐보려고 했으나 무슨 사춘기 청소년의 비밀 일기장도 아니고 굳게 잠겨있었다. 물리적인 장치로 잠겨있었다면 무력을 행사해서 열었겠지만, 특수한 마법으로 잠긴 듯했다. 던전 안에서 풀 수 있는 장치가 있을지 벽을 더듬는다던가 상자를 뒤집어가며 찾아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여기서 뭘 할 순 없는 것 같은데… 가지고 가서 조사해 봐야겠다.’
무얼 넣든 불어나지도 않고 무거워지지도 않는 인벤토리라는 이름의 게임적 허용 가방에 귀금속과 책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던 리헤로스를 다시 들어 올려 오시튼으로 돌아왔다.
…
그땐 힘이 빠져서 못 열었던 건가 싶어 다시 힘주어 열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끄떡없었다. 책이라면 이 정도 힘에 찢어질 법도 한데 찢어질 기미는커녕 네게 보여줄 수 없다고 단호히 고하는 모양새였다. 분명히 어딘가에 실마리는 있을 거라 조바심 나지는 않았다. 리헤로스가 깨기 전에 미리 사용처를 찾아두고 깨면 바로 전달해서 시간 절약하기를 목표로 둔다.
무작정 겉옷만 걸치고 나왔다. 백지인 상태에서 정보를 얻기란 쉽지 않지만, RPG 세계에서 치트키나 다름없는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라 가는 길은 매우 익숙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리키가 일하는 식당의 주인, 매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맞이해줬다. 언제 보더라도 늘 한결같은 온도의 미소를 보였다.
“용사님이랑 왔던 분 맞죠? 크리스라고 했던가요?”
“…아크리스라고 불러주세요.”
“앗, 리헤로스가 크리스라고 부르길래….”
매그는 입을 가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충분히 모를 만도 하다. 용사 옆 쩌리 엑스트라 1인일 뿐인데 크리스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억력이 대단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셨네요.”
“아크리스는 아무래도 잊기 힘든 외모이긴 하죠.”
“네…… 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지만 내가 들은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어 되물었다. 하지만 나의 물음표는 허공을 떠돌다 존재감 없이 사라졌다. 매그가 말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 리키는 루미 방생을 위해서 자리를 비웠어요. 보호소에서 적응 훈련하는 게 오래 걸리나 봐요. 얼마였더라…?”
“그렇군요. 오늘은 둘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곧바로 가방에서 비명에 골짜기에서 건졌던 낡은 책을 꺼내 바에 올려두었다.
“매그, 이 책에 대해 알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책이요? 흐음….”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떠오른 게 있는 모양인지 금세 입을 열었다.
“오호, 이렇게 오래된 서적이라면 팔먼이 잘 알 것 같아요. 예전에 이런 책을 한가득 가져와서는 식사하면서 보시더랬죠.”
“팔먼…은 누구죠?”
“골동품 상인이에요. 오시튼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죠. 그분에게 가면 어떤 정보든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예상한 대로 빠르고 속 시원하게 정보를 준 최고의 NPC였다. 식당 겸 주점인 이곳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웬만한 마을 사람들은 한 번씩 방문했을 것이고 매그와 마주하며 많은 이야기도 나눴을 테니 이 마을의 모든 정보를 거쳐 가는 허브가 됐겠지.
팔먼, 골동품 상인. 이 정보를 잊지 않으려 입으로 중얼대며 지도를 펼쳐 확인했다. 지도 위를 더듬어가며 현재 위치 ‘에그앤 매그 키친’을 찾으니 매그의 손가락이 그곳으로부터 세 블록쯤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여기네요. 팔먼씨의 골동품 가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소지품을 챙기고 식당을 나서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NPC라고 한들 신세 지고선 못 참는 성격이라 성의를 표한 것이 없나 식당 전체를 둘러보기도 전에, 테이블에 올려진 바구니를 물끄러미 봤다.
[맛있는 빵 한 개에 은화 한 닢!]
직관적으로 쓰여있는 판넬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밥도 거른 상태라 시장한 김에 빵 하나를 집어 들었고 금화 한 닢을 바에 올려둔다. 조명 아래에 반짝이는 금화를 본 매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크리스, 잘못 내셨어요. 금화네요.”
“아니에요. 도움도 주셨으니까요. 답례입니다.”
“어머, 은화로 주시면 되는데….”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원래도 퍽 잘 웃고 친절하지만, 금화의 반짝거림 만큼 자본주의 미소가 빛났다. 입에 빵을 물고 문을 열어젖혀 나섰다. 바람에 느릿느릿 흔들리는 간판이 보인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문을 나서면서 마지막이라고, 더 올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정들면 안 되는 요주의 인물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인연이란 참 질기네.’
옆구리에 끼워뒀던 지도를 펼치면서 빵을 우물우물 씹어댔다. 고소한 버터 향에 부드럽고 촉촉한 빵 결이 뭉개지며 허기를 달랬다. 여기에다가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지도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빵가루를 툭툭 털어내면서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오픈 필드에는 몬스터… 이 세계의 말로 하자면 마물이 득실대는데 마을이라는 공간만큼은 늘 평화롭다. 걱정거리라곤 없는 사람들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다. 노점의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이 모든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긴 게임 속일 텐데 이곳에 사는 인물들은 나이를 먹긴 할까?’
‘어, 리헤로스는 지금 몇 살이지?’
배가 부르니 쓸데없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줄줄 꼬리 물렸다. 늘 심리검사 테스트 따위를 하면 상상력이 많은 타입이라고 결과가 나오곤 했다. 이걸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 본 적은 없다. 잡념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늘 이성적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한 후에 단호히 결정을 내리고 싶은데 잡생각이 많아져 갈피를 자주 잃는다. 그래서 원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지도와 실제 건물을 번갈아 봤다. 생각 없이 걸어 몇 채의 건물을 더 지나쳤기에 뒤로 돌아 목적지로 향했다.
“여긴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작은 건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는지 닳고 닳은 문은 다른 목재로 부분 수리를 한 모양인지 나뭇결도 제각기에 얼룩덜룩했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문에 달린 유리창조차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알록달록하니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오래된 것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골동품 가게답다.
─끼이익
손잡이를 돌리면 힘없이 부서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온전한 상태로 문이 열렸다. 문 안쪽에는 여러 개의 도어벨이 달려있어 서로 자기주장을 하듯 울려댔고 온갖 잡동사니 사이에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성이 고갤 들어 내 쪽을 바라본다.
“팔먼, 맞으신가요?”
“내가 그 팔먼 맞소만, 젊은 친구가 뭐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
“아… 안녕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유교 청년답게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를 마친 후, 책을 내밀어 보여드렸다. 팔먼은 사각 돋보기안경을 내려쓰며 내민 책을 바라본다.
“이 책이 무슨 책인지 혹시 아실까 해서요.”
“흐음….”
책을 받아든 팔먼은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내 들어 어느 하나 단서를 놓칠세라 섬세하게 조사하는 탐정같이 굴었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은 과학자처럼 탄성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더니 목차 정리용 인덱스가 덕지덕지 달린 큰 파일을 책장에서 빼냈다.
“이것 참. 이런 형식으로 쓰인 책은 오랜만이구먼.”
파일을 펼치니 그 안에 각종 책 표지의 특징, 언어, 저자, 출신지 같은 것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일명 ‘도서 검색기’의 용도였다. 디지털이 없는 판타지 세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수집해두는구나. 무척 신기해서 고개를 쭉 빼서는 구경에 몰입했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팔먼과 거의 붙어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 책장을 쭉쭉 넘기던 팔먼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그 안에는 이 책과 같은 디자인의 표지는 없었음에도 그는 어떤 표지 그림을 쿡쿡 찔러대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호라, 그런 거였구먼. 워낙 오래된 책이라 자료에는 안 남아있지만, 이 특징만큼은 알아보겠어.”
“어떤 책인가요?”
드물게 기대되는 억양으로 물었다.
“내일 다시 오게.”
“네? 내일이요?”
“마침 그 책을 쓴 친구가 내일 오기로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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